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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스토아주의의 본질

 

스토아주의의 본질

The essence of Stoicism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이 에세이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질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최소한 복잡한 관념이나 객체는 어떤 본질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믿지 않는다. 확실히, 무언가가 금이기 위해서는 해당하는 것이 79개의 양성자를 갖는 원자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충분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원소 금의 "본질"은 79번의 원자번호를 갖고 있다고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도형으로서 삼각형의 "본질"은 내각들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명하게도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게임"이라는 언뜻 보기엔 간단한 사례에서 예증했듯이, 삶 또는 자연 속에서 필요 조건과 더불어 충분 조건의 견지에서 간명하게 규정될 수 있는 다른 것은 거의 없다. 어떤 활동이 게임으로 간주될 수 있기 위해 충족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모든 비게임들과 구분짓는 소수의 조건들을 제시하고자 시도하면, 비트겐슈타인이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본질이 아니라―으로 지칭한 것을 공유하는, 항상 그 수가 늘어나는 일단의 유사하지만 전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는 활동들에 곧 빠져버릴 것이다.

 

게임들이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면, 과학적 이론이나 철학적 체계 같은 더 복잡한 개념들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스토아주의는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또는, 더욱이, 애초에 그것은 잘못 제기된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천하는 현대 스토아주의자로서 나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하지 않은 채, 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수 세기 전에 제논, 크리시포스, 세네카, 에픽테토스 등이 저술한 것에 아무튼 부합되도록 만드는 가망없고 점점 더 터무니없어지는 정신적 훈련에 관여하지 않은 채, 나와 다른 사람들이 "스토아주의자"라는 술어를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의미에 관심이 있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할 것이다. 가장 명백하게도 나는 스토아주의와 비스토아주의 사이에 어떤 종류의 자의적인 구획짓기를 규정하거나, 또는 내 클럽에 입장할 수 있도록 "진정한" 스토아주의자가 믿어야만 하는 것을 지시하는 것에 아무 관심도 없다. 반면에, 현대 스토아주의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호소력이 있다고 깨닫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 다양한 종교적 및 이데올로기적 신념들을 갖춘 사람들을 위한 빅 텐트로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스토아주의자들은 무신론자, 유신론자 그리고 범신론자들이고, 또한 그들은 진보주의자, 자유방임주의자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다양성과 관련하여 매우 기쁘다.

 

그런데 나는 내 자신의 지성적 정합성과 정직성에도 관심이 있고, 그래서 여기서 나는 내 자신의 편익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내 자신의 해답을 제공할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훨씬 더 좋다. 결국 그것 때문에 나는 사적인 철학적 일기가 아니라 블로그 글을 적고 있다.

 

명백한 것에서 시작하자. 현대 스토아주의자가 고대 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고수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그것은 기묘할 뿐 아니라(우리는 경전이 돌에 새겨져 있는 종교가 아니라 진화하는 철학에 관해 말하고 있다), 매우 어리석은 짓이기도 할 것이다. 그저 한 가지 예를 제시하면, 크리시포스는 인간 이성이 있는 자리는 심장이라고 주장했고, 갈레노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초기 스토아주의자들을 놀렸다. 후기 스토아주의자들은 신중하게도 그 문제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갱신했다. 그래서 그 이후의 과학과 철학이 상당히 새롭게 밝힌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현대 스토아주의자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제 덜 명백한 것을 고려하자. 스토아적 자연학, 논리학 그리고 윤리학에는 폐기되면 결과적인 철학을 비스토아적으로 만들 어떤 근본적인 신조들이 존재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자연학(예컨대, 우주의 완전한 영원회귀), 논리학(예를 들면, 강직증적 각인들의 교정 불가능성), 또는 윤리학(예를 들면, 히에로클레스에 따른 결혼의 필요성) 내에서의 특정한 관념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 스토아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교훈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유지해야 하거나 행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합당하게 스스로를 스토아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이른바, "메타"로 올라가서 그런 교훈들에 관해 탐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그렇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실제로 고대 스토아주의자들 자신에 의해, 사실상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미덕 윤리 학파들에 의해 사용된 접근 방식이다. 미덕 윤리학이 무엇이고 그것이 의무론이나 공리주의 같은 도덕 철학에 대한 근대적 접근 방식들과 어떻게 다른지 고찰하자. 후자의 것들은 어느 특수한 행위가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분별할 수 있도록 어떤 보편적 기준(정언 명령, 효용성의 원리)을 알맞게 사용하는 것에 관여한다. 그런데 미덕 윤리학은 본질적으로 상황적인 것인데, 특정한 행위들이 아니라 개인의 성격에 집중한다. 지침은 일반적이다. 역할 모형들을 모방하고 행복추구적 삶에 관해 반성함으로써 성격을 발달시켜라. 모든 경우에 미덕을 실천하라. 기타 등등. 이것이 어느 일단의 특정한 환경들에 적용되는 방식은 그런 환경들의 구체성에 의존하는데,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은 때때로 행해야 할 고결한 것이고, 때때로 그렇지 않다. 도덕적 가치를 지닌 여타의 있음직한 행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저쪽에 난잡한 세계가 존재하고, 그래서 보편적 규칙들은 결코 수습할 수 없다.

 

이런 착상을 하나의 철학적 체계로서의 스토아주의 자체에 적용하면,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결과를 얻게 된다. 또 다시, 윤리학에서 출발한 다음에 논리학과 자연학을 다룰 것이다. 스토아적 윤리학의 중요한 신조는,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미덕이고, 게다가 건강, 부, 교육 등과 같은 "외재적인 것들"은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명백히 이것이 스토아학파를 견유학파(그들에게는 외재적인 것들이 전적으로 무관하다) 및 소요학파(그들에게는 외재적인 것들 가운데 일부가 행복에 필요하다)와 구분짓는다. 또한 그것은 스토아주의를 에피쿠로스주의와 매우 예리하게 구분짓는데,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들은 행복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여러분의 철학이 외재적인 것들이 여러분의 행복에 중요하다는 그런 것이라면 여러분은 스토아주의자가 아니라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외재적인 것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면 여러분은 역시 스토아주의자가 아니다. 여러분의 주요 관심사가 쾌락과 고통이라면 여러분은 확실히 스토아주의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개념적 공간 내에는 합당한 의견 불일치에 대한 많은 여지가 존재하며,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것들(어느 것이 우선해야 하는가? 왜? 어떤 양으로?)뿐 아니라 미덕과 관련된 구체적인 것들(미덕은 다수인가 하나인가? 다수라면 얼마나 많은가? 하나라면 그것은 상이한 방식들로 나타나는가?)에 관한 관념들의 시간에 따른 진화에 대한 여지도 존재한다.

 

이제 논리학을 다룰 것인데, 스토아학파에게 윤리학은 오늘날 우리가 논리학, 인식론(즉, 지식에 관한 이론) 그리고 인지과학(심리학, 아마도 사회학의 일부)으로 지칭하는 것의 조합을 의미했다. 그런데 스토아학파는 이 영역에서도 수많은 특정한 관념들을 견지했는데,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 시간의 시험을 견뎌냈거나 더 발달되었으며, 다른 것들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스토아주의자로서 우리는 고대 스토아적 삼단논법의 세부 내용을 신봉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대 언어학과 언어 철학이 기여한 것에 무관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의 상이한 유형들에 대한 고대적 분류를 쫓아야 하는가? 또 다시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렇다면 스토아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는 스토아적 논리와 관련하여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한편으로, 논리학(더 넓은 스토아적 의미에서)이 윤리학(자신의 삶을 최선으로 사는 법을 결정하고자 하는 규율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의 연구에 필수적이라는 바로 그 관념. 즉, 세부 내용이 나타날 방식에 무관하게, 스토아주의자는 인간들이 실제로 추리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좋은 추론에 대한 파악이 윤리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네카가 서술했듯이, 여러분의 문제들, 즉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법에 관한 문제들에 유념하라.

 

내가 보기에, 스토아주의를 벗어나는 것의 불이익에 관하여 폐기될 수 없는 스토아적 논리학의 다른 한 신조는, 우리는 사건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에서 물러나서 한숨 돌리며 그것을 검토하고, 그것을 "응낙"하고 싶은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관념이다. 최근에 내가 적었듯이, 이것은 사실상 감정에 대한 현대의 신경과학에 기반을 둔 이해에 부합된다. 기본적인 감정적 반응들과 그런 반응들의 인지적 구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되먹임에 작용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이 없다면, 어떤 스토아적 도덕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인지행동적 치료법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스토아학파에게 우리가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으로 부를 것의 조합을 의미하는 자연학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또 다시 특정한 고대적 관념들을 고수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우주는 회귀하는 순환들을 겪는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현재의 우주론에서 비롯되는 최선의 추측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만, 만약에 그렇더라도 이런 순환들은 완전한 회귀는 아닐 개연성이 매우 높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우주에 어떤 "합리적 원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스토아적 관념, 즉 일종의 보편적 생기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또 다시, 현재 몇몇 물리학자들은 그런 방향으로 경사되어 있다. 이런 저런 방향으로 너무 강하게 추측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것인데, 그 대가로 갈레노스가 (은유적으로) 크리시포스로 하여금 먹게 만든 동일한 먼지를 먹게 된다.

 

그 다음은 어떠한가? 한편으로, 논리학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스토아주의자는 자연학에 대한 이해도 삶을 살아가는 법에 관한 연구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사실을 좇는데[<<스토아주의(A New Stoicism)>>이라는 책에서 래리 베커(Larry Becker)의 즐거운 표현으로], 이것은 그들이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조절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픽테토스가 서술했듯이, 어떤 것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어떤 것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 확실히 우주의 기본 법칙들과 구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인데, 아무튼 "대비밀(The Secret)"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넘어서, 스토아적 자연학의 중요한 신조는 유물론과 그에 따른 보편적 인과의 원리에 대한 인정이었다고 합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최근에 내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신=자연=이성이라는 관념보다 훨씬 더 토대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스토아학파는 신과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고 원인과 결과에 좌우된다는 점에 있어서 단호했기 때문이다. 원인들과 결과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물질적 우주―물리적 우주라고 말하곤 하는―라는 관념이, 우주는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다"(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피타고라스주의로 이어질 것이다)는 최근의 소문에도 불구하고, 근대 과학을 정초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스토아주의의 골격적인 최소주의적 판본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현대 스토아주의자로 간주하는 모든 사람이 이 도표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과 동일한 탐구 노선을 좇음으로써 훨씬 더 많은 것이 쓰여질 수 있다. 골격에 상당히 더 많은 살을 붙일 수 있으면서 여전히 일반적인 동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또 다시, 훈련은 순수성, 구획짓기, 또는 유사하게 오도된 노력들을 위해 수행되지 말아야 한다. 목표는 별개의 클럽들의 형성이 아니라 지성적 정직성이다. 나는 소수의 스토아주의 학도들을 위해 더 많은 형이상학을 제시하기보다는 계속해서 골격을 최소화하여 빅 텐트를 유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