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레윈스(Tim Lewens)의 <<과학의 의미>> 서평: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일 수 있는가?
The Meaning of Science by Tim Lewens review: can scientific knowledge be objective?
예전에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이렇게 말했다. "과학철학은 대체로 조류학이 새에게 유용한 만큼 과학자에게 유용하다." 지금까지 그의 동료들 가운데 일부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2011년에 스티븐 호킹(Steven Hawking)이 철학은 죽었다고 천명했을 때, 그것을 뉴스로 만든 것은 바로 그 검시관의 명성이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훌륭한 과학자들은 새로운 데이터에 의거하여 자신의 이론을 기꺼이 수정하며, 그리고 팀 레윈스가 펠리칸 입문 총서의 한 권으로 출판한 멋진 책인 <<과학의 의미(The Meaning of Science)>>는 마음이 넓은 탐구자라면 누구나 과학철학의 가치를 예증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완전한 증거이다.
그 주제를 일축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오해한다. 그들은 과학철학이 안락의자 탐구―경성의 물리학이 아니라 분명하지 않은 형이상학―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과학철학의 과업은 과학자들이 자신을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철학을 얼마간 수행함으로써 도움을 받은 과학자들이 있더라도, 그것이 과학철학의 가치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니다. 철학이 과학에 가져다 주는 것은 과학이 지적으로, 실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의미하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레윈스는 먼저 과학이란 무엇이고 과학이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주목한다. 과학은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서술하는가, 아니면 과학은 우리가 세계를 조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모형들을 제공할 뿐인가? 과학은 진보를 이루는가, 아니면 어떤 시대의 이론들은 뱀의 허물처럼 차례로 버려질 수밖에 없는가? 명료한, 엄밀한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다양한 기법들의 임시방편적인 잡탕이 존재할 뿐인가?
레윈스는 이런 쟁점들은 경탄할 만하게도 명료하게 그리고 공평하게 논의한다. 그는 진리와 진보에 관한 쟁점들을 차분하게 살펴보는데, 그 과정에서 소박한 견해 및 냉소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런 신중한 접근 방식은 과학적 방법이 그것에 대한 몇 가지 대중적 판본들이 시사하는 것만큼 깔끔하고 탄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과학의 이론들이 증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과학에 중요한 한편으로, 어떤 실험이 중대하거나 어떤 증거가 결정적인지 결정할 때에는 많은 판단이 요구된다. 여러분이 그저 따를 수 있는, 여러분 대신에 이런 쟁점들을 결정할 방법은 전혀 없다. 획기적인 일들이 흔히 일어나는 까닭은 과학자들은 너무 심술궂어서 유망하지 못한 결과들에 직면하여 자신의 착상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레윈스가 적고 있듯이, "때때로 과학자들은, 마치 말처럼, 눈가리개가 씌어져 있을 때 가장 잘 전진한다."
그 책의 후반부에서 레윈스는 과학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핀다. 과학적 자문가들이 증거에 의거한 정책을 유도하는 세계에서 이런 쟁점들에 관한 그의 주의깊은 논의는 상당히 필요하다. 유전자 변형 곡물에서 항우울제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리고 권위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연구만을 고르고, 그래서 과학자들은 너무나 흔히 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그들로 하여금 찾아내기를 원하는 것을 기꺼이 찾아낸다는 대중적 회의주의가 많이 존재한다.
레윈스는 대단히 명석하여 그런 주장들에 대한 신뢰성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는 지금까지 이데올로기와 기득권이, 가장 두드러지게 스탈린의 러시아에서, 과학을 왜곡한 방식에 대한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한다.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는 유전학에 대한 기성의 견해를 아이들의 유전자 스톡은 그들의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도록 고안된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거짓이라고 비난한 가짜 생물학을 옹호했다. 현재 후성유전학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과의 피상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리센코의 이론들은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다. 이것은 오랫동안 리센코적 "개량책"에 의해 방해를 받은 소비에트 농업뿐 아니라, 그의 공식 노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때때로 목숨까지도 잃어버린 과학자들에게도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의 교훈은 가치는 과학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레윈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진화론 비판―그들은 진화론이 진화론 창안자의 부르주아 경제적 가정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었다―에 관한 능숙하고 정교한 논의로 이것을 예증한다. 레윈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옳았지만, 이것이 치명적인 이의 제기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다윈의 사유는 그의 자본주의적 가정들에 의해 형성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이론은 독자적인 장점에 의거한다. 가치적재적 사유는 자체의 기원을 넘어서는 관념들을 생성할 수 있다.
언제 과학적 지식에 따라 행동할 것인지 결정할 때에도 가치는 필수적인 것이다. 레윈스는 과학적 발견 결과들에 대한 포괄적인 증명 기준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한다. 때때로 논증이 가능한 한 반박할 여지가 없게 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신중하다. 때때로 예방적 원리는 확고한 증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는 신기술을 급히 사용해야 하고 때때로 그렇게 하기 전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다른 치유책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잠재적으로 생명을 구하는 약물이 제대로 작용할지 여부를 확실히 알지 못하더라도 그 약물을 사용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산업적 화학 물질을 승인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유일한 이득이 사소한 개선에 불과하다면, 유해할지도 모르는 그 화학 물질을 위험을 무릅쓰고 승인할 필요는 전혀 없다.
불편부당성이 기본적인 과학적 미덕이라면, 레윈스는 그것에 대한 훌륭한 모범이다. 그는 과학의 열렬한 옹호자이지만, 그것 때문에 과학을 옹호하기 위해 제기되는 더 무비판적인 주장들에 대한 적절히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올바르게도 그는 인간 생의 모든 양태를 과학적 견지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과학적 제국주의"에 대해 경계한다. 그의 책은 지적인 노동 분업이 언제나 존재하며, 지금까지 자기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과학에 너무 많은 것을 떠넘기는 것은 피아노 연주자에게 소나타를 연주한 후에 클라리넷 협주곡을 연주하라고 요청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초심자들을 위한 안내서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것들이 어떤 분야의 핵심적인 이름과 주제들을 관통하는 도보 여행이다. 최고의 입문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교과서라기보다는 선언서인데, 그것의 주제가 중요하면서 흥미로운 까닭을 설명함으로써 그 주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한다. 과학과 철학이 둘 다 중요하며 어느 것도 대체될 수 없는 까닭에 대한 더 좋은, 더 명료한 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