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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자유주의와 정체성 정치

 

자유주의와 정체성 정치

Liberalism and Identity Politic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 [마리카 로즈(Marika Rose)]가 정체성 정치에 대한 좌파의 비판과 관련된 몇몇 난점들에 관한 흥미로운 블로그 글을 올렸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때때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은 계급이 우선하고 여타의 것은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지루한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일 뿐이다(대개 유색인, 여성, 동성애자 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멸과 결합된). 그리고 때때로 그런 비판은 현존하는 질서 내에 광범위한 정체성들의 포함을 요구하는 자유주의적 정치(그래서 결혼 제도는 괜찮은데, 동성 부부에 확대될 필요가 있을 뿐이고, 자유 민주주의는 괜찮은데, 여성이나 흑인에게 확대될 필요가 있을 뿐이다)와 현존하는 질서로부터 특수한 정체성들의 배제가 현존하는 질서가 전적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전복될 필요가 있는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급진주의적 정치를 구분짓는 시도이다.

 

자유주의적 정치와 급진주의적 정치 사이의 차이에 관한 그의 마지막 문장의 요점에 대해 부연하면, 자유주의 정치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거의 전적으로 상징계와 행위자의 층위에서 전개된다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적 정치는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쟁점들을 믿음정서 문제의 층위에서 압도적으로 이해한다. 자유주의자는, 문제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고 인종차별주의자와 관련된 문제는 그들이 우연히 그들의 증오 대상이 되어 버린 어느 집단에 대한 표상을 착각했다는 점이다. 이런 전제에 의거하는 자유주의적 제안은 이런 그릇된 표상을 교정하고 이런 믿음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시키는 법률을 발제하는 일종의 믿음의 교육법이다. 그 생각은 인지행동 요법이나 어떤 판본의 스토아주의 같은 것과 유사하다. 그 생각은 정서나 정동이 믿음이나 상징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믿음을 교정하면 이런 슬픈 정념이나 정동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종차별주의 같은 쟁점들의 중요한 차원이 특성상 상징적이고 정동적이라는 것은 참이다. 여기에는 아무 의심도 없다. 문제는, 인종차별주의적인 것(개체적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특권)은 그저 행위자나 집합체가 아니라, 물질적 환경 자체가 인종차별주의적이라는 것이다. 하부구조와 자연 세계 자체가 인종차별주의적이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수행적 조립체 이론에 대한 언급(Notes Toward a Performative Theory of Assembly)>>라는 최근의 저작에서 제시된 주변화된 집단들의 불안정성에 대한 차별적 노출이라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테제 또는 <<육체적 자연들(Bodily Natures)>> 같은 저작에서 제시된 초육체성(trans-corporeality)라는 스테이시 알레이모(Stacy Alaimo)의 개념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유독한 것은 물질적 환경 자체이다. 물질적 환경은 육체를 직접 겨냥하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 행위 그리고 정동의 가능성을 부여하거나 제약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오염된 물이 육체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미시간 주 플린트 시에서 볼수 있다. 이 도시의 인구는 일방적으로 가난하며 취약한 소수자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상 소수자 자체가 일종의 초취약성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이런 물질적 환경의 생산에 기여한 것은 인종차별주의적 정책과 믿음(또 다시 상징적인 것)이지만, 믿음과 정책만을 겨냥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물질적 환경 자체를 해결하는 것도 인종차별주의 같은 것에 맞서는 싸움에 있어서 하나의 전선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유주의와 관련된 문제가 놓여 있다. 자유주의는 너무나 흔히 사람들이 거주하는 물질적 차원은 무시한 채 오로지 상징계의 층위, 믿음과 정책의 층위에 머무른다. 그것은 추상화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런 추상화의 배후 이유를 살펴볼 필요는 없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문화 정치 사이의 조화라는 환상을 향유하는데, 그것은 하부구조, 기술, 노동 그리고 자본주의의 억제할 수 없는 자본 추구에 있어서 자연적 환경 파괴의 층위에서 불평등과 억압이 물질적 세계 자체의 바로 그 얼개 속에 구축되는 방식을 무시한 채, 억압받는 사람들과 불평등한 사람들의 모든 투쟁을 순전히 추상적인 권리와 평등의 층위에서 판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문화적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자본 추구를 어쨌든 방해하지 않은 채 순전히 상징계의 층위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코츠코가 언급하는 급진주의적 정치는 이 모든 투쟁을 인류세에 자본주의 치하의 포괄적인 삶의 지평의 증상으로 간주한다. 절대적인 해방은 단지 상징적인 것일 수가 없고, 그저 타자을 인정하고 관용하기의 문제일 수가 없으며, 그저 추상적인 권리를 소유하기의 문제일 수가 없다. 또한 절대적인 해방은 물질적 해방과 더불어 유독하지 않은 육화된 세계에서 살아갈 기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