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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프랭크: 오늘의 에세이-아인슈타인은 틀렸는가?

 

아인슈타인은 틀렸는가?

Was Einstein Wrong?

 

―― 애덤 프랭크(Adam Frank)

 

중력파의 직접적인 탐지에 관한 지난 주의 발표는 다시 한 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전망의 지속적인 힘을 입증했다. 또 다시, 이 이론이 세계의 거동을 정확히 예측했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은 옳았다.

 

그런데 지난 주의 승리와 더불어 한 가지 심원하고 매혹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과학과 관련하여 옳으면서도 우리 인간들이 그 과학을 위치시키는 더 넓은 맥락과 관련하여 틀릴 수 있는가?

 

설명해 보겠다.

 

물리학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노력할 가치가 있다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GPS에서 3D 프린터까지 물리학은 많은 멋진 기술을 낳는 과목이다. 그리고 수세식 화장실에서 상승하는 구름까지 물리학은 주변 세계에 관한 많은 것도 설명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물리학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물리학은 우리의 일상 경험의 이면에너머에 그리고 아래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급진적인 새로운 시각들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물리학은 그냥 지식을 넘어서는 듯 보이는데, 그것은 대문자 진리인 듯 보인다.

 

그런데 과학이 우리 경험의 위험한 가장자리에 이를 때, 과학이 세계를 서술할 수 있는 우리 능력의 경계에 이를 때 수반되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는가? 강력한 추상적 수학 및 독창적인 장치 사용과 더불어, 물리학자들이 우주에 관한 가장 거대한 주장들을 제시할 때 특수한 주의을 요구하는, "그저 사실들"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수학과 데이터가 뒷받침하는 것을 넘어서는 철학―형이상학―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런 배경 형이상학이 존재한다면, 실험과 데이터의 견지에서 이론 자체는 옳더라도 그것이 틀릴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이 지금까지 내가 읽고 있는 히메나 카날레스(Jimena Canales)의 <<물리학자와 철학자(The Physicist and the Philosophy)>>라는 매혹적인 책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것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소개할 필요가 없는)과 앙리 베르그손(아마도 소개할 필요가 있는)에 관한 이야기이다.

 

20세기의 처음 20년 동안에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이 아인슈타인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중이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베르그손의 이름은 알지 못하는 까닭이, 카날레스가 보기에, 자체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과학이 어떻게 모든 것에 관해서, 시간처럼 미묘하고, 종잡을 수 없으며, 포착하기 힘든 주제에 관해서도 최종적인 말이 되어 버린 듯 보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모두 아인슈타인과 베르그손이 예정되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중대한 논쟁을 벌이게 된 1922년에 시작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파리에서 개최될 상대성 이론에 관한 초청 강연을 요청받았었다.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중요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베르그손의 철학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시간의 의미에 관한 그들의 상충되는 견해 때문에 그 학자들은 충돌하게 되었다.

 

그 논쟁에서 베르그손은 그가 아인슈타인 이론의 수학적 논리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이터와 관련하여 어떤 의문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베르그손의 경우에, 상대성은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층위에서 시간을 다루는 이론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그는 상대성은 시계와 그것의 거동에 관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베르그손은 아인슈타인이 그런 구별짓기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환기시켰다.

 

베르그손의 철학에는 그냥 측정보다 더 큰 무언가가 시간에 존재했다. 시간은 인간의 경험에 매우 중요하여 시간을 전적으로 해독하는 것은 시계 또는 심지어 "심리적" 지각들에 관한 단순한 설명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그 대신에 시간은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기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시간은 인간 및 존재 자체의 본질이었다. 베르그손의 경우에, 그것은 순전히 과학적인 설명이 시간의 의미 또는 중요성을 망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바로 그 날 파리에서, 베르그손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이론을 둘러싸고 생성되었었던 철학을 공격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것이 과학의 일부로 통용되고 있는 점을 공격하고 있었다. 베르그손이 이의를 제기했던 것은 이론의 감춰진 형이상학이었다. 베르그손은 아인슈타인에게 시간의 완전한 의미를 해독하는 유일한 적절한 방법은 명시적인 철학적 탐구를 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베르그손의 이의 제기에 대응하여 물리학자는 이제 유명해진 수류탄을 던졌는데, "철학자들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청중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형이상학은 무엇인가? 추측할 수 있듯이, 그 의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모든 책들로 도서관 하나를 채울 수 있을 것이지만, 한 가지 유력한 사례를 살펴 보자. 상대성에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별개의 존재자들이 아니다. 그 대신에 그것들은 시공간으로 불리는 4차원적 전체로 대체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바꾸면 매우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시공간과 관련하여 두드러진 것은 그것이 여태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향후 일어날 모든 사건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우주에 대한 이 거대한 4차원 시공간 표상에서는 칼에 찔리게 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고 1969년 월드 시리즈를 제패하는 메츠가 있다. 그런데 다음 주 화요일 회의에서 당신이 바지에 쏟게 될 커피도 있다. 2017년 1월에 신임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순간도 있다. 사실상 여러분에게 일어날 모든 것―여러분의 죽음을 포함하여―이 이미 현존하고 있는 사건들의 연결된 줄처럼 시공간을 따라 배열되어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여러분의 세계선(world line)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로 시간이 작동하는 방식인가? 모든 사건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이런 "블록 우주(block universe)"에 이미 현존하는가? 일어날 모든 것은 시공간의 4차원 방에 이미 가두어져 있는가?

 

이런 견해는 때때로 "시간-기하-결정론(chrono-geo-determinism)"(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실제로 시공간의 기하학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기하 부분이 나타난다)으로 불린다. 그것은 관련된 그리고 확증된 과학적 이론에서 비롯되는 실재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이론의 일례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메타-물리학(형이상학)이고, 그래서 그것이 바로 베르그손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다.

 

베르그손의 경우에, 그리고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수학적 물리학/데이터와 그것 위에 부가되는 더 고등한 층위의 해석―철학―사이에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아인슈타인이 옳은 동시에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과학과 관련하여 분명히 옳지만, 그 과학에 부착된 시간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베르그손의 주장과 관련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이런 저런 입장을 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시간에 관한 베르그손의 명시적인 철학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유효한 과학적 이론들과 그것들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형이상학을 분리하는 것은 고려할 가치가 있다.

 

예전에 물리학자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이 물리학자들은 수학적 방정식들을 세계 속에 현존하는 "사물들"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우리는 세계의 양상들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그것들이 거둔 성공이 그런 방정식들은 실제 세계에서 저쪽에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흔히 보이지 않는) 실재적 사물들과 전적으로 호환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간주한다.

 

그런데 머민의 경우에, 방정식들은 언제나 추상물들이다. 그것들은 어떤 본질적인 진리를 포착하지만 진리 전체를 포착하지는 못하는 엄청나게 강력하고 엄청나게 유용한, 세계에 관하여 우리가 진술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생명과 진화를 추동하는 "엘랑 비탈"로서의 시간에 관한 베르그송 특유의 관념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무릅쓰고, 시간을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다른 철학적 시각들이 존재한다.

 

특히 현상학으로 불리는 철학의 갈래는 세계에 대한 직접적 파악을 주요한 관심사로 삼는다. 현상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과학적 이론화와 탐구는 우리의 육화된 경험의 원천 사실들의 뒤를 쫓아야 한다. 독일 현상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의 문제―동사 "있음"을 이해하는 것의 문제―는 과학 또는 철학에 의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과학을 모든 의문들에 대한 재판관으로 삼고자 하는 황급한 움직임은 존재에 관한 의문이 전적으로 망각되어 버렸다는 점을 의미했다.

 

종합하면, 이런 시각들은 내가 정말로 대단히 흥미롭다고 깨닫는 한 가지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 블로그는 과학과 문화에 전념한다.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는 과학이 인간 경험의 전체 얼개에 들어 맞게 되는 지점에 관한 의문에 접근하는 상이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은 그런 얼개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일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 논의에서 우리는, 이해를 실행하는 것은 항상 우리라는 점을 결코 망각하지 않은 채, 과학적 실천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방대한 역량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꺠닫게 되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 우리 자신의 세계들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엄청나고 아름다운 불가사의이다. 과학의 설명들은 그런 불가사의를 파헤치는 한 가지 경로인 것이지, 유일한 경로는 아니다.

 

이것이 참이라면, 다음에 우리는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