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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애덤슨: 오늘의 에세이-철학사를 위한 스무 가지 규칙


철학사를 위한 스무 가지 규칙

20 Rules for History of Philosophy


―― 피터 애덤슨(Peter Adamson)


[...]


규칙 1: 동일한 관념이 여러 번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다


철학사에서 한 가지 흔한 오류는 두 인물/전통이 동일한 관념을 제시했다는 것을 깨닫고서 즉각적으로 역사적 관련성을 추론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와 인도 고전 철학 둘 다에서 출현한 원자론 또는 일원론이 있다. 또는, 인과관계에 관한 알가잘리(Al-Ghazali)의 논의와 흄의 논의가 있다. 그렇다. 유사성이 두드러지고, 그래서 역사적 관련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사성은 그것 자체로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그런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이런저런 식으로 영향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흔히 가장 간단한 설명은 그냥 어떤 주제에 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떤 한정된 범위의 입장들(물체는 무한히 분할될 수 있거나 아니면 그럴 수 없다는 입장처럼,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원자론이다)로 기울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규칙 2: 텍스트를 존중하라


이것은 때때로 "자선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로 불리는 것의 내 판본이다. 이 규칙의 최소 판본은, 의심할 만한 꽤 강한 이유가 없을 때에는 읽고 있는 철학 텍스트가 의미가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뛰어난 유명한 사상가뿐 아니라 덜 비범한 인물의 경우에도 성립한다. 여기서 또한 매우 최근(20세기)까지 존속하여 손에 쥐게 되는 어떤 텍스트도 이미 이전 독자들의 선택 과정을 겪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가치가 있다. 그래서 그런 텍스트는 꽤 훌륭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없더라도, 유용한 철학사는 비정합적인 것과 오류를 찾아내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로부터 정합적이고 흥미로운 논증 노선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이 여전히 명백한 듯 보인다(적어도 내게는). 물론 이것은 역사적 인물들이 결코 내적 모순이 없었고, 오류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등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도 명백한 실수를 해소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우리 해석은 그런 실수를 그들에게 전가하는 일을 삼가하려고 해야 한다.


규칙 3: 텍스트를 의심하라


팟캐스트에서 내가 자주 강조했듯이, 텍스트는 흔히 길고 복잡한 전달의 역사가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이천 년도 더 전에 처음 저술되었는데, 추정컨대 필경사에게 구술되었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초의 사본도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다음에 우리에 이르기 위해 그것은 여러 번 손으로 필사되었어야 했는데, 최초의 잔존하는 사본이 사본의 사본의 사본...이 되었으며, 그리고 최초의 잔존하는 사본은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몇 세기가 지난 비잔틴 시대에서 비롯된다. 물론 더 최근 저작의 경우에는 상황이 꽤 어렵지 않지만, 확실히 인쇄술의 발명 전에 생산된 것이라면 어떤 것도 필사를 포함하고, 그래서 초기 인쇄본의 경우에도 다투어야 할 문헌학적 쟁점들이 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근대 이전의 철학 텍스트의 요체로 정말 진입할 것이라면, 의미를 본원적으로 바꿀 수 있을 그 텍스트의 다양한 변양태의 현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필경사들은 실수를 저질렀고, 텍스트 본문에 주석을 편입했으며, 스스로 찾아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교정했다(그런데 이 필경사들은 어리석지 않았는데, 그들의 교정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노골적인 조작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배앓이로 죽어가는 동안에도 억제되지 않은 아비센나(Avicenna)의 성적 욕망에 관한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강조했을 때 팟캐스트는 이것에 저촉되었다. 그 후에 나는 이것이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저술된 아비센나의 전기에 나중에 추가된 적대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는 최근의 논문을 알게 되었다. [...] 요점은, 철학사가들은 감당할 수 있는 한 문헌학자도 될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텍스트 전달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의 작업을 진지하게 간주하거나 심지어 그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규칙 4: 맥락을 존중하라


팟캐스트 청취자는 내가 철학이 산출되는 더 넓은 역사적 맥락을 많이 강조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이것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명백할 것이다. 당대 아테네의 정치적 상황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예컨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철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는 영국 역사에 관해 전혀 모른 채 홉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역사적 맥락은 더 놀라운 방식으로 관련될 수 있다. 이것과 관련된 내가 애호하는 사례는 우주의 영원성을 둘러싼 이슬람 초기의 논쟁과 코란의 영원성이나 올바름을 둘러싼 현대 논쟁 사이의 유사성이다. [...]


여기서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최소한 두 가지의 걱정거리가 있다. 첫째, 철학사가 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변환된다는 점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멸시하듯 "개념사"를 거론하는데, 여기서 철학적 이론은 다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성찰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철학사란 일종의 역사인 동시에 일종의 철학이라고 강하게 느낀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철학적 논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지만, 그런 논증을 검토하고 평가하는 것은 여전히 철학적 기획이다.


둘째, 이 규칙은 철학사를 수행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말로 모든 철학자뿐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맥락 전체에 관해서도 전문가가 되어서 정치적 사건에서 사회적 환경, 경제적 요인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하는가? 내 대답은 기본적으로 그렇다일 것이다. "좋아, 나는 역사적 맥락에 관해 충분히 알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알게 되는 것은 도움이 되거나 적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원칙적으로, 역사적 맥락을 아무리 잘 이해하고 있더라도, 맥락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은 항상 가치 있는 일이다. 한계는 시간과 전문성의 견지에서 해낼 수 있는 것에 의해 설정된다. 내가 제시하고 있는 여타의 규칙들 가운데 일부처럼 이 규칙의 의도는 사실상 닿을 수 없는 이상을 위해 노력하도록 무한정 격려하는 것이다.


규칙 5: "마이너" 인물을 진지하게 고려하라


"빈틈없는(without any gaps)"이라는 슬로건을 감안하면, 나는 아무도 이 규칙에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팟캐스트로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주요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철학사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이에 발생한 모든 것을 생략한 채, 한 위대한 사상가에서 다른 한 위대한 사상가로 그냥 뛰어넘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유명한 철학자들이 우리 모두를 우선적으로 그 주제로 이끈 사람들인데, 플라톤에 노출됨으로써 철학 버그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 혼자만이 아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이 유명한 인물들을 이해하는 것일 뿐이라도, 그들은 바로 직전 시기의 또는 동시대의 덜 유명한 인물들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여태까지 팟캐스트에서 충분한 사례들이 제시되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했듯이, 이른바 "마이너" 인물들도 독자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학문에서는 이전에 무시된 저자들이 일상적으로 "발견되"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예를 들면, 중세 철학에 관한 연재물에서 이전에는 비교적 무명이었지만 최근의 이차 문헌에서 많은 주목을 받게 된 장 뷔리당을 고찰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다른 한 가지 점은 지금까지 "위대한 철학자"에 관해 생각할 때 떠오르게 되는 모든 인물이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이너" 인물을 무시하는 것은 철학사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진 여성 저자들의 기여를 생략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여성에 대한 태도는 여성 철학자가 남성 철학자보다 덜 중요하게 평가될 것이라는 점이 거의 보장되었다. 예를 들면 울스턴크래프트 같은 몇몇 여성 철학자는 현재 메이저 사상가로 진지하게 간주되지만, 여상 사상가들을 부당한 익명성으로부터 구출한다는 점에 있어서 갈 길이 멀다.


이 규칙은 역사가가, 예컨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를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인물들은 주의 집중에 대한 보상에 있어서 거의 소진될 수 없는 듯 보이는 복잡하고 심원하며 가치가 있는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사는 B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유익할 것이다.


규칙 6: 몇 가지 연대를 암기하라


이 규칙은 명백한 듯 보일 것이지만, 내가 언급하는 까닭은 그것이 정말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팟캐스트에서 가끔 언급되었듯이, 나는 연대를 암기하는 데 능숙하지 않고, 그래서 중요한 철학자들의 사망 연대 같은 어떤 특정한 연대들을 표지물로 기억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것들을 기억하여 그들이 어느 철학자보다 선배인지 아니면 후배인지 알게 됨으로써 그 철학자의 활동 시기를 최소한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기억하면 좋은 한 가지는 서기전 399년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사망 연대인데, 왜냐하면 거슬러 올라가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비철학적 연대들을 암기하는 것도 좋은 생각인데, 철학자의 저작의 맥락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된다(규칙 4를 보라).

[...]


규칙 7: 그들이 관심을 갖는 까닭을 자문하라


이 규칙과 다음의 몇 가지 규칙은 시대 착오를 피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충분히 명백한 듯 보이지만, 시대 착오는 철학사에서 피하기가 놀랍도록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나는 그 쟁점을 몇 가지 양상으로 분해하겠다고 생각했다. 이 규칙은, 내 생각에, 흔히 간과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역사적 인물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철학적 문제들에 의해 마찬가지로 동기를 부여받는다고 가정하는 대신에 스스로 제기하는 각 쟁점에 관심을 갖는 까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흔히 그것은 역사적 맥락에 있어서의 어떤 것(다시 규칙 4를 보라), 즉 선행자에 의해 고수된 견해 또는 자신의 철학적 체계에 있어서의 어떤 다른 것 때문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어느 특수한 논증 또는 논의를 전개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 그 논증 또는 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애호하는 사례는 세계의 영원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중세 논쟁이다. 현대 물리학이 그 논쟁을 쓸모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논쟁 전체를 흥미롭지 않은 것으로 일축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논쟁의 동기를 파헤치면 [...] 영원성 논쟁은 영원성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고, 더 추상적으로, 필연성과 인과관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규칙 8: 텍스트 전체를 읽어라


이 규칙은 언급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급되는 까닭은, 사실상 개별 구절 또는 논증 또는 주장을 자체의 텍스트적 맥락에서 떼어내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사례는 팟캐스트 에피소드 205에서 언급되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에 관한 일화일 것인데, 그 논증은 한두 쪽으로 요약되며 거의 항상 그것이 수록된 저작(<<프로슬로기온>>)의 나머지 부분을 검토하지 않은 채 그것만 읽힌다. 사실상 그 논증은 신을 파악하고자 하는 긴 시도에 있어서 첫 걸음일 뿐이고, 그래서 그 책 전체를 읽지 않는다면 안셀무스가 작정하고 있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극단적인 일례이지만, 그것이 비전형적인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것들이 수록된 저작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읽을 필요가 없는 다소간 독립적인 단편들이 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어떤 철학자들은 경구를 써서 저술한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경우에도, 구조나 주제적 아크에 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니체의 경구와 단문의 모음집이 구성되었다고 결코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스펙트럼의 반대편 극단에서는, 플라톤이 각 대화의 통일성과 구조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공공연히 명백하더라도, 사람들이 흔히 별개로 이해될 수 있을 것처럼 플라톤 대화편의 단편들을 읽는 것은 나를 놀라게 한다. [...]


물론 저작 전체를 읽은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거나 가능한 일도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의 경우처럼 단편들만 보존되어 있는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중세 수고에서는 익명의 주석과 관련하여 유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있다면) 어떤 다른 글이 동일한 주석자에 의해 작성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전체를 읽는 것이 전공 책무가 되는 거대한 저작들이 존재하는데, 가까운 미래에 나머지 아홉 권을 읽지 않을 것이라면 <<국가>>의 일 권을 읽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타의 규칙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지향해야 할 이상이다. 가능할 때마다 저작의 나머지 부분에 의거하여, 예를 들면, 저자가 저작 전체에서 무엇을 행하고자 했을지 그리고 텍스트의 이 특수한 부분이 전체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 고려함으로써 텍스트적 증거를 고찰하라.


공교롭게도 이것은 시대 착오를 피하는 또 하나의 길이다. 저작 전체의 목표와 기획에 더 주목함으로써 하나의 고립된 구절과 관련된 결론으로 비약하고 시대 착오적인 철학적 관심사를 그 구절에 주입할 개연성이 더 낮아진다.


규칙 9: 전문 용어를 습득하라


또 하나의 명백한 규칙일 것이지만, 역시 언급할 가치가 있다. 모든 철학자가 독자적인 전문적 어휘 또는 반전문적 어휘를 개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철학자가 그렇게 한다. [...] 어떤 철학자를 읽을 때에도 어떤 낱말이 전문적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최소한 문제가 되는 술어를 추적할 만큼 충분히 일차 언어를 알고 있을 것을 명백히 요구한다. [...]


이것은 시대 착오를 피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또 하나의 규칙이다. 어떤 술어들이 당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방식뿐 아니라 어느 철학자가 특별히 술어들을 사용하는 방식도 포함하여 그 철학자의 언어에 관해 더 많이 알수록 이런 술어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가정을 주입할 개연성이 더욱더 낮아진다. 지금까지 해석자들이 어느 주어진 낱말이 실제로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했지만 오늘날 그것이 의미하곤 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잘못 간주했다고 학자들이 지적한 많은 사례가 존재하는데, 떠오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이다. 그런 실수를 방지하는 최선의 길은 철학자의 저작들 전체에 걸쳐 어느 낱말의 용도를 추적하는 것인데, 그 낱말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 맥락을 활용하는 것이다.


규칙 10: 침묵이 말보다 더 시끄럽지 않다


철학 텍스트를 읽고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들 가운데 하나는, 읽고 있는 철학자가 언급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고의로 생략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선행자들의 암시, 억제된 전제, 역사적/종교적 맥락의 암시 등은 모두 부재할 때 시끄러운 침묵인 듯 보이는 것을 유발할 것이다. 그리고 명확하게도, 철학자가 고의로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을 알고 있는 것은 모든 역사가의 연장통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 연장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관심사와 철학적 세계관이 어떠한지에 대단히 의존할 것이고, 그래서 이 규칙을 깨는 것은 시대 착오의 다른 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철학자의 지성적 맥락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우리의 (불가피하게도 매우 편파적인) 이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철학자가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그렇고 그런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언급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는 그것을 고의로 언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최악의 경우에 이런 종류의 독법은 우리 자신의 관심사를 거리낌 없이 텍스트로 투사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식으로 침묵으로부터 논증하기 전에 정확히 무엇을 증거로서 가질 필요가 있는지라는 의문은 흥미로운 것인데, 어떤 주장들이 주도면밀하게 억제되고 있다고 사실상 말하는 철학자라는 것이 일종의 면허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는 어느 철학자가 말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말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선호와 관념을 이끌어낸다면 항상 큰 과오를 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규칙 11: 비판적으로 생각하라


시대 착오를 피하는 것과 관련된 이런 모든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텍스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에 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얻게 되었을 것이고, 사실상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역사적 원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첫 번째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 철학의 역사는 일종의 역사인 동시에 일종의 철학이기도 하다! 철학은 입장을 재구성하고 있을 때에만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나서, 바라건대, 모든 복잡성과 역사적 맥락 등에 있어서 이해하게 된 논증을 평가할 때에도 도입된다.


여기서 나는 내가 영국에서 가르쳤을 때 철학자들이 많이 강조하곤 했던 것을 좋아하는데, 철학 교육의 바로 그 시작부터 학생들은 자신의 에세이 또는 수업 중 토론에서 텍스트를 요약하고 제시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 것도 말해야 하고, 가능한 반대 논증도 고찰해야 한다. 기타 등등. 물론 흔히 이것은 학생들이 아직은 완전히 이해할 입장에 있지 않은 논증과 관념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읽고 있는 것에 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시키기 때문에 좋은 접근 방식이다.


이것을 행하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우리는 결국 이런 철학적 견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참인지 여부에 관심이 있을 것라는 점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동기가 엄격히 역사적일지라도, 어느 주어진 철학자의 관념들을 후대의 철학자들(또는 심지어 재고 후에 동일한 철학자)이 어떤 식으로 거부했거나 계승한 까닭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관념들에 관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흔히 있을 것이다.


규칙 12: 청중에 관해 생각하라


모든 훌륭한 작가, 교사 그리고 강연자는 대상이 되는 청중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이 그들의 흥미를 끌 것인지,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하라. 명백히 모든 철학자가 훌륭한 작가, 교사 그리고 강연자인 것은 아니고, 몇몇 철학 텍스트는 어떤 특별한 청중도 염두에 두지 않고 저술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텍스트는 최소한 어느 정도 독자층을 구상하고 저술된다. 이것은 해석에 대한 중요한 지침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어느 철학자가 지향하는 청중의 배경 지식에 의거하여 무엇을 당연히 여길 수 있을지 그리고 청중이 어떤 다른 텍스트들을 알고 있을 개연성이 높은지 아는 것이 긴요하다. 그저 특정한 일례를 제시하면,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 속에 호머와 헤시오도스의 존재 또는 중세 독자의 정신 속에 성경의 존재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어느 독자를 겨냥하여 논증을 구성한 방식에 관해 생각할 때, 예컨대, 그 독자가 주로 신학적 관심사를 품고 있을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유용할지도 모른다. 그렇고 그런 논증이 삼위일체에 관해 또는 군주제의 정당성에 관해 간접적으로 무엇을 함축하는가?


결과적으로 철학사가는 어느 텍스트의 독자층이 누구였을지에 관해 가능한 한 많이 알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그 독자층이 무엇을 읽었고, 인식했으며, 고찰했었을지에 관해 가능한 한 많이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명백히 역사적 맥락에 관해 더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은 더 구체적이고 어느 정도는 더 어려운 과업, 즉 완전히 수행할 수도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기 동안 청중의 입장을 전적으로 인식할 가망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규칙 13: 은유를 진지하게 간주하라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동굴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유출"과 롤스의 "무지의 베일"에 이르기까지 은유, 유비 그리고 직유로 가득차 있다. 일반적으로 나는, 구조 또는 성격 묘사와 드라마적 설정처럼, 철학 텍스트의 "문학적" 특징을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을 대단히 옹호하는 지지자이다. 그래도 은유는 특히 흥미로운 사례인데, 왜냐하면 은유를 정확히 어떻게 적용할지 결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명백히 많은 철학적 은유가 매우 상세히 검토되고 분석되었는데, 지금까지 플라톤의 동굴이 불충분한 주목을 받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더 생각할 가치가 있는 많은 은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 즉 개체(또는 영혼), 가정, 도시 그리고 우주를 서로 비교하는 광범위한 고대의 경향에 관한 논문 한 편을 저술했다. 그런 은유들이 정확히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찰학자의 사유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궁리하는 것이 유용한 것으로 판명된다. 도시 또는 다른 사회와 우주 사이의 그런 비교는 철학자들을 군주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떠미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에 공히 우주는 단일한 신의 원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정반대로,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서 그 은유를 도출하는가?) 그 다음에 은유는, 만약에 있다면, 어떤 논증적 무게를 갖고 있는지에 관한 쟁점이 있는데, 어느 철학적 견해가 수사학적으로 강력한 은유로 조명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에 더 설득당하는 것인가? 또 다시, 플라톤의 동굴의 경우에 그가 아무 은유도 없이 그저 다음과 같이 말했었더라면 얼마나 더 적게 공감되었을지에 관해 생각하자. "나는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참된 실재 대신에 실재의 이미지에 주의를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공명 자체가 철학적 입장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런가? 텍스트의 문학적 특징에 주목하는 것은 더 일반적인 규칙이 될 수 있는 것의 일례일 뿐이다. [...]


규칙 14: 종교를 진지하게 간주하라


그렇다. 이 규칙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규칙은 최근에 내가 중세 철학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저술하면서 많이 떠올랐는데, 내가 죽 훓어보고 있는 거의 모든 책에서 종교가 얽혀 있다. 원고를 쓰면서 나는, 그 문제를 잘못 표현하지 않은 채 또는 그 점에 있어서는 상황의 종교적 측면에 관심이 있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은 채, 종교에 거의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 적실한 듯 보이고 흥미로울 방식으로 그 문제를 제시할 방법에 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철학사에서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종교적 신자였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한 듯 보인다. 이것은 중세의 로마 기독교도뿐 아니라 고대의 이교도 사상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교도 철학자들]은 당대의 종교에 대해 문화적으로 독특한 해석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도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이었고, 그래서 우리에게 더 중요하게도 그들은 저작 속에서 종교에 관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종교적 쟁점은 [...] 우리가 읽고 있는 고대의 철학적 저작들의 바로 그 얼개 속에 얽혀 있으며, 그리고 물론 이것은 다양한 문화의 중세 시기의 경우에도 초기 근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이 규칙은 역사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역사적 맥락의 여타 양상들과 꼭 마찬가지로 종교적 맥락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더 힘든 것도 의미하는데, 그것은 철학자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 객관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철학사가인 이상 우리의 목적은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영감을 취하지 말아야 하거나, 또는 자신의 무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위대한 종교적 권위자들이 저지른 오류를 찾아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종교적 견해가 철학적 견해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그것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 사실상 나는 나아가서 어느 사상가의 세계관의 어느 양상이 "철학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종교적'인 것인지 걱정조차 말아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대체로 이런 분할선은 흐릿하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것에 관해 걱정할 이유가 없다. [...] 몇몇 독자들은 철학이 종교의 안티테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철학적 입장으로서 그것이 어떤 장점을 갖추고 있던 간에, 그런 입장은 철학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출발하기에 좋은 입지가 아니다.


물론 이 규칙은 자신의 믿음이 여전히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무신론자라면 신의 존재에 대한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과 관련하여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말할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말이다! [...] 최초의 그리고 매우 힘든 단계는 읽고 있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고 종교를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이 그것의 일부이다.


규칙 15: 철학으로 간주되는 것에 관해 유연하게 생각하라


어떤 의미에서 이 규칙은 종교를 진지하게 간주하라는 이전 규칙의 일반화이다. 이 규칙으로 내가 제기하고 싶은 주장은, 매우 최근까지 [...] "철학"이라는 낱말은 오늘날 우리가 함축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함축했다는 빈번한 주장을 명백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여전히 계몽주의 시대 동안 "과학자"라고 부를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연 철학자"로 불렀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체적으로 낱말의 의미가 변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들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철학적"이지 않은 탐구 주제를 "철학"의 구성 요소로 간주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분과학문적 경계를 인식하지 않았고, 그래서 인식론과 형이상학 같은 주제에서 천문학, 수학 그리고 의학 같은 주제로 매우 자유롭게 이동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팟캐스트에서 의학, 천문학 그리고 점성술을 비롯하여 "과학적"인 그리고 심지어 "사이비 과학적"인 주제에 대단히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과학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쪽에는 철학 그리고 저쪽에는 신학 또는 신비주의 사이의 경계는 꽤 흐릿하였거나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교훈은, 역사가들은 우리의 의미에서 "철학적"인 듯 보이는 텍스트, 인물 그리고 운동에 주의를 한정시키기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재료가 철학적인 까닭은 그것이 나타나는 장소 때문이 아니라 [...] 그것이 철학적으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규칙 16: 텍스트에 관한 텍스트를 존중하라


전통적으로 통째로 무시받는 철학적 글쓰기의 한 장르는 주석이다. 사실상 다른 철학적 텍스트에 관한 다양한 텍스트가 존재하는데, 주석뿐 아니라 주해, 의역, 요약 등도 포함될 것이다. [...] 좋은 일례는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고대 후기에 산출된 다른 철학적 저작들에 대한 철학적 주석의 방대한 집합체이다. [...] 중세 로마 철학과 이슬람 전통에서도 많은 주석이 존재한다. 사실상, 이슬람 세계에서 철학은 대략 12세기 이후에 끝났다는 널리 퍼진 신화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그때 이후로 흔히 철학은 진지하게 간주되지 않을 위험에 언제나 처하게 되는 주해와 주석의 형식으로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


그런 텍스트를 진지하게 간주하고 철학사에 편입시켜야 할 이유는 최소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그런 텍스트는 주석을 다는 텍스트를 조명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여전히 충족할 수 있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는 독자적으로 뛰어난 철학자일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철저하고 자세한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전의 텍스트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에 대한 매우 유용한 지침인데, 물론 그것이 그의 해석이 항상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언제나 참조할 가치가 있다. 명백히 모든 주석이 그런 기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어느 주석이 현재까지 살아남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일반적으로 많은 세대의 독자들이 그것을 유용한 것으로 알아챘다는 징후이다.


둘째, 주석가는 스스로 철학자이고 주석의 맥락에서 흥미롭고 독창적인 것을 말하는데, 때때로 이것은 일종의 주석으로부터의 일탈로서 일어나지만, 어느 구절에 대한 주석 속에서도 흥미로운 재료를 찾아낼 수 있다. 주석자가 혁신적일 경우―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주석을 다는 플라톤주의자―는 흔히 그가 원전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는 바로 그 때이며, 그리고 그런 혁신은 매우 미묘한 방식―예를 들면, 원전이 의역될 때 사소하지만 의미가 다른 어휘 선택으로 나타날 것이다.


세째, 주석 활동 자체와 관련하여 철학적인 것이 존재한다. 과거의 주석자들이 행하고 있었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인 철학적 텍스트를 읽을 때 행하고 있는 것과 대체로 유사하다. 텍스트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참인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 주석자가 텍스트에 가져오는 방법과 전제는 우리 자신의 실천을 조명할 수 있다. [...] 철학사를 수행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며, 그리고 이 점을 이전 시대의 텍스트에 관한 텍스트보다 더 잘 예시하는 텍스트는 전혀 없을 것이라고 나는 굳게 확신한다.


규칙 17: 이차 문헌이 아니라 일차 문헌에 집중하라


나는 흔히 학생들에게 말한다. "언제나 나는 여러분이 이차 문헌 한 편을 읽는 것보다 일차 문헌을 한 번 더 읽기를 바란다." 이 규칙의 요점은 학생들로 하여금 학자들이 어느 역사적 원전에 관하여 이미 저술한 것을 그저 반복하기보다는 그 원전에 대한 독자적인 인상과 분석을 고무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차 문헌이 쓸모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의 사용법에 관해 그리고 일차 문헌을 읽는 것과 학술적 문헌을 사용하는 것 사이의 균형에 관해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일차 문헌에 집중하며, 그리고 이차 문헌에 의존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생각을 갖는 것이 만인[...]에게 좋은 경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용도는 대체적으로 문제가 없다. 예를 들면,


● 그것은 일차 문헌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일차 문헌에 관한 새로운 연구를 제시하기를 원한다면, 바퀴를 결코 다시 발명하지 않도록 이미 거론된 것을 알 필요가 분명히 있다.

● 일반적인 이차 작업물[...]은 저쪽에 어떤 일차 문헌이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더 자세히 연구하고 싶은지에 대한 넓은 감각을 제공할 수 있다. [...]


까다로운 부분은, 이차 문헌이 여러분이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 구별짓기 또는 주장을 제기함으로써 여러분이 일차 문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할 때 발생한다. 물론 이것도 유용한데, 사실상 그것이 일반적으로 철학사에 관한 출판된 학술 문헌을 읽는 것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위험한데, 왜냐하면 이런 학술 문헌을 읽음으로써 "참신한 관점" 없이 일차 문헌에 접근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미 찾아낸 문제나 해결책만 바라볼 위험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권하는 내 충고의 요점은 이렇다. 의심이 들 때 먼저 독자적으로 결정한 다음에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바와 어떻게 비교되는지 알기 위해 검토하라.


규칙 18: 본질화하지 마라.


팟캐스트을 위해 인도 철학에 관해 읽으면서 나는, 특히 오래된 이차 문헌에서 "자아에 대한 관심은 인도의 세계관에 근본적이다"라거나 "비폭력은 인도 문화의 인간주의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와 같은 주장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 학자들과 비인도 학자들에 의해 공히 제기되는 그런 주장들은 일반적으로 찬양할 생각으로 진술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런 주장들은 환원주의적이고, 솔직히 어리석은 것이다. 사실상 나로 하여금 이 새로운 규칙을 고안하도록 촉발한 어떤 사례에서 한 저자가 비폭력(아힘사)은 인도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것이고, 그래서 20세기 중반 인도 역사의 비극적인 굉장한 폭력은 아무튼 인도인의 참된 본성의 위배 또는 일탈 행위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미심쩍으리만치 반대 증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인다. 다른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찾아낸다. 지금까지 나는 [...]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거나 그렇지 않다라는 진술, 이슬람은 "불관용적"이다라거나 "관용적"이다라는 진술을 흔히 접했다.


진실은, 종교적 문화를 비롯하여 문화는 복잡하고, 내부적 비일관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며, 시간에 따라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는 어느 주어진 종교의 모든 옹호자 또는 어느 주어진 문화의 모든 구성원이 획득하는 어떤 종류의 본질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종교보다 문화나 지리적 지역에 관해 이런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인도 주민 일반이 우파니샤드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특수한 철학적 견해 또는 윤리적 격률에 대한 신념을 품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말로 명백히 터무니없는 듯 보인다. 여기서 표면 아래 잠복해 있는 것은 전형화하고자 하는 우리의 충동이다. [...]


종교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까다롭다. 나는, 실제로 무슬림인 누군가가, 예를 들면, 코란과 하디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틀린 해석이 있다는 점에 의거하여, 이슬람이 "정말로 신봉하는" 것에 대해 이해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역사가로서의 역량을 갖추고서 글을 쓰고 있는 비무슬림 또는 심지어 무슬림 철학사가가 이런 견지에서 생각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의문은 이러해야 한다. "그렇고 그런 시기에 실제 무슬림들은 그들의 종교와 관련하여 무엇을 믿었는가?" [...]


이 규칙은 철학사에 대해 중요한데, 특히 어떤(특히 이른바 '비서구적'인) 철학적 전통이 독특한 본질적인 특성―더 '영성적'인, 더 '결정론적'인, 또는 무엇이든 간에―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널리 퍼진 경향 때문이다. 이것은 나쁜 접근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상당히 지속된 어느 전통 내부로부터 모든 사상을 특징짓는 어떤 종류의 영속적인 특성을 찾아내기보다는 그 전통 내부에서 긴장과 불일치를 찾아낼 개연성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어느 문화에서 자주 재현되는 관념들이 아무튼 그 문화의 "본유적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게으른 짓이고, 더 흥미로운 의문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어떤 역사적 또는 지성적 원인들이 그런 관념들의 보급의 근저에 놓여 있는가?


규칙 19: 전문 용어에 주의하라


내 생각에, 이 규칙은 인문학의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대해 좋은 충고이지만 철학자와 철학사가에게 특히 적실하다. 현대 철학, 분석 철학과 대륙 철학은 공히 당혹스러운 전문 용어와 더불어 축약과 나열된 명제들에 대한 논리적 표기 같은 기술적 도구들로 꽉 차 있다. 확실히 이것을 위한 장소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철학은 정밀성과 엄밀성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형식 언어와 전문 용어는 매우 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분석 철학자는 흔히 보통 언어가 꽤 쉽게 동일한 것을 말할 수 있을 때에도 전문적인 기호들을 사용함으로써 또는 독자가 나열된 많은 테제가 나타내는 것을 외우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함으로써 독자에게 상황을 불필요하게 어렵게 만든다. [...] "대륙" 철학의 경우에는 동료 평가를 통과한 패러디 논문의 추문이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한 개의 전문 용어, 약어 또는 태그가 도입될 때마다 독자가 함께 머무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이런 장치들의 축적은 텍스트를 거의 읽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물론 그것들의 사용은 흔히 정당화되며, 그리고 일반 독자에게 불가해한 것이 흔히 전문 독자에게는 직설적이다. 그러나 규칙은 이러해야 한다. 명료성, 엄밀성 등에 있어서의 이득이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부담을 가중시킬 만큼의 가치가 없다면, 형식화하거나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 마라.


이 규칙이 철학사와 특별히 관련되어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현대의 기술적 도구와 전문 용어의 사용이 시대 착오의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내가 애호하는 사례는 [...] 존재 양화사(∃)의 사용인데, 예를 들면, "어느 x가 존재한다"라고 읽힐 ∃x가 있다. 이 기호가 고대 철학에 관한 저작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례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물론 그런 표기는 그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고대 사상가들이 이런 양화사의 사용에 해당할 존재에 관한 관념―여기서 "x"에 대해 무엇이든 삽입될 수 있는―을 품고 있었는지 여부에 관한 긴 논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x에서 x에 대해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신, 창조된 실체 또는 창조된 우연한 사건이 모두 동일한 의미로 "현존"하거나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아퀴나스가 어떤 말을 했을지 그냥 상상해 보라. 마찬가지로, 현대 철학의 몇몇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전 사상가들이 바로 그런 전문 용어의 배후에 놓여 있는 개념이나 전제를 결여헀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덮을 수 있다. 또 다시 나는 그것이 결코 보증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나 자신은 "양립론자" 또는 "물리주의자" 같은 술어들을, 예컨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기꺼이 적용한다. 그러나 이런 술어들이 의미하는 바와 그것들이 정말로 적용되는지 여부를 마음 속에 매우 명료하게 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역사적 텍스트가 자체의 전문 용어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규칙 9: 전문 용어를 습득하라를 보라). 술어를 역사의 한 시기에서 다른 한 시기로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런 술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시대 착오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것은 독자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다.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글을 적으면서 번역되지 않은 그리스어를 사용할 때 또는 번역되지 않은 아랍어로 아비센나에 관한 글을 적을 때 나는 싫어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 언어를 읽을 수 없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고지문을 글의 꼭대기에 추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설명되지 않은 여러 가지 전문 용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물론 규칙은 절대적이지 않다. [...] 내가 제안하는 경험 법칙은 이해를 가로막는 불필요한 장벽을 세우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규칙 20: 상황은 항상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


이 마지막 규칙을 위해 나는 명확히 좋은 착상인 "약간의 지리학을 습득하라"와 하나 이상의 문화 또는 하나 이상의 철학 분야(윤리학뿐 아니라 인식론도, 기타 등등)에서 철학을 탐구하도록 권고하기 같은 여러 선택지를 고려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끝맺음을 할 최선의 충고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결정했다. "상황은 항상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규칙은 나의 이른바 "규칙들"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한다. 평범한 옛 역사처럼 철학사도 매우 복잡하며, 관념이 어떻게 그리고 왜 전개되었는지 정말로 이해하고 싶다면 알고 싶은 것 또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한계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 텍스트의 맥락을 탐구하라는 충고와 덜 유명한 저자의 역할을 탐구하라는 충고 등이 앞에서 제시되었다.


그런데 또한 나는 철학 텍스트를 읽고 있는 철학사가의 핵심 활동에 대한 어떤 견해를 품고서 이 마지막 규칙을 제시한다.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많은 철학 독서 그룹에 참여함[...]으로써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훌륭한 철학 텍스트는 그것을 더 오래 그리고 더 자세히 읽을수록 계속해서 통찰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플라톤과 칸트가 저술했을지라도, 같은 페이지를 영원히 계속해서 읽고 또 읽을 수는 결코 없다. 그러나 "좋아, 기본적으로 이 텍스트의 핵심을 파악했어"라고 생각하거나 "이 저자가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며 빨리 나아가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느리게 읽기와 반복하여 읽기가 중요하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살펴보고 있는 텍스트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점을 환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아직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다고 그냥 가정하라. 물론 모든 텍스트가 이런 종류의 면밀한 읽기를 실천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어떤 주어진 텍스트의 경우에도, 철학사 전체와 관련하여, 더 찾아낼 것이 언제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해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