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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데이비스: 인류세의 탄생-다섯 가지 격률

 

다섯 가지 격률

Five Maxims

 

―― 제레미 데이비스(Jeremy Davies)

 

첫번째 격률. 인류세 시대는 신파국론(neocatastrophism)적 개념이다. 옥스퍼드 사전이 서술하듯이, 신파국론적 테제는 '지금까지 지질학적 특징들과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진화 및 소멸이 주로 느린 연속적 과정들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따금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강력한 자연적 사건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합중국 워싱턴 주의 화산용암 지대(Channeled Scablands)가 거대한 홍수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인식―불안하게도 노아의 홍수를 회상시켰기 때문에 지속적인 저항에 부딪힌 관념―은 육상 공룡들이 지구 밖 충격에 의해 무화되었다(화산 활동도 그들의 죽음에 어떤 역할을 수행했지만)는 이론처럼 지구과학에 있어서 신파국론적 전환의 원형이다.

 

대략 1980년대 이래로 신파국론은 지구과학 연구의 뉴노멀이 되었다. 예전에는 지구가 안정적으로 느리게 진화한다고 간주되었던 반면에, 이제는 지구가 비교적 잘 규정된 지질생물화학적 사태들 사이에 간헐적인, 비교적 급격한 전환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안정한 되먹임 고리들로 특징지워진다고 간주된다. 그런 신파국론적 패러다임은 인류세라는 관념에 대한 필수적인 기초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어느 획기적인 상태 변화가 불과 지난 몇 세기 동안 일어났었을 수 있으며, 그리고 대체로 오로지 단일 종 사이에 생활 방식의 변화들에 의해 촉발되었을 수 있다는 관념을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류세라는 관념은 지구 체계 전체의 빠른 재구성을 가끔씩 촉발할 수 있는 사물들의 목록(불덩이 유성, 판 구조론 등)에 다른 한 아이템을 추가한다.

 

두번째 격률. 인간들의 특수한 특성들이 인류세의 궁극적 원인 또는 기원인 것은 아니다. 인류세는 "인간들의 지구를 제어하는 시대"가 아니다. 인류세 시대의 가설적 종말이 인간들이 지구 체계에 "영향을 미치기" 또는 그것을 "지배하기" 또는 그것을 "책임지기"를 그만두는 시기와 동일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에 지질학적 시간 척도의 간격들은 순전한 차이의 원칙에 의거하여 규정되는데, 현생누대가 원생누대와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지구 체계의 인류세 상태는 지구 체계의 충적세 상태와 상이한 것이다. 당분간, 겨우 시작한 이 인류세의 생태적 배치들은 일부 인간 행위자들에 의해 처리된 생물물리학적 세계에 대한 영향의 증대를 포함한다. 그러나 단순한 이름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자. 인류세는 결단코 인간들이 자연에 대립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다.

 

세번째 격률. "인류"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사회들을 인류세 시대의 출현에 작동하고 있는 두드러진 세계 형성의 힘으로 간주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류세가 이원론적 개념이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이 모두 함께 그것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보편주의적 개념도 아니다. 생태적 변환들은 비교적 이산적이고 구조적으로 적대적인 인간 집단들 사이의 관계들―모든 종류의 계급 관계, 무역 관계, 법률 관계, 권력 관계―에 의해 초래된다. 그리고 인간 사회들은 순수한 의지와 지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자들과 비인간 행위자들의 다발들로 만들어진다. 한 사회는 인간들, 개들, 헤이즐넛들, 바늘들, 대사암들, 사슴들, 갈대 다발들의 묶음이다. 다른 한 사회는 마이크로프로세서들, 용광로들, 인간들, 인들, 고무, 옥수수 그리고 전파들을 다발로 묶는다. 그런 인간 이상의 사회적 힘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진화를 특징짓는다. 인류세는 생물지질학적 힘들의 새로운 배치―그것이 대체하는 시대와 비교하여 새로운―이며, 그리고 불가피하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들도 재배치되는 관계들에 속한다.

 

네번째 격률. 실제적으로 관심 있는 유일한 진짜 문제는 인류세 시대 일반이 아니라 인류세로의 전환 시기이다. 우리는 인류세를 미래로 무한정 멀리 지속되는 것으로 가정할 수도 있는데, 예컨대, 십만 년 동안, 또는 어쨌든 너무 오래 지속되어 어느 누구도 나중 단계들에서 일어날 일에 관해 합당하게 걱정할 수 없다.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인류세"라기보다는 인류세의 탄생, 즉 한 지질학적 시대에서 그 다음 지질학적 시대 사이의 파괴적인 변화 시기이다. 나는 지질학자들이 다른 지질학적 기간들의 말에 식별하는 "페름기 종말 사건" 등과 유사하게 "충적세 종말 사건"으로 지칭했다. 그런 전환 사건은 15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최소한 다음 일곱 세대 동안 계속된다(즉, 아메리카 원주민 사상가 또는 사상가들에 일반적으로 귀속되는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도덕 공동체의 삶 전체를 통해서)고 가정할 수 있다. 어느 지질학적 시대의 탄생을 목격하는 것은 지질 시대의 전 과정에 대한 공평한 관람석 관점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지질학적 역사의 한 특정한 순간에 깊이 얽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 정치는 "지속 가능한 인류세"를 만들겠다는 불가능하게도 거대한 꿈이 아니라, 향후 수 년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 과정을 개선하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여해야 한다.

 

다섯번째 격률. 인류세라는 관념이 한 편의 엉뚱한 지질학적 사태 이상의 것이 되는 까닭은 심원한 지질 시간이 하나의 정치적 인자로 공표되었기 때문이다. 증거는 지난 주에 내가 언급한 것처럼 신문 헤드라인에서 발견된다. "기후 변화 때문에 지구는 115,000년 동안 가장 더운 상태에 이르렀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질학적 시대에 걸쳐서 전개된 진화적 힘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지금까지 언제나 인간 사회들은 심원한 시간과 연관되어 존재했다. 그런데 최근에 인간 사회들은 어쩔 수 없이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심원한 시간에 뛰어들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일상적인 정치적 논의의 문제들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방대한 시간 규모와 관련짓지 않는다면 파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녹색 정치가 인류세의 탄생을 구성하는 지질 시간을 직면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