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제임스 윌리엄스: 오늘의 에세이-과정 존재론들

 

과정 존재론들

Process ontologies

 

―― 제임스 윌리엄스(James Williams)

 

과정 존재론들은 생성에 대한 존재의 우위성, 변화에 대한 변함없는 실체의 우위성을 부인한다. 그것들은, 실재는 정적인 현존이 아니라 오히려 과정이고 실체는 사건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과정 존재론들은 고립된 개별자들의 실재적 현존을 부인하고 그것들을 과정들의 다양체들로 대체한다. 그러므로 정적인 존재자들은 역동적인 사건들과 변환들에 부과된 환영들로 재규정된다. 예를 들면, 과정 존재론들의 경우에, 시간에 따라 안정된 동일체로서 규정되는 실체는 사실상 많은 변환들의 합체로 규정되는 사건이다.

 

현존이 이것이 저것을 지배하는 상이한 영역들로 분할되는 초월성의 철학들과는 대조적으로, 과정 존재론들은 모든 사건들이 동일한 영역을 공유하는 내재성이라는 관념을 선호한다. 과정 존재론의 경우에, 실재적 과정들은 모두 동일한 복잡한 평면에서 서로 상호작용하고, 그래서 그런 평면으로부터의 독립성이나 그것에 대한 특별한 지배력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자나 과정은 전혀 없다. 관념론을 관념들의 독립적인 권역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된다면, 과정 존재론은 관념론적 존재론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존재론이다. 이것은 관념들을 부인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념들이 추상적 존재자라기보다는 과정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정 존재론에서 내재성은 균일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과정 존재론들은 다원론이지만, 수많은 이산적인 개별자들 또는 범주들 또는 계급들 또는 본질들을 통한 다원론은 아니다. 그 대신에 과정 존재론은 차이 다원론, 즉 많은 연결된 생성 과정들 사이에 변화하는 정도들 또는 강도들의 다원론이다. 예를 들면, 상이한 느낌의 강도들은 화이트헤드로 하여금 사건들을 별개의 실체들로 간주하지 않은 채 서로 구별지을 수 있게 한다. 본질들, 실체들 그리고 종들에 따라 분배된, 많은 독립적인 사물들에 의해 구성된 실재 대신에 과정 존재론은 범주들 사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상호연결된 과정들의 실재를 서술한다.

 

철학의 역사에서 과정 실재론들은 비주류 노선인데, 여기서 주류 노선은 유동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된 자기동일성의 실체들에 대한 탐색으로 대표된다. 실체 노선의 원형적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최근의 과정 철학자는 화이트헤드이다. 다음의 짝을 이룬 사상가들에서 첫 번째 인물은 상이한 종류들의 과정 철학을 대표하고, 두 번째 인물은 상이한 종류들의 실체 및 동일성 철학을 대표한다. 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 라이프니츠-데카르트. 흄-칸트. 베르그손-러셀. 들뢰즈-콰인.

 

이 노선들 사이의 차이점들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인데, 판단, 특성 그리고 행위에 대한 토대로서 어떤 종류의 지속적인 실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거한다. 화이트헤드는 이 주장을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정들이 사실상 변화에 대한 올바른 설명일 때 인과적 유효성을 실체에 잘못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들이 원자들과 같은 개별적 존재자들의 현존 아니면 창발 같은 과정들의 현존을 확증하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에 따라 대립이 전개된다. 예를 들면, 존 뒤프레(John Dupre)의 생물학의 과정 철학은 실체, 종 또는 개체의 고정된 동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미생물학적 층위에 있어서 안정화와 불안정화의 생물학적 과정들에 집중한다.

 

아메리카 실용주의도 과정 존재론들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고, 그래서 지금까지 퍼스(Peirce), 듀이(Dewey) 그리고 제임스(James)는 베르그손과 같은 더 친숙한 과정 사상가들과 연관되었다. 베르그손은 다양체와 지속이라는 개념들을 과정 존재론에 도입했다. 다양체는 정성적 다원론에 대한 규정인데, 사물들은 셀 수 있는 양들 사이의 차이(일, 이)가 아니라 오히려 강도의 차이(더, 덜) 때문에 다양체이다. 지속은 이산적인 연장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적인 다양체로서의 시간에 대한 규정이다. 시간이 부분들로 분할될 때 그것은 연속적인 지속으로 간주될 때와 더 이상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과정 존재론들에서는 존재자들과 과정의 대립 및 연속적인 다양체들과 이산적인 부분들의 대립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

 

인간주의(humanism)의 많은 판본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운동은 어느 공통의 관념, 본질, 운명, 목적, 성찰적 자의식 또는 형태를 공유하는 안정된 유한한 인간 개체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주의는 과정 존재론적 원리들에서 연역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을 판별하는 데 요구되는 공통성이 상호연결된 변환들의 복잡한 사회들을 가로지르는 생성의 변화하는 가변적인 다양체들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정 존재론들은 탈인간적인 것에 대한 관념들에 중요하다. 예를 들면, 탈인간적인 것에 대한 연구를 위해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들뢰즈와 가타리로부터 "조립체" 같은 과정 개념들을 전개하며, 그리고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는 화이트헤드, 들뢰즈와 가타리를 좇아서 탈인간주의적 구성주의를 전개한다.

 

인간주의들에서는, 인류의 특별한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식물, 또는 인간과 생기 없는 기술 사이의 경계들이 서술된다. 과정 존재론들은 이런 경계들을 폐기하고 인간-동물 조립체와 인간-기술 조립체를 구성하는 공동 사건들을 강조한다. 인간과 동물을 가로지르는 상이한 강도들의 과정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함께 작동하여 어떤 배타적인 인간주의도 향유될 수 없다. 예를 들면,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호혜적 복잡성의 층위들에서 서로를 함께 형성하는 종들의 매듭'으로 서술한다.

 

과정 존재론들의 경우에 안정성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안정된 인간의 생이라는 관념은 상호관련된 과정들에 관한 견해와 정합적이지 않다. 죽음과 인간의 특별성에 관한 실존주의적 관념들에 중요한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관념은 개별적인 인간의 생, 육체 또는 정신의 한계를 넘어 확대되는 많은 과정들로 대체된다. 많은 생과 과정들은 각각의 인간의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데, 인간 생에 대한 고유한 한계에 관한 이론들을 논박하는 방식들로 확대된다. 주디스 존스(Judith A. Jones)는 이런 화이트헤드적 생명관을 강도에 연결에 의거하여 서술한다. '진동하는 강도들의 창조적 우주는 항상 변화하는 일단의 세계들에서 느껴지는 연결성과 그런 세계들이 하나로 형성되어 영구적인 다자들의 일부가 되는 잠재적인 대조들의 영구적인 다양체이다.'

 

과정 존재론들의 경우에 '탈인간'은 인간적 가치들의 폐기나 윤리학을 위한 인간 육체와 정신에 대한 집중의 폐기를 반드시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느낌 또는 베르그손에 있어서 직관 같은 개념들은 외부를 향해 확대되는 과정들로서의 인간 육체나 의식에 대한 주의 집중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것들의 본질적인 우위성 또는 독립성을 주장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다. 과정 존재론들은 몇몇 종류들의 인간주의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매우 가까울 수 있는데, 여기서 긍정적인 가치들은 현실적 인간들이 세계로 확대됨에 따라 그들에 의해 현시되는 몇몇 성질들과 관련된다. 확대에 관한 이런 관념 덕분에 과정 존재론은 마음의 철학에 있어서 클락(Clark), 바렐라(Varela) 그리고 톰슨(Thompson)에 다양하게 의존하는 이론들에 가까이 접근하게 되어 마음을 확대된, 배태된, 체화된 그리고 발제된 것으로 서술한다.

 

위대한 시인, 참여하는 정치 활동가, 인류에 대한 헌신적인 개혁가 및 탐구자의 인간주의는 과정 존재론에서 차단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한 과정 존재론은 통상적으로 규정된 표상적인 추상적 인간이 경계가 있는 배타적인 가치들에 대한 일반적인 토대가 되는 강한 인간주의에 대한 환영적 근거를 제거할 것이다. 과정 존재론은 실용적인 인간중심주의을 낳을 수 있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항상 관념론적 인간주의에 대립적일 것이고 동물, 식물 그리고 기술과 공유하는 과정들에 민감할 것이다.

 

과정 존재론에 관해 성찰할 때, 아메리카 실용주의와 과정 철학을 결합시키는 니콜라스 레셔(Nicholas Rescher)는 강한 인간주의의 근거가 제거되는 까닭을 설명한다. '과정지향적 접근 방식에 의거하면 자기 또는 자아는 ... 거대 과정(megaprocess)―과정들의 조직된 체계, 응집적이고 (비교적) 안정된 행위 주체성의 중심―일 뿐이다.' 레셔의 존재론에서는 확대된 과정들이 옹호됨으로써 독립적인 존재자들로서의 개별적인 인간의 의식, 영혼, 정체성, 마음과 몸이 사라지게 된다.

 

단순한 관찰들은 우리로 하여금 과정 존재론들에 있어서 상대적 안정성의 정도와 가변성을 거대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산소로 여러분을 유지시키지만 유해한 오염 물질들도 도입하는 공기, 여러분이 마시는 걸러진 많은 물, 여러분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주위 온도,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제조된 의복,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언설에 의해 발달된 여러분이 사용하는 언어, 여러분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장 내의 미생물들, 유리, 실리콘, 실, 경영, 분배, 약품 그리고 보철의 기술들을 생각하자. 이것들은 모두 몸, 마음, 성격 그리고 영혼의 환영적인 인간적 경계들을 확대하는 비교적 안정된 거대 과정의 필수적인 양태들이다. 그런 비인간 과정들이 접근하여 여러분 속에 용해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비인간적인 것들의 다양체 속에 용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