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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스탕제: 오늘의 책-파국적 시대에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

<<파국적 시대에: 다가오는 야만에 저항하기(In Catastrophic Times: Resisting the Coming Barbarism)>>

앤드류 고피(Andrew Goffey) 역, Open Humanities Press (2015)

 

※ 이 사이트에서 pdf 파일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음.

 

영어판 서문

 

지금은 2015년이고 나는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있었던 2008년 말에 내가 처해 있던 상황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 그들이 겪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이 본질적으로 금융 붕괴와 그것의 결과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논의하고 있었던 상황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했던가? 또는 역사―이것은 무엇보다도 규제한다고 주장해온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본주의의 역사이다―가 독자적인 시간적 지평을 부과하는 방식에 저항하는 것이 필요했던가?

 

저항의 필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정부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선한 의도를 공표하지만 "현실주의"가 승리했다. 시장의 자유로운 역동성, 말하자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상황을 수익의 원천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다국적 석유 기업과 금융 투기자들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구속할 모든 조치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수지 맞는 조작들의 원천인 탄소 시장은 괜찮을 것이지만, 채굴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확실히 괜찮지 않은데, 우리는 채굴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석유와 가스를 연소시켜야 한다.

 

"비통상적" 에너지원의 채굴을 위한 점점 더 오염시키거나(프래킹) 위험해지는(심해) 작업들 덕분에 생산 양식과 소비 양식의 변환을 강요하는 에너지 부족이라는 관념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기후 파괴(폭주하는 기후 변화)를 개시할 정도의 온난화를 만들어내기에 대체로 충분한 수단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인다. 그 다음에 지구가 인간 종처럼 적절한 기후 안정성에 의존하는 종들이 서식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지구가 금성처럼 죽은 행성이 될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결코 대답할 수 없을 의문이다.

 

<<파국의 시대에>>라는 책을 적고 있었을 때 내가 예견한 적이 없었었던 것은 모든 유럽인이 예상하고 있었던 거대한 "아메리카의 동원"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당시에 우리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비교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소심한 늙은 유럽은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고 있었지만, 아메리카인들이 마침내 이해했을 때, 그들이 동원되었을 때, 그 다음에.... 우리는 전 인구의 열렬한 지지와 더불어 유럽 경제의 빠른 급진적인 전환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려져 있듯이, 2007년과 2011년 사이에 기후 변화를 진지하게 간주하는 아메리카인들의 비율이 급감했는데, 71%에서 44%로 감소했다. 코펜하겐으로부터 구속력이 더 강한 공약의 발표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는 고통스러운 불현듯한 자각이 있었다. 내가 <<파국의 시대에>>라는 책을 적고 있을 때 했듯이,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그것의 몇몇 대표자들은 해결책(이른바 녹색 자본주의)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가 근본적으로 무책임하다는 점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와 그것의 동맹자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수행했어야 할 역할을 거부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단호한 부정과 더불어 그들이 취한 것은 직접 대결의 행로였다. "지구를 뚫어라."

 

오늘날 그 문제를 부인하는 거대한 운동은 약간 주춤해졌지만, 두 번째 단계가 준비되고 있다. 새로운 의견들이 표명되고 있는데,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폭발해버린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지구공학인데, 그것은 온도 상승 없이 계속해서 채굴하고 연소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증할 것이다....

 

지구공학은 하나의 꿈 또는 마법사의 도제의 악몽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지구공학의 유효성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만들어낼 개연성이 높은 파국들과 관련된 본원적인 불확실성도 자본주의적 기계를 망설이게 하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망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기계는 모든 상황을 수익의 원천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허구의 국면에 처해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머지않아 이 허구가 유일한 "논리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어 시행되고자 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사실상 지구공학은 자신들이 획득한 무책임성의 권리에 대한 어떤 이의 제기도 거부하는 사람들의 요구 사항들을 존중하며, 그리고 기술산업적 자본주의의 경로가 실행 가능한 유일한 것이라는 점을 확증하기 때문에 논리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공적 자금의 동원 가능성―그런데 명백히 개인들에게 엄청난 돈벌이가 된다―을 함축하는데, 여기서 아메리카 합중국의 전쟁 활동의 사례가 적실해진다. 이 해결책은 부가적 이점이 있는데, 그 이점은 그것이 언제나 작동해야 한다면, 지구 온난화에 맞서는 전쟁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류 전체가 볼모로 잡힐 것인데, 구원자로서, 영원히 멀리 격리시켜야 할 무적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자로서 나타날 주인들에게 봉사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옥 같은 양자택일"이 행성적 규모에서 고안될 것인데, 우리, 즉 여러분의 구세주들이냐, 아니면 세계의 종말이냐.

 

오늘날 우리 상황을 특징짓기 위해 새로운 낱말이 고안되었는데, 우리 시대는 인류세의 시대일 것이다. 이 낱말의 성공이 첫 번째 단계―부인의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인간이 자신의 활동이 지질학의 전지구적 규모에서 지구를 변형시키고, 그래서 지구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는 새로운 거대 서사의 단계―로의 전환을 시사하지 않는지 자문하기 위해서는, 학술 세계(단기간에 인류세에 관한 수많은 학술회의와 출판물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에 못지 않게 매체에서도 그렇듯이, 편집증적일 필요는 없다. 물론 이 낱말을 채택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선의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곤혹스러운 추상물이다. "불행하게도 필요하게" 될 모든 기술과학적 자원과 더불어 이 인간이 "행성을 구하기 위해" 동원되도록 요청될 순간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파국의 시대에>>라는 책은 예언서도 아니고 생존 지침서도 아니다. 자본주의가 갖추고 있는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것(그리고 이 경우에 몇몇 사람들이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것은 대단히 짧은 지질학적 시대일 것이다)이라는 일말의 보증도 없다. 또한 우리는, 최선의 경우에, 그것이 우리에게 남기게 될 폐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알지 못하는데, 이론적으로는 취해야 할 조치들이 꽤 명료했던 기회의 창이 닫히는 과정 중에 있다. 내가 그랬듯이, 우리는 필요한 것으로 규정되는 해결책들을 작동시킬 준비가 이전보다 더 엉망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쓰기 위해서 예언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경종을 울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사람들―특히 과학자들―은 정치적 권력자들이 자본주의에 키를 막 넘겨주었었고 어떤 행동의 자유도 엄숙하게 포기했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가지는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문명이라고 부른 것의 죽음에 관한 문제일지라도, 죽음의 방식은 많이 있는데, 어떤 방식들은 다른 방식들보다 더 추하다. 나는 인간의 기억 속에서 가장 증오받을 세대,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너무나 적게 한(전구 교체하기, 쓰레기를 분류하기, 자전거를 타기...) 세대에 속한다. 그런데 또한 내 세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세대인데, 우리는 이미 죽고 없을 것이다. 내 세대는, 삼십 년 전에, 결합했었더라면 효과적인 투쟁 문화의 발달에 필요한 정치적 지성을 창조할 수 있었을 두 운동―자연 파괴를 비난한 사람들과 인간 착취와 싸운 사람들―의 만남이 실패하는 데 참여했거나, 또는 그 실패를 무기력하게 목격한 세대라는 것을 덧붙일 것이다. 사실상 대규모의 환경 운동들이 "녹색" 자본주의의 약속들을 추종한 방식은 의심들 가운데 가장 음울한 것을 소급적으로 확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소급적 정당화는 놓쳐버린 기회에 대한 기억, 자본주의적 사이렌들이 어김없이 이용한 맹목적인 분열에 대한 기억을 소거하지 말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기회에서 수익을 얻는 방식을 알고 있다.

 

<<파국적 시대에>>라는 책을 쓸 때 내가 두려워한 것은, 기후 변화의 위협이 모든 선의의 사람들 사이에서 필요한 화해의 일부로서 비생산적인 갈등에 맞서 동원되는 논증일 수 있다고 분명히 이해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부인 형태였다. 기후 변화의 위험에 직면하여 "사회적 평화"가 강요될 수 있었고, 그래서 질책하는 관료주의적 도덕주의가 실행될 수 있었다. 실업자들도 자신의 탄소 발자국을 줄이게 되어야 한다는 말을 이미 듣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기후에 대한 "체계적" 제약을 합의를 거쳐 평화롭게 개작하는 행위자로서 지속 가능한 새로운 고용을 창출한다는 이른바 녹색 자본주의의 동화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동화를 비난하기 위해 기후 변화의 위협을 부인하는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은 국가들이 미래의 통제권을 전적으로 불투명하게 넘겨준 약탈적 자본주의라는 깨어 있는 악몽인데, 국가들은 "그들의"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유사도덕적인 명령의 부담을 국민들에게 전가하고 약탈을 제한하고자 하는 가장 사소한 조치에 대응하여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심판의 장 앞에서 서로 공격한다. 요약하면, 슈퍼리치 계급의 과두지배 체제가 세계를 자체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만드는 권력을 획득했다는 것은 더욱더 노골적으로 명백하다. 오늘날 많은 생태적 활동가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의 강경파만큼이나 급진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지만 인류세의 신기루에 완전히 부합되는 개념적 거대 서사들에 대한 집착이 집요하듯이, 낡은 의심들은 집요하다(알랭 바디우의 경우에, 생태는 인민들의 새로운 아편인데, "인류는 자체의 동물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동물 종, 자체를 탈자연화하려는 자연적 집합이라는 점은 분명히 단언되어야 한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재가열된 낡은 증오가 새로운 세대, 즉 진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되어 버린 삶과 협동 방식들의 가능성들로 실험하고 있는 모든 사람―흔히 동일한―들과 성장 및 경쟁이라는 정언 명령들의 시종이 되어버린 국가 합리성을 현장에서 직면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세대를 중독시키기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오늘날 중요한 문제이다.

 

이 책이 겨냥하는 대상은 오늘날 투쟁하고 실험하고 있는 모든 사람, 즉 전통적 역할을 포기해 버리고 이제 우리 모두를 의문시하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이 "자연", "가이아의 침입"이라고 내가 감히 부른 것과 참으로 동시대적인 모든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우리가 그들에게 물려준 독약, 우리의 맹목성에 기여한 거대 서사들에 그들이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양태로 이 문제를 표명하는 것이 이 책의 유일한 야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