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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히크먼: 오늘의 에세이-민주주의의 종말: 무지와 어리석음의 치세?

 

민주주의의 종말: 무지와 어리석음의 치세?

The End of Democracy: The Reign of Ignorance and Stupidity?

 

―― 스티븐 히크먼(S. C. Hickman)

 

오래 전에 아테네 시민에게 불러 일으킨 증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분석은 <<변명>> 전체에 걸쳐 그가 생각하고 있는 더 큰 주제의 일부분이다. 아테네는 다수가 지배적인 정치 권력인 민주주의적 도시 국가이고, 그래서 다수의 모든 악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예상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쟁 중에 시험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자신에게 의문을 유발하는 사람들에 대항하는 어떤 종류의 행위를 취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그의 도시 국가와 그것의 정치에 대해 제기하는 유일한 비난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민주주의적 청중에게 자신이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서 있었어야 옳았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좋은 사람은 살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멜레토스에 대한 엄격한 추궁에서 소크라테스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젊은이들을 개선시키는 데 필요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고, 그래서 다수는 불가피하게도 서툴게 행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불법 행위들에 대해 민회를 비판하고 정의의 문제가 감정적 탄원에 의해 쉽게 왜곡되는 점에 대해 아테네 법정을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의 바로 그 본성이 민주주의를 타락한 정치적 체계로 만든다고 암시한다. 씁쓸한 경험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긴급한 인간적 의문들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거대한 권력이 주어질 때 그들의 천박성은 불가피하게도 부정을 초래한다.

 

최근에 <시리자, 좌파 그리고 국민 국가의 장기적이고 느린 고통스러운 죽음(SYRIZA, the Left and the long, slow, painful death of the nation state)>라는 글에 관해 제후(Jehu)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EU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에 있어서 사람들이 놓치는 것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관료 지배 체제와 결합된 금융 자본주의가 전통적인 도식을 뒤집어 버렸고, 그래서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로부터 분리된 전체주의적인 금융 지배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국민 국가라기보다는 기업이다. 그것은 국가와 기업 권력의 결탁이라는 오래된 의미에서의 파시즘도 아닌데, 왜냐하면 EU는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세계에서 정치는 아무 권력도 없고, 파산했으며, 금권 정치 체제라는 사실에 대한 통제와 완충의 조정 체계가 되어 버렸을 뿐이다. 군사적 및 민간적 치안 체계들이 인민 자체가 아니라 부호 계급의 이해 관계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한에 있어서만 국가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당분간 국가가 금권 정치 체제를 보호하는 군사적 체제의 일부로 지속될 것이라고 본다. 정치가들은 법률 작업가라기보다는 극작가, 매체 명사들이다. 우리 시대에 금권 정치 체제들은 영구적인 '긴급 상태'를 부과함으로써 민주주의적 문명의 마지막 위선을 궁극적으로 제거할 수 있도록 남부로부터의 방대한 이주민 또는 피난민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적 체계들의 강도 높은 거대한 파편화를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비변증법적인 민주주의적 체제들의 분석가들도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민주주의 자체라는 진실을 직면하기보다는 외부적 위협들을 겨냥할 뿐이다. 우리는 이천 년 전에 그리스인들이 경한 그런 단계로 민주주의가 진입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지난 백 년 동안의 우리 문학과 회화를 연구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상황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여전히 나는 예술은 우리가 듣고 싶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 우리 강단인들의 대부분은 주위 사정을 모르고 우파(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든 간에?)를 유일한 적으로 삼는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문화에 묶여 있는 백치들이다. 자신의 구속복을 벗고서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둘러 보는 대신에 그들은 단지 대중 매체의 효과가 그들의 무기고에 부가된 채로 계속해서 19세기에 머물고 있다.

 

나는 정치적으로 닉 랜드(Nick Land)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처럼 우리 시대를 형성하고 있는 체계를 우리 자신의 비인간적 핵심의 연장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자율적이고, 지능적이며, 정치 및 민주주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 몇 가지 점에서 그것은 조작적 폐쇄성과 소통의 소통이라는 니클라스 루만(Nicklas Luhmann)의 관념에 더 가깝다. 그 어떤 인간의 명령과 제어 구조도 벗어나서 작동하는 자기발생적이고 자기생산적인 체계들의 한 변양태. 기술은 어떤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인데, 우리의 창조물, 우리 자신의 비인간적 핵심의 연장이다. 우리는 기억, 지능 그리고 우리의 물리적 및 육체적 삶을 외부화했고, 그래서 인간적인 것은 자체의 비인간적 성분들 사이에 분산되고 파편화되고 있다. 우리는 돌연 변이의 순간에 살고 있다.

 

인공/자연 구별짓기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결코 자연적이지 않았고, 지금까지 우리는 항상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간에 자연적인 것들에 맞서는 방어 체계들을 구축했다. 문명 자체는 행성 지구 위에 출현하는 가장 인공적인 구성물인데, 시간적으로 불멸하는 문화적 복합체의 자기 영속성을 통해서 현존의 엔트로피를 부수는 인간 보안 체계이다. 최초의 인간들이 곡물을 경작하기 위해 해와 달을 분할한 이래로 우리는 순환적 및 선형적 무시간의 인공 시간 속에서 살았다. 우리는 수천 년에 걸친 주체화의 기계 체계들의 산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분할자로 부른 것은 디지털 인간의 생산, 즉 인간들의 정보권으로의 이주일 뿐이다. 우리의 가치는 선택되고, 분석되고, 걸러지고, 분류되며, 24/7 정보권을 가로질러 매 순간마다 새로운 분할성 형식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다양한 통계적 및 확률론적 체계들로 분할되는 데이터 조각들로 추적된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잠자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분할된 자아는 우리의 동의를 받거나 아무 동의도 없이 거래를 수행하는 데이터 세계의 전자 회랑를 배회한다. 우리는 우리의 디지털 삶에 대한 아무 통제권도 없다.

 

매 세대마다 기술이 더욱더 편재화되고, 지능이 우리 감각계의 모든 양상으로 이주하며, 우리 삶이 더욱더 외부화되고 통제되고 추적되며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선취됨에 따라 우리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우리의 두려움, 정보권으로부터의 단절 또는 물러서 있음과 개체성에 대한 우리의 물리적 의존성을 망각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꿈꾸지 못한 임플란트, 나노기술 그리고 생명기술을 통해서 이런 세계적 체계와 하나가 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삶은 이런 외부 지능 체계들에 전적으로 의존할 정도로 기계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 시기에 자연적 또는 비자연적 교란이 세계 연결망을 파괴하게 된다면 인간들은 스스로를 망각해 버릴 것이다. 외부 기억 장치와 지능 체계들이 없다면 그들은 길을 잃을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마음을 상실하고 있다... 레이몬드 룰(Raymond Llull) 등이 여러 해를 보내며 지능과 기억을 내부화하는 데 있어서 여러 해에 걸쳐 개발한 것이 우리 세대에서는 분해되고 외부화된다.

 

장막 뒤에 어떤 은밀한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음모론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어떤 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체계는 비개인적이고 우리 자신의 기술적 존재의 연장이다. 우리는 우리 기술인데,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스티글레르(Stiegler)에 동의한다. 경제와 제어의 복잡계들의 전지구적 그물코는 그것을 어떤 비판적 장치로 환원시킬 수 있는 우리 능력을 훌쩍 능가한다. 정치는 죽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오래 동안 스스로를 회로 속에 가둬 버린, 비판적 장치가 아닌 무언가를 구성해 버렸다.

 

이제 현대 국가는 아이들로 하여금 정치의 연출이 여전히 실재적이라고 믿으면서 계속해서 잠들게 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광고 회사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는 실재하지 않고... 세계는 회색 군주들도 믿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장소이다. 사실상 나는 어떤 실재적 출구도 보지 못하는데, 우리가 너무 오래 동안 꾸며낸 어두운 행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슬프지만 참이다. 책임을 질 시기이다...

 

소비 사회는 끊임없는 노후화의 과정으로서의 욕망을 포획하는 데 근거를 두었는데, 그 과정은 미래 없는 세계, 즉 가능한 소멸의 엔드 게임 주변을 공전하는 체계에 인간들을 묶어버리는 환영적인 반실재론적 실천들의 영원한 그리드를 생산한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가 진술하듯이, "오늘날 이런 리비도의 이용은 리비도를 파괴함으로써 끝났으며, 이런 주요한 사실은 산업 문명에 대한 거대한 위협을 구성하는데, 그것은 불가피하게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례 없는 전지구적 경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벨기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파괴된 소통의 세계, 불신, 증오 그리고 분리를 바라보면서,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정치, 금융의 백치적 행위와 어리석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헨리 A. 지루(Henry A. Giroux)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전지구적 문명은 광기로 전락하고 있다. 현재 그것이 말하는 이야기들은 잔인함, 사기, 거짓말 그리고 합법적인 모든 방식의 부패와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주류 매체는 대체로 인종차별주의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책임한 이야기들―권력을 찬양하고 희생자들을 악마화하는 이야기들―을 조작하는데, 언제나 그것들의 교육적 영향을 오락이라는 번들번들한 베니어판 아래 감춘다. 이제 폭력이 관계를 매개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순간적인 쾌락을 제공하기 위한 지속적인 가치를 갖는 유일한 통화를 제공한다. 약탈적 문화는 타자에 대한 관심―또는 공감과 책임감―의 거의 소시오패스적인 결여를 방사하는 자기도취적인 초개인주의를 찬양한다. 화면 문화와 청각 문화를 지배하는 반(反)공공 지식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 소비하고, 더 몰입하며, 개인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미덕을 형성하도록 촉구하면서 탈정치적인 소비주의 문화를 산출한다.

 

내가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사람들을 깨우고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행할 필요가 있다고 아직도 믿고 있는 생물체라면, 나는 윌리엄 S. 버로스(William S. Burroughs)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거의 동조하는 셈일 것이다. "이것 너머 바라볼 때는 경찰이 횡포를 부리는 방사성 행성을 찾아낸다." 문제는 우리가 우주에서 어디를 가든지 바로 그 문제를 갖고 가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아니겠는가? 문제로부터 도주하기보다는 문제를 고칠 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