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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존: 오늘의 에세이-"자연/본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인간 본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 We Mean by "Nature"? And What Do We Mean by "Human Nature"?


―― 요한 존(Yohan J. John)


지금까지 나는 항상 '자연'이라는 낱말과 관련된 문제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다수의 서로 비정합적인 관념들을 가리키는 기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인다. 이것 자체는 어느 낱말을 싫어할 이유가 아닌데, 다수의 의미를 갖는 대부분의 낱말들에 대해 거의 아무 문제도 없는 듯 보인다. [확실히 "옳음 대 그름"에서의 "right(옳음)"은 "오른쪽 대 왼쪽"에서의 "right(오른쪽)"과 분리하기 쉽다. 확실히 그것은 왼손잡이와 좌파가 그르며, 심지어 비자연적이라고 비난받게 만드는 의미론적 혼동이 아니다.] "자연성"이라는 개념을 특별히 문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듯 보이는 것은 그것이 특수한 상황이나 행위 과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자연이라는 개념의 다수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최소한 세 가지 의미가 식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들은 이분법에 의거하여 가장 잘 서술될 수 있다. 세 가지 이분법은 다음과 같다.


자연 대 초자연적인 것(Nature versus the Supernatural)

자연 대 양육(Nature versus Nurture)

자연 대 문화(Nature versus Culture)


그것들을 하나씩 검토한 다음에 그것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함의하는 바를 살펴 보자.


1. 존재하는 방식: 자연 대 초자연적인 것


'자연'에 관한 초기 관념들 가운데 하나는 '특질' 또는 '본질'이었다. 어느 사물의 본성은 그것의 길, 그것의 도(道)이다. 궁극적으로 그 낱말 자체는 "태어난"이라는 의미를 갖는 "나투스(natus)"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된다. 14세기 말 이래로 그것은 창조―태어난 모든 것―를 내포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주 및 우주 속 만물과 동의어가 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어머니 대자연이다.


그래서 자연은 과학이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묘하게도, 그것은 그런 이해 자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는 낱말이기도 하다. 어느 사물이나 과정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것을 인과성의 그물에 처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 객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일은 그것의 생성 원천, 그것의 제작 또는 형성 방식, 그리고 상이한 환경에서 그것이 나타내는 다양한 특성을 찾아내는 일을 포함한다. 자연적 과정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를 놀라게 할 그것의 잠재력을 체계적으로 감소시키는 일을 포함하는데, 양자 역학적 '기묘함'도 개연적인 것일지라도 법칙을 따른다.


초자연적 객체와 힘은 우리가 그리는 인과적 지도에 위치시킬 수 없는 것이다. 과학 혁명은, 자연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리고 불가해한 듯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언제나 확대되고 언제나 변화하는 우리의 이론적 틀 속에 편입될 것이라는 믿음에 뿌리박고 있다. 일반적인 믿음에 비하면, 그것은 확실히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도 과학의 특권 때문에, 흔히 부적절한 장소에 배치되는 것은 자연에 관한 이런 관념이다. 이것에 대한 예방 접종을 하기 위해서는 과학 법칙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어느 주어진 맥락에서 성립한다면, 그것을 '따르는' 객체나 과정은 달리 "행"할 수 없다. 자연 법칙은 인간 사회의 법률과 근본적으로 다른데, 법률은 위반할 수 있다. 자연이 인간 법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이 완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률이 부정확하다고 말한다.


2. 이런 식으로 태어난: 자연 대 양육


자연에 관한 두 번째 관념은 첫 번째 관념과 어느 정도 중첩하며, 마찬가지로 오래된 듯 보인다. 십사 세기 이래로 '자연'은 유전적 유산을 내포하였다. 각각의 생물학적 유기체가 명백히 이산적인 탄생 순간에서 비롯된다는 관찰 덕분에 어머니 대자연의 인과적 그물이 두 부분―탄생 이전에 유기체에 작용하는 힘들과 탄생 이후 살아가는 동안 작용하는 힘들―으로 분할될 수 있게 되었다. 유전은 (여전히!) 꽤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탄생 이전의 인과적 힘들―유전체에 결정화되어 있는―은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반면에, 유기체가 살아가는 훨씬 더 긴 시기 동안 발생하는 힘들은 변조―탄생 이전에 이미 구성된 주제에 관한 변주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800년대 말 이래로 어머니 대자연의 원래 악보에 대한 아버지 시간의 재즈 즉흥 연주가 '양육'으로 표기되었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격이 많이 있었지만, 이제 지니가 병 밖에 나왔다. 과학 혁명이 인과적 설명에서 초자연적 관념들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 무형의 정신적 본질이라는 관념에 대한 물질적 대체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한 개념이 함께 생성되었다. 지금까지 유전체에 의해 포착된 함의들은 탄생 이후의 인과적 힘들을 격하시키는 미묘한 결과를 낳았다. 양육은 치열한 경쟁에서태어난 무자비한 다윈주의적 힘들을 덮는 일종의 표면일 뿐이었다.


유전체에 대한 현대의 이해 때문에 이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자연은 양육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양육의 효과는 자연에 의존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기체의 유전자적 유산은 고정된 일단의 특질이라기보다는 가능태 공간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유전자적 특질과 조건은 거의 불가피하지만, 대체적으로 100% 나타나게 될 것으로 보증되는 상위 특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특수한 유전자가 표현되는 방식은 양육과 맥락―삶의 사건과 사고―에 의존한다. 이런 인과적 인자들이 유전체의 잠재적인 가능태들에서 선택할 때 중요하다. 그리고 유전자의 표현은 몸과 뇌를 문자 그대로 함양하고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기체가 양육과 맥락에 반응하는 방식은 이미 현실화된 가능태들에 의존한다.


자연과 양육은 복잡한 되먹임 고리로 얽혀 있는데, 그것들은 과학자들이 드러내기를 거의 시작도 하지 못한 정교한 인과적 태피스트리를 형성한다. 우리가 깨닫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어느 주어진 특질―특히 심리적 또는 인지적 특질―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정신 질환의 또렷한 유전자적 표식을 식별하는 일이 대체로 실망스런 노력이었던 까닭일 것이다. 행동의 층위에서 유사한 것으로 분류하는 조건은 지리적 위치 설정과 흡사할 것인데, 그곳에 이르게 될 길은 흔히 한 가지 이상 존재한다. 자연과 양육 사이의 구별짓기가 완전히 필요 없게 되고, 그래서 그저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가는 도중에 취하는 특수한 길들에 관해 말할 시기일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과학자들은 자연 '대' 양육이라는 그릇된 이분법이 전적으로 필요 없게 될지라도, 윤리와 도덕에 관한 관념들은 계속해서 아버지 시간보다 어머니 대자연―'학습된 것'보다 '타고난 것'―을 높이 평가하는 견지에서 틀지워질 것이다. 과학적 인과성은 탄생 순간에 예리한 선을 긋는 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지 못할지라도, 이런 우선 순위 결정의 배후에 있는 지성적 힘은 흔히 과학에서 차용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다.


3. 무명의 말(馬): 자연 대 문화


작가, 시인 그리고 가수가 자연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할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양자 역학이나 유전체의 찬양가를 노래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상은 인간 문명과 문화 너머의 세계이다. 영어에서 이런 함의는 분명히 과학 혁명이 모멘텀을 얻기 시작하고 있었던 16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위들 가운데 많은 것을 인공적인 것―기술에서 태어난―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물 기술은 '자연적' 범주에 속하는데, 나는 많은 자연 애호가와 환경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꽤 짜증나게 한다고 깨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비버는 자연적으로 댐을 만들고, 인간은 자연적으로 플라스틱을 만든다."


흥미롭게도, '문화'라는 낱말은 경작하다 또는 재배하다를 의미하는 '콜레레(colere)'라는 낱말에서 파생되어 계발과 경작을 의미하는 '쿨투라(cultura)'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문화는 골이 진 도시의 언덕을 의미하기 오래 전에 골이 진 시골의 밭을 의미했다. 농경―아마도 가장 오래된 사회적 발명품―의 농촌은 이제 문화를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는 회색의 경계 영토로 간주된다. 마을 너머 들판이 놓여 있고, 들판 너머 숲, 사막, 야생이 놓여 있다. 우리가 아직 명명하지 않은 장소와 사물들이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작동하는 동일한 과학 법칙이 우주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성립한다고 믿는다. 이런 깨달음이 물리학에서 아이작 뉴턴의 혁명의 본질이었는데, 천상의 물체는 지상의 물체와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 물론 지상의 몇몇 물체들은 더 복잡한데, 우리는 당구공과 행성보다 지질학, 기상학 그리고 생물학을 덜 파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정의상 자연이 무엇이든 인간 조작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연적 코끼리 환경에 관해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연적 인간 환경에 관해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행하는 것은 동물의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우리는 빈번하게 생태계를 파괴하지만 현존하는 생태계를 수정하기도 하고 새로운 생태계를 창출하기도 한다. 때때로 이런 "인공" 생태계가 대체된 생태계보다 더 탄력적이다. 환경주의자와 보존주의자는 흔히 자연이라는 낱말을 인간에 속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이것은 인류를 자연 바깥에 위치시키지만, 그래도 아무튼 인류는 자연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기후 변화는 분명히 지구 전체의 생명에 위협이 되지만, 지구는 과거에 재난들을 겪었다. 화석 기록은 어머니 대자연이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생명 다양성과 생태계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은 매우 인간적인 욕망이다. 많은 사람은 현재 형태의 (비인간) 지구 생명에 대한 심미적 평가와 흡사한 것을 품고 있다.


변화는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인간은 자연 바깥에 있는 동시에 자연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자연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도 아니다. 동물과 식물은 고요한 균형 상태에 놓여 있지 않은데, 외관상 '생명의 순환'은 과장된 충돌, 역동적인 전환 그리고 무조적 기묘함을 특색으로 하는 우주적 프로그레시브 락 앨범에서 나타나는 조화와 리듬의 일시적인 간주곡이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인공적인 침입자라는 관념은 특별히 유용하지 않다. 인과적 그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사실상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이 자연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변화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보존은 무의미하거나 비자연적인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변화에 맞서 싸우는 것도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동물과 식물도 이런 일을 행하는데, 안정된 기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는 기복이 많은 생의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집단은 자연 세계의 일부를 조작하고 보존하며 파괴하고 싶어한다는 점에 있어서 완전히 '자연적'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것을 착수하는 방법에 관해 상이하며, 그리고 그것에 관해 주장하고 투쟁하며 푸념하는 것도 자연적인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라: '인간 본성'이라는 불가사의


이것은 자연(본성)이라는 낱말의 가장 문제적인 용법에 이르게 된다. 이 낱말을 인간 특질과 행태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할 때, '자연'은 정말로 막연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특히 인간이 무엇을 행하는 것이 자연적인 것인지 열렬히 알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폭력은 자연적인 것인가? 종교는 자연적인 것인가? 인간이 동물과 식물에 행하는 바가 자연적인 것인가? 어떤 인간 활동이 비자연적인 것인가?


자연에 관한 여타의 관념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런 유형들의 의문들이 정합적인 것이 되도록 할 수 없다. 문화-로서의-본성은 명백히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비자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역으로, 우주-로서의-본성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자연적인 것이다. 인간이 행하는 어떤 것도 물리학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육체 안팎의 인과적 힘들이 상호연출하는 결과이다. 본성이 바로 우주의 도라면 '비자연적'이라는 낱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어머니 대자연은 소시오패스도 사회 사업가도 낳는다.


유전자적 유산-으로서의-본성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정말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지럽고 고무시키며 심란하게 하는 인간 행태의 스펙트럼은 아무튼 자연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개인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까닭에 관해 실체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유전자나 진화사를 참조할 수 없다. 물론 광범위한 추세는 찾아낼 수 있는데, 인간은 설탕, 소금 그리고 지방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튀긴 초콜릿 스낵바에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인간은 풍경화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추상적 표현주의를 선호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보라. 인간은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 그럼에도 매우 장기적인 시간 동안 대규모의 폭력을 막아낸 개인들과 인간 집단들도 많이 존재한다.


모든 인간이 폭력, 또는 예술, 또는 자선, 또는 어리석음에 대한 능력을 '똑같이'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는 인간 행태의 어떤 양상들이 유전자적 인간 가능태 공간에 속하는지 결정할 방법이 전혀 없을 뿐이다. 인간 보편자를 식별하는 데 필요할 실험은 비윤리적인 것인 동시에 대단히 실행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말해줄 과학자들은 필요 없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미친 짓과 멋진 짓을 관찰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어느 종류의 사람이 상이한 맥락에서는 전적으로 상이한 종류의 것을 행할 수 있었을 것인가? 확실히. 아마도.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사람을 복제하여 제어된 실험을 수행할 수 없다. (또는 최소한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계획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인간의 경우에, '비자연적'이라는 낱말은 흔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고 일반성은 지표 집단으로 간주하기로 선택된 인간 집단에 의존한다. 소규모의 사회적 집단? 민족? 국가? 일단의 WEIRD 아메리카 대학생들? 인류학에의 약간의 노출(또는 인터넷에서 몇 번의 클릭)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과 내가 혐오적인 것이라고 깨닫는 행위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거나, 또는 나머지 사람들이 필수적인 거싱라고 깨닫는 것들을 혐오하는 개인과 집단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신시킬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훌륭한 정당화가 결코 아닌데,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깨닫는 행위도 나쁜 것이라고 깨닫는 행위도 마찬가지로 쉽게 유전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인과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어떤 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양육되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거나 본질적이지도 않고, 덜 중요하거나 본질적이지도 않다.


다시 한 번, '인간 본성'에 관해 특별히 특정한 것을 전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무엇이든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머니 대자연에 관해 확증되는 어떤 사실도 우리가 대자연과 관련하여 행하기로 선택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우리가 행하기로 선택한 것이 가능하고 실행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사실'에서 '당위'로 가는 길은 전혀 없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우주이다. 과학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어느 작은 부분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과학은 우주 또는 지구 또는 인간 사회 또는 개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없다. 진화적 이론을 통해서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당위'("우주는 바이오매스와 생물다양성을 극대화하여야 한다' 또는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생존해야 한다")를 '사실'("생존 투쟁은 사실이다")로 위장함으로써 작동한다. 과학은 지도이고, 그래서 모든 지도와 마찬가지로 과학은 우리에게 가야할 곳을 말해주지 않는다.


이 불은 제어할 수 없다: 문화의 본성


사실-당위 구별짓기는 인간에 관해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실제로 이런저런 당위―목적, 목표, 소명, 탐구, 성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만 독특한 것이 거의 아닌데, 동물도 목표지향적 행태―식량 섭취, 도피하기, 싸우기 그리고 가족 형성―뿐 아니라, 순전히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일단의 목적과 어긋나는 행위도 나타낸다. 동물도 놀이를 한다. 동물도 호기심을 드러낸다. 게다가 동물도 이타주의적 성향을 과시한다. 동물은 이런 문제들을 결정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는 듯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다.


목표지향적 행태가 모든 인간에 공통적인 유일한 것이라면, 인간은 특별하지 않으며, 그리고 인간 본성은 실제로 동물 본성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 사실상 몇 가지 점에서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동물을 매우 애호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종류의 주장에 짜증을 내게 된다. 그들은 유기체들 사이의 유사점들에 관한 항상 증가하는 목록이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인간중심주의를 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기술과 도구 사용을 언급하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도록 막대기를 든 침팬지를 촬영한 영상을 보낼 사람이 언제나 존재한다. 예술을 언급하면, 그림을 그리는 코끼리가 존재한다. 정말로 짜증나게 하는 것은 인간만이 언어를 갖추고 있다는 관념이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인간은 정말로 너무 우둔하여 동물이 우리 몰래 사용하는 무한히 미묘한 언어 체계들을 번역할 수 없다는 점을 내게 확신시키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연구자들이 언어를 드러내거나 최소한 인간 언어를 동물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하면서 수십 년을 보냈다는 사실은 명백히 아무 관련도 없다. 동물이 소통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의 소통 형식을 '언어'라고 부를 이유도 전혀 없는 듯 보인다. 나는 내가 틀린 것으로 판명되기를 바라지만, 연구자들이 언어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할 때 언급하고 있는 대상인 복잡하고, 상징적이고, 추상적이며 그리고 무한히 확장 가능한 표상 체계를 동물이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는 당분간 전혀 없다.


그러나 논증을 위해 동물이 언어 같은 것을 갖추고 있다고 그냥 인정하자. 이것은 인간이 조금 개선된 막대기 사용 기술을 갖춘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유인원일 뿐이라는 점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 왕국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동등한 것이 없는 무언가를 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고상하고 추상적인 것 또는 동물의 경우에 시험하기 어려운 정신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불이다. 인간을 불을 갖고 논다. 인간은 음식을 요리한다. 특정한 개인들은 불을 많이 다루지 않을 것이지만, 인간 집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궁극적으로 근처에 불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불에 매혹된다. 반면에 동물은 불을 무서워한다. 우리 선조들 가운데 한 사람이 춤추는 붉은 꽃에서 도망가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가족 전통을 명백히 깨뜨렸다. 그것을 길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선구자가 밝힌 햇불은 그때부터 후세로 계승되었다. 문화 이야기는 연료―우리의 불, 식욕 그리고 상상―에 대한 탐색이다. 우리는 불 주위에 모여서 먹고 이야기하며 노래할 때 세 가지 모두에 불을 붙인다. 우리는 불이 인간 문화의 본성 속에 있는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역사는 벙어리 왕의 입에 갖혀 있던 불이 떠나도록 조작될 때 개시된다. 불은 세계를 가로지르는 길을 태우고,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길을 좇을 뿐이다. 언어도 불일 것이다. 불과 언어 둘 다 인간 문화의 특징이지만, 그것들은 그 어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도 유전체에 결코 위치하고 있지 않다. 다른 인간들로부터 격리된 아이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 것이고, 불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불과 언어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된다. 개인의 '본성'은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해서 여전히 불분명할 것이지만, 인간 문화의 본성은 불 신화에 잠재된 두 가지 충동―우리가 무심코 놓아버린 불의 길을 좇는 것과 언어라는 불에 의해 조명된 동굴 벽 위의 그 길을 서술하고 논쟁하며 기록하는 것에 놓여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