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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역능과 그것의 변천에 관하여

 

역능과 그것의 변천에 관하여

Of Powers and Their Vicissitude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존재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은 많다. 토데 티(tode ti, 개체), 사물, 객체, 일차적 실체, 체계, 과정, 육체. "이것", 기계, 사건 등이 있다. 나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술어들은 모두 동의어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이것", 하나의 개별적 존재자, 존재하는 무언가를 나타낸다. 다른 한 의미에서, 그것들은 사물들 또는 일차적 실체들에 대한 상이한 접근 방식들을 나타낸다. 사물을 사건으로 논의할 때, 우리는 그것들의 지속적 본성 또는 그것들이 시간적으로 전개되는 방식을 강조한다. 사물을 기계로서 접근할 때, 우리는 그것이 입력에 대응하여 산출하는 출력의 견지에서 그것에 접근한다. 사물을 체계로서 접근할 때, 우리는 그것이 자체의 조직과 부분들의 상호 의존성을 유지하기 위해 관여하는 과정들을 탐구한다.

 

사물 또는 육체는 자체의 잠재적 고유 존재와 국소적 표현, 즉 역능과 성질로 분리된다. 어떤 육체 또는 사물을 개체화하는 것은 성질 또는 특성이 아니다. 사실상 특성 또는 성질은 역능 또는 역량의 결과이다. 성질은 사물 또는 기계가 처해 있는 장과의 상호작용들의 결과 또는 사물 내에서 펼쳐지는 조작 또는 활동들의 결과로서의 사건으로 분출되는 역능의 현실화, 역능의 활성화이다. 어떤 존재자를 규정하는 것은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역능들, 역량들이다. 역능은 존재자가 행할 수 있는 것, 특이점, 역량이다.

 

성질과 그것이 현실화하는 역능 사이의 관계는 일대일 대응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역능과 성질 사이에는 유사성이 결코 없다. 역능의 범위와 영역은 언제나 성질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역능을 함수로 간주한다면, 성질은 함수에 입력이 주어질 때 얻게 되는 점, 값 또는 출력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F(x) = x^2 + 2의 경우에, 이 함수의 x 자리에 1이 대입되면 3이라는 값을 얻게 된다. "3"은 이 함수가 1이라는 입력에 대해 산출하는 성질이다. 명백히 함수의 범위는 어떤 값이 그것에 대입될 때 그 함수가 산출하는 어떤 특수한 값보다도 더 크다. 게다가 함수의 출력과 함수 또는 역능 자체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성냥은 연소시키거나 화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능 또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진술 방식일 뿐이다. 화염과 연소는 적절한 환경에 놓여 있는 성냥의 출력이다. 역능 또는 기능(함수)과 화염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한 역능이 다양한 출력을 산출할 수 있는데, 화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일한 역능이 연소 형태가 아닌 다른 성질들을 산출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육체, 사물, 또는 객체들이 생생하고 놀랍다. 사물은 적절한 환경에서 뜻밖의 성질 또는 국소적 표현을 산출할 수 있는 숨은 잠재력을 내부에 품고 있다.

 

물론, 사물의 역능 또는 역량은 결코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위상 공간에서 현실화된 점 또는 국소적 표현만 만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육체 또는 사물의 역능을 추론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물이 처해 있는 맥락을 실험적으로 변경함으로써 이런 조건들에서 그것이 거동하는 방식 또는 그것이 수행하는 것을 판별하여 역능을 추론하게 된다. 점진적으로 우리는 사물에 내재하면서 그것의 구조 도식을 구축하는 역능들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천 개의 기계: 레비 R. 브라이언트의 들뢰즈적 실재론에 있어서 존재론, 비판 그리고 정치"라는 학위 논문에서 유리 디 리베르토(Yuri di Liberto)는 객체에 관한 이런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형식화를 제시한다:

 

B: = [S(p_1, p_2, p_(...),p_n)]/I = O

 

육체 "B"(또는 사물 또는 기계 또는 객체 또는 과정)은 어떤 특수한 입력 "I"가 주어지면 그것을 어떤 특수한 출력 "O"로 변환하는 역능 또는 조작 "p"의 집합 또는 체계 "S"이다. 입력은 사물의 내부 또는 외부에서 일어날 수 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제시했듯이, 존재의 최소 단위는 사물이 아니라, 한 존재자와 그것의 장 사이의 주름이다. 국소적 표현이 국소적인 까닭은 그것이 어떤 장 내부의 특정한 조건에서 어떤 특성 또는 성질의 현실화이기 때문이다. 불 같은 육체는 행성 지구와 우주에서 상이하게 거동하고, 상이한 특성들을 나타낸다.

 

여기서 불의 거동은 그것이 처해 있는 장의 결과이다. 우주에서, 거의 무중력 상태에서 표현될 때, 그것은 상이한 특성들을 현실화한다. 국소적 표현이 표현인 까닭은 그것이 세계 또는 장에서 일어나는 현실화 또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국소적 표현을 표현으로 만드는 것은 목격되지 않고 있다. 표현은 그것을 표현으로 간주하는 주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표현인 까닭은 그것이 어떤 특성 또는 성질을 현실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목격할 지각을 갖춘 어떤 존재자가 있는지 여부에 무관하게, 녹은 산소(입력)에 반응하는 철의 국소적 표현일 것이다.

 

어떤 조작의 출력은 다양하다. 브릭스-로셔(Briggs-Rausher) 반응의 경우처럼 때때로 그것은 작용일 것이다.

 

노동의 조작을 통해서 상품을 구성하는 경우처럼 때때로 그것은 생산물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철에서 나타나는 녹의 경우처럼 때때로 출력은 성질 또는 특성의 표현에 놓여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와 들뢰즈를 좇아서 우리는 역능을 "정동"으로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물의 역능이 고정되어 있거나 견고하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사물에는 몇 가지 상이한 형태를 취하는 고유한 가소성, 생성의 역능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역능은 최저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에까지 이르는 정도의 범위를 갖는 "방대한" 것이다. 피로, 배고픔, 비판, 상실 그리고 병환 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 자신의 육체에서 이것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행동, 지각 그리고 사유의 역능이 감소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육체가 조립체라는 점을 증언한다. 병에 걸렸을 때 나의 역능은 감소되는데, 왜냐하면 내 육체를 집으로 삼은 박테리아 또는 바이러스들과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들의 역능은 향상되었다. 그렇지만 역능의 이런 변동은 생명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강철 포크는 지속적으로 구부러지는 결과로서 그것의 결정들이 재정렬하게 됨으로써 강도가 감소하게 된다.

 

육체는 새로운 역능을 획득하고 예전에 지녔던 역능을 상실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 우리는 노화의 결과로서 심장 마비를 일으키거나 점차적으로 나빠지는 시력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 [전]자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적고 있다.

 

수영하는 사람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모래사장에서 재생하는 수영 교사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오로지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따라해야 할 몸동작들을 보여주는 대신 다질적인 것 안에서 개봉해야 할 기호들을 발산하는 방법을 안다. 다시 말해서 관념적 운동성이란 것은 없다. 오로지 감각적 운동성만이 있는 것이다. 신체는 자신의 특이점들을 물결의 특이점들과 조합할 때 어떤 반복의 원리와 관계를 맺는다. 이 반복은 더 이상 같음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을 포괄하는 반복이고, 하나의 물결과 몸짓에서 또 다른 물결과 몸짓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포괄하는 반복, 이 차이를 그렇게 구성된 반복의 공간으로 운반하는 반복이다.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공간 안에서 특이점들은 서로의 안에서 다시 취합된다. 여기서 반복은 자신을 위장하는 동시에 형성한다.

 

<<천 개의 고원>>의 언어에 따르면, 우리는 물결과 육체에 속하는 이런 특이점들의 취합을 "일관성의 평면" 또는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일관성의 평면―항상 특이하고, 항상 "각개적인 것"―에는 개별적인 것, 강도적인 것, 특이한 것, 변별적인 것이 거주하고 있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습관"―어떤 장이 육체로 접히는 것―"은 반복에서 새로운 어떤 것, 곧 차이를 훔쳐낸다. 습관의 본질은 수축에 있다." 주름은 어떤 장의 요소들, 강도들의 수축이지만, 유사성 또는 재인의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수축이다. 이런 차이가 새로운 역능 또는 역량이다. 마이클 펠프스는 물결-되기와 돌고래-되기 둘 다를 겪음으로써 이런 것들을 자기 내부에 접는 것의 결과로서 육체 속에 새로운 역능을 산출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존재자들과 새로운 역능들이 생성되는 조립체들이 존재한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적고 있듯이,

 

창과 칼이 청동기 시대부터 등장하게 된 것은 인간-말이라는 [조립체] 덕분으로, 이 [조립체]는 단검과 꼬챙이의 길이를 늘려 보병 최초의 무기였던 망치와 도끼를 쓸모 없는 것으로 반들어 버렸다. 이어 등자가 인간-말이라는 [조립체]에 새로운 형태를 강제하는데, 다시 이것은 새로운 유형의 창이나 새로운 무기 제작을 부추겼다.

 

등자를 갖춘 인간-말 육체와 등자를 갖추지 않은 인간-말 육체는 두 가지 상이한 존재자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이한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등자가 없다면 인간-말 조립체는 창의 힘을 전달할 수 없다. 타격했을 때 인간은 말에서 떨어지게 되고, 그래서 그 육체는 사라지게 된다. 등자를 갖춤으로써 힘이 전달될 수 있다. 그 조립체가 결합될 때마다 발생하는 주기적 구조를 갖춤으로써 새로운 존재자가 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