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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켄지 워크: 오늘의 에세이-인류세를 위한 (사회적) 이론

 

인류세를 위한 (사회적) 이론

(Social) Theory for the Anthropocene

 

―― 멕켄지 워크(McKenzie Wark)

 

그렇다면 인류세 시대에 사회적 이론은 어떻게 되는가? 글쎄, 그것은 더 이상 사회적인 것에 관한 것일 수가 없을 것이다. 사회적인 것을 주어진 것, 사유를 위한 인공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비사회적인 것과의 더 난잡하고 복잡한 연결 관계들이 더 자명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비사회적 또는 탈사회적 이론이 맡을 과업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론과 철학을 구분짓고 싶다. 나는 철학이란 하나의 전통, 일련의 텍스트들과 그것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철학으로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론이라는 술어를 무언가 다른 것, 제도라기보다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싶다. 이론은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에서 개념들을 형성하고 사용하는 실천이다.

 

그렇다면 인류세를 위한 이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이론일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부르자. 그것을 인류세, 또는 남성세(Manthropocene), 또는 인류혐오세(Misanthropocene), 또는 크툴루세(Chthulucene), 또는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부르자. 그것을 신진대사적 균열(metabolic rift)이라고 부르자. 그것을 그저 아무것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그것을 아무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이 어떤 상황을 명명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런 상황은 사회적 노동의 총합이 자체의 행성적 현존의 조건을 훼손하는 상황이다. 외부, 그런 노동의 폐기물을 버릴 외부, 주변부, 어딘가 다른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런 무질서가 사라졌다고 우길 수 없다. 이제 그런 무질서는 지구의 전체적 신진대사를 통해서 되먹임된다. 잠깐 동안 그렇게 되어버렸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별개의 '환경' 또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저 그것으로부터 물러서 있다면 균형 상태에 처할 수 있을 '생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 관해 알 수 있는 어떤 기본적인 방식들은 필연적으로 자연과학에서 비롯될 뿐이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탄소이다. 지하에서 탄소를 캐내어 공기 중에 배출하는 것은 기후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인류세의 핵심 현상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지구적 규모의 방대한 통신, 계산, 과학적 협력 장치를 통해서 알게 될 뿐이다.

 

갈릴레오가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을 때, 또는 다윈과 월리스가 모든 종은 예외 없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을 때, 또 다시 자연과학은 현존하는 세계관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무언가를 말하게 된다. 그래서 인류세를 위한 이론의 한 양태는 자연과학이 권력, 문화 그리고 인문학적 사상과 맺는 관계에 관한 의문을 재개한다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고등한 근거를 주장하고자 하는 이론을 통한 일종의 반사 행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인류세에서 이론을 위한 만족스러운 출발점이라고 깨닫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자연과학으로부터 그런 근거의 조건에 관해 알게 될 뿐인데, 이 경우에는 우주론이나 생물학이라기보다 지구과학이다.

 

이론은 그것이 자체의 것들이 아닌 앎의 방식들과 맺는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다른 지식 형태들과 지배권을 놓고 경합하기를 거부하고 그것들과 협력할 방안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힘에 대해 분개하지도 않고 더 영성적인 고등한 힘을 가장하지도 않는 것이 우리의 현 상황에서 이론를 향해 가는 길이다.

 

해야 할 일이 많다. 파기하고 아무튼 대체해야 할 세계관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세계는 태양중심적인 진화하는 세계인 것만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세계가 별개의 것, 또는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 또는 인간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을 규정할 수 있는 상위점으로 더 이상 간주될 수 없는 세계이다. 우리 자신의 활동이 그것을 변화시키고 있고, 그것을 비가역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도 이 생의 가능성의 조건을 훼손하고 파기하는 방식들로 변화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생들을 위한 다른 이론들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이것에 관한 내 자신의 사유는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는 노동과 가치로 간주되는 것에 관한 의문과 관련되어 있었다. '자연'을 단순히 노동이 만나게 되는 것으로 규정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비인간적 기술 장치와 얽혀 있는 협력적 노동은 비인간 세계에 관한 어떤 지식과 가치를 어떻게 인간에게 현시하는가? 노동과 장치의 그런 조립체는 세계를 달리 평가할 수 있는가?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의문들이다.

 

나는 자본의 관점에서 인류세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이 자본을 영원하고 전능한 전체로 간주하는 사유의 습관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현 상황에서 무능하다고 깨닫는다. 또한 그것은, 자본을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들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낳는다.

 

이것은 명백히 참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내일 폐기될지라도, 인류세는 지속될 것인데, 그것도 수천 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칠십억 명을 먹이고 입히며 주거지를 제공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압박받고 쇠퇴하고 있는 다양한 생명의 그물들의 우선 순위를 구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문명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이미 끝났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리고 자본주의도 그것을 알고 있다. 우리 시대의 지배 계급은 그들이 그들 자신 외의 누군가를 위해 지배한다는 주장을 전혀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능적으로 우리로부터 숨고, 우리를 감시하고, 스스로를 무장하고 강화하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강탈하고 노략질한다. 왜냐하면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페허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에 관해 이해하고 그런 삶에 관한 느낌을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한 문명을 구성하는 작업이 벌써 시작되었다. 다음의 문명은 몇 가지 측면에서 축소된 문명일 것이다.

 

우리가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면, 전체적이고 온전하며 균일한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저 지속시킬 수 있는 지식의 전통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단편들, 과거가 아니라 가능한 미래들의 단편들이다. 인류세를 위한 이론은 현 상황―서양 전통이 과거로 연장된다고 상상하는 만큼 멀리 미래로 지속될―을 위해 용도 변경된 단편들의 짜깁기 작업에서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인류세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우선 온건한 목적을 설정하면, 핵심은 인류세가 분과학문적 사유를 그저 지속시킬 가능성을 무화한 방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작업을 해나가는 것에 대한 걸림돌은 일종의 부인주의이다. 확실히, 기후 부인주의자들이 존재하는데, 일부는 화석 연료 기업 등으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는다. 그런데 나는 꽤 계몽된 청중 사이에서 인류세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만나게 되는 일상적인 부인 형태들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

 

첫째, 비판을 제기하는 끊임없는 경향이 존재하는데, 비판에 필요한 주요 개념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더 이상 갖추고 있지 않다. 이것은 사유의 의제를 잊어 버리는 비판이다. 모든 개념들은 취약한 사물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약간 참일 뿐이다. 그것들의 (약한) 힘은 자체의 일반성에 놓여 있다.

 

둘째, 인류세를 유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아, 먼저 우리는 탈구조주의적이었고, 그 다음에는 탈근대적이었고, 그 다음에는 존재론적 전환이 있었고, 기타 등등. 사유 대상으로서의 인류세는 그런 계기들 가운데 하나일 수가 있을 것이지만, 그것의 원인은 어딘가 다른 곳에 놓여 있다. 이번에 그것은 사회과학적 및 인문학적 사유 바깥에서 비롯된 결과를 다루는 것의 문제이다. 그것은 과학에서 비롯되지만, 태양중심적 우주의 사실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 긴급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처리하는 문제이다.

 

세째, 정반대의 경향이 존재하는데, 음,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알고 있었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기타 등등. 이것은 대체로 어떤 새로운 것들을 유사한 듯 들리지만 그렇지 않는 어떤 오래된 것들에 동화시키는 문제이다. 그것은 어떤 생태적 및 환경적 관념들―이것들이 강력하고 유용한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말이다―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재난, 트라우마 또는 위기에 관한 친숙한 수사 어구들과도 같지 않다.

 

네째, 이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변양태는 이미 논박되었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글쎄, 과거에 농업 생산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들이 있었다는 점이 우리 시대에 분명히 보이는 약간 더 체계적인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모든 제약들이 언제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마찬가지로 비사회적이고 비역사적인 논증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과거의 제약들이 극복되었다는 점이 현재의 제약들도 극복될 수 있거나 극복될 것이라는 점을 자체적으로 보증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적들이 인류세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의제에 속하는 정치적 관념일 뿐이고, 그래서 즉각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노선을 따르는 주장들을 직면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좌파와 우파 모두 이런 동일한 논증을 제시한다. 우파는 인류세를 자본주의를 끝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속하는 것이라고 거부하고, 좌파는 자본주의를 영속화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거부한다.

 

요약하면, 인류세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부인 전략들을 절단해야 한다. 그때 문제는 다양한 사회과학 및 사회적 이론 전통들이 자체의 자원를 샅샅이 뒤져서 현 상황에서 작동시킬 수 있는 단편들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 된다. 베버주의자든, ANT주의자든, 무엇이든 간에 어떤 전통에서도 자원이 있을 것이다. 더 큰 세계에 관한 그런 큰 의문으로부터 자신의 작은 담론적 세계를 위해 다른 작은 담론적 세계를 희생하여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을 통해 작업했지만, 그것이 유용한 개념들이나 결과에 대한 어떤 배타적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는 신진대사적 균열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를 통해서 인류세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전개했다.

 

<<분자적 레드(Molecular Red)>>에서 나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등에 의존하여 포스터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신진대사적 균열을 해석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 아카이브로부터 수용된 것과는 상이한 선집을 포함한다. 서양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내가 보기에, 실천적 타성태(practico-inert)라는 샤르트르의 개념이 매우 강력한 듯 보인다. 그것은 사회기술적 형식들, 즉 그가 '연속적' 형식들이라고 부르는 것의 관성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저 하나의 예로서, 내게 그것은 유명한 문학 속에서 비롯된 유용한 개념인 듯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무시당한 자원들의 아카이브를 통합하기 위해 말할 것이 있다. 포스터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과학과 관계를 맺으려는 엥겔스의 시도를 꽤 간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도는 자체의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으로 물러서는 것보다 더 나았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과학적 종류의 노동, 기술적 종류의 노동 그리고 다른 종류들의 노동 사이의 협력 형태들에 관한 알렉산더 보그다노프(Alexander Bogdanov)의 무시당한 작업을 생각한다. 루카치(Lukacs)와 알튀세르(Althusser) 같은 이종적인 인물들을 통합하는 이런 사유 노선에 대한 금제를 해소해야 한다. 무시당한 자원은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의 과학적 및 기술적 측면을 포함한다. 왜 조지프 니담(Joseph Needam)과 JD 버날(Bernal)은 주요한 사회 사상가로서 그토록 무시당했는가? 또는 오히려 사회-기술-자연 사상가로서 무시당했는가?

 

더 유토피아적인 취지에서의 자원도 존재할 것이다.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는 기후가 변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전적으로 환각적인 관념을 품었지만, 최소한 그는 한 가지 관념을 품었다. 푸리에의 동시대인들의 사실주의적 소설에 비교하여 그의 저작은 몇 가지 의미에서 훨씬 더 '사실주의적'이었는데, 그들과 달리 푸리에는 쓰레기를 제거하는 것이 누구의 일인지에 관해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유토피아적인 것을 일상 속에서 구원적이거나 메시아적인 것의 순간적인 돌출로 간주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에서 비롯되는 전통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유토피아적인 것을 대단히 실제적인 문제들에 관한 사변적 담론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들은 내가 친숙한 마르크스주의적 전통 속에서 떠올리게 되는 자원들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 밖의 어느 곳에서도 그런 자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게 인류세를 위한 비사회적 또는 탈사회적 이론이라는 기획은 이중의 노동을 포함하는 듯 보인다.

 

첫째, 근접한 상황의 요구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지적인 가용 자원을 선별하는 노동. 둘째, 인류세에 맞서서 불안정한 시대를 관통하는 행로를 찾아내기 위한 과학적인, 기술적인, 지성적인, 조직적인 정동적 및 육체적 노동의 협력 형식들을 구축하는 노동. 누구나 원할 미래들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가능할 미래들의 맥락에서 사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