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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리보위츠: 오늘의 에세이-공유재의 비극, 교황 그리고 체계

 

공유재의 비극, 교황 그리고 체계

The tragedy of the commons, the Pope, and the system

 

마이클 리보위츠(Michael A. Lebowitz)

 

공유 재산은 필연적으로 자원의 고갈을 초래한다는 오래된 주장이 존재한다.

 

"공유재의 비극"이라는 우화에서는, 사유 재산이 부재하다면, 모든 사람이 공동의 풀밭에서 아무 제한 없이 자기가 소유한 동물들을 방목할 동기를 갖게 되어 결과적으로 과도한 방목이 토지를 파괴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개별 공동체들이 항상 자체의 공유 재산을 관리할 방법들을 찾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계속해서 언급된다. 결국 한 가지 근본적인 교훈이 존재한다. 공유재의 비극은, 별개의 무관심한 이기적인 행위자들이 존재할 때, 공유재를 관리할 방법에 대해 공동체적 합의가 전혀 없을 때, 따라서 이기적인 행위자들이 공유재로부터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취하게 되는 특수한 유한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아무튼 기후 변화의 문제에 주목한 적이 있다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생각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발표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을 돌봄에 관하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듯이, "기후는 만인에게 속하며 만인에게 중요한 공동선"이고 "인간 생의 본질적 조건들 가운에 많은 것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조건들을 파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집, 지구는 더욱더 어마어마한 쓰레기 더미인 듯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고 그 회칙은 주장한다.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을 돌봄에 관하여"라는 회칙의 메시지는 단순한다. 지구는 우리의 공유재이고, 그것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지속가능성과 정의에 정합적인 방식으로 우리 공유재를 관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 회칙은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을 손상시키는 행위들을 명확히 서술한다. 오염, 유독성 쓰레기,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해양의 산성화, 삼림 파괴, 자연 자원 고갈, 가뭄 그리고 식량 및 물 부족 등. 우리는 어째서 지난 200년 동안 그랬듯이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을 그토록 손상시키고 학대했는가라고 그 회칙은 묻는다.

 

그 문제의 핵심에는 마몬―특히, 이윤 숭배―이 있다고 그 회칙은 제시한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계의 파괴를 "빠르고 용이한 이윤"에 대한 추구, "빈번하게 다른 고려들과 격리된 이윤 극대화의 원리", 일방적인 "금융 이득의 추구" 그리고 "실물 경제를 압도하는" 금융에 귀속시킨다. 따라서 그 회칙은 우리로 하여금 "문제들은 기업이나 개인들의 이윤 증가에 의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고 제시할 시장에 관한 마술적 관념을 거부하기"를 요청한다.

 

여기서 핵심어는 간단히라는 낱말이다. 결국 그 회칙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시각은 "이윤만이 중요하다"라는 초점의 일방성을 수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장 숭배(시장의 신성화)에 반대하는 주장을 전개하며, "가난과 싸우기, 배제된 사람들에게 품격을 회복시키기 그리고 동시에 자연을 보호하기에 대한 통합적 접근 방식"을 통해서 시장의 파괴적 효과를 견제하기 위한 책임 있는 국가 규제를 청원한다. 교황 회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단절하라는 요청, 문화적 혁명에 대한 요청, 사유화와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라는 요청이다.

 

그리고, 중요하게도, 그것은 전지구적 정의에 대한 청원이다. "지구는 본질적으로 만인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 공동 유산"이지만, 지구 인구의 대다수,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이 그런 혜택에서 배제되어 있고 더욱이 환경 파괴로부터 가장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그 문서는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중대한 사회적 채무"를 지고 있고, 그래서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그 회칙은 역설한다.

 

물론 세계의 소수가 지구의 한계 때문에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소비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그 채무를 갚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택권이 있는가?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지구 온난화를 생성하는 과정들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의 파괴를 막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파리에서 개최되는 기후 변화에 관한 당사국 총회 COP21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필수적인 주안점이다. 우리의 공유재들의 현재 및 미래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은 11월 29일에 세계 전역에서 시위를 벌일 것이다.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낼 것인가? 모든 징후들은 그런 회의들에서 비롯되는 어떤 장황한 말과 행위들도 필요한 조치들에 반드시 미치지 못할 것이다(과거에 그랬듯이).

 

이것에 대한 이유가 존재한다. 이윤에 대한 충동이 우리 세계(그리고 파리에서 회합하는 정부들)를 지배한다. 사실상 공유재의 비극은 우리의 유한한 세계가 이윤에 대한 가차없는 충동에 의해, 자본주의라고 거명해야 할 체계에 의해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계의 본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특별한 장벽, 특별한 규제와 제약을 도입하더라도 자본은 그런 장벽들을 극복할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한 이기적인 회사를 규제하면 다른 한 회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 지역에서 어떤 행위들을 규제하면 자본은 증식하기 위해 어딘가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문제의 근원 대신에 증상들을 다루는 한, 우리의 해결책들은 말기 질병에 붕대를 감는 것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문제의 근원은 인간과 자연이 자체적으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은 자체의 팽창 충동에 사로잡혀 부의 본래적 원천 두 가지를 모두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레 므아, 르 들뤼주(Apres moi, le deluge)[나 이후에야 어찌되든]가 그것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이한 메시지―우리는 다수이고 우리는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을 돌볼 만큼 충분히 강하다는 점을 예증함으로써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송신함으로써 대재앙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