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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호건: 오늘의 에세이-정보가 실재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까닭

 

정보가 실재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까닭

Why information can't be the basis of reality

 

―― 존 호건(John Horgan)

 

모든 것은 정보인가? 이런 유혹적인 관념이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 내가 막 극찬하는 서평을 제시한 <<정보(The Information)>>(2011)라는 제임스 글릭(James Gleick)의 갓 출판된 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무엇보다도 글릭의 책은 1948년에 벨 연구소 수학자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이 통신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한 틀을 제공하기 위해 발명한 정보 이론의 심층적인 전기이다.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정보가 "일차적인 것, 물질 자체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있다고 글릭은 적고 있다. 이런 관념은 최근의 다른 책들을 고무했는데, 세스 로이드(Seth Lloyd)의 <<프로그래밍 유니버스(Programming the Universe)>>(2007), 찰스 세이프(Charles Seife)의 <<만물 해독(Decoding the Universe)>>(2007), 블라트고 베드럴(Vlatko Vedral)의 <<실재 해독(Decoding Reality)>>(2010)과 폴 데이비스(Paul Davies)가 편집한 에세이 모음집 <<정보와 실재의 본성(Information and the Nature of Reality)>>(2010)이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정보이다라는 밈은 공통 감각에 위배된다.

 

이런 결론에 이르는 것은 내게 쉽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밈은 내 평생의 애호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 즉 3년 전에 사망한 물리학자-시인 존 휠러(John Wheeler)에 의해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휠러는 양자역학과 정보 이론 사이의 심원한 공명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전자는 우리가 그것을 심문하는 방식에 따라 입자 또는 파동처럼 거동한다고 휠러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정보 이론은 모든 메시지는 예 또는 아니오 질문들에 대한 대답인 일련의 "이진 단위들", 즉 비트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휠러는 물리학이 정보 이론의 견지에서 재서술될 수 있다고 제안했는데, 그것은 "잇 프롬 비트(it from bit)"라는 공안 같은 어구로 요약되는 관념이다. 1989년에 산타페 연구소에서 발표한 한 논문에서 휠러는 "모든 존재자―모든 입자, 모든 역장, 심지어 시공간 연속체 자체―는 자체의 기능, 자체의 의미, 자체의 바로 그 현존을 전적으로 예-또는-아니오 질문들에 대한 장치에 의해 끌어낸 대답들, 이진 선택들, 비트들로부터 도출한다"고 가정했다.

 

예전에 휠러는 과학자를 "뜻밖의 판본"의 스무고개 놀이를 하는 사람에 비유함으로써 이 개념을 내게 설명했다. 이 변양태에서 알아 맞추는 사람은 방을 떠나는 한편으로, 집단의 나머지 구성원들―또는 배제된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은 어떤 사람, 장소 또는 사물에 관해 의견을 일치시킨다. 그 다음에 알아 맞추는 사람은 다시 그 방에 들어가서 예 또는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는 일련의 질문들로 그 집단의 비밀을 알아 맟추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그 집단은 알아 맞추는 사람을 속이기로 결정했다. 질문을 받게 될 첫 번째 사람은 알아 맞추는 사람이 질문을 제기한 이후에야 무언가에 관해 생각할 것이다. 이어지는 각 사람도 동일한 행위를 할 것인데, 자신의 반응이 이전의 모든 질문들에 정합적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 낱말은 비록 내가 그렇다고 생각했더라도 내가 들어갔을 때 그 방에 있지 않았다"고 휠러는 강조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물리적 실재는 우리가 질문들을 제기하기 전에는 비확정적인 중간 상태에 존재한다.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제기한 이후에야 무언가를 얻게 된다." 우리는 의식과 물리적 실재, 주관적 영역과 객관적 영역의 상호작용에서 창발되는 "참여적 우주"에 살고 있다고 휠러는 넌지시 주장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정보, 비트들, 우리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물리학자 롤프 란다우어(Rolf Landauer)가 즐겨 말했듯이, 모든 정보는 물리적―즉, 모든 정보는 물리적 사물 또는 과정들에서 육화된다―이지만, 그것이 모든 물리적인 것들이 정보로 환원될 수 있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보라는 개념은 정보를 얻게 되는 것―즉, 선택을 할 수 있는, 또는 자유의지(실례, 나는 어찌할 수 없는데, 자유의지에 대한 강박 관념이 있다)를 갖춘 의식적인 관찰자―이 부재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내일 사라진다면, 모든 정보도 사라질 것이다. 놀라고 변화할 마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책과 텔레비전과 컴퓨터들은 우표와 돌처럼 과묵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압도적으로 명백한 것처럼 보일 것이지만, 많은 정보 열광자들에 의해 간과되는 듯 보인다.

 

정신이 물질만큼 근본적이라는 관념―휠러의 "참여적 우주"라는 관념이 함축하는―도 일상 경험에 직면하여 흩어진다. 물질은 정신이 없더라도 명백히 현존할 수 있지만, 물질이 없다면 정신은 어디에 현존하는지 알겠는가? 총으로 어떤 사람의 심장을 관통하면, 그의 물질은 지속하지만 그의 정신은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정보―시, 힘합 음악 그리고 리비아에서 보내온 휴대폰 영상들 같은 것들 속에 육화된―는 여기 지구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우주의 어떤 다른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빅뱅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더라도 빅뱅은 일어났는가? 글쎄,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고, 그래서 나는 빅뱅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신이 듣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속이는 짓이다).

 

내 일부는 의식이 물리적 영역의 우연적 부산물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실재의 일차적 목적이라고 믿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것을 곰곰히 생각할 인간들이 없다면, 우주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더 나쁘게도, 우주는 지루하다. 그러나 나의 냉정한 일부는 "잇 프롬 비트"[존재자는 정보에서 비롯된다] 같은 관념들을 과학이 우리가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그런 종류의 멍청한 자기도취적 신비주의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