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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오늘의 에세이-다른 하나의 비상 사태

 

다른 하나의 비상 사태

The Other State of Emergency

 

――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테러 행위와 관련하여 매우 낙담시키는 것은 무엇이 그런 활동을 고무했는지에 관한 우리의 논의가 테러 행위 자체만큼이나 비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식의 공격에 대해 우리는 거대한 전쟁 드라마, 즉 위기에 빠진 국민 그리고 잔인한 행위에 맞서 거병한다고 자처하는 보호자 국가를 재상연한다. 이것이 국가들이 행하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틀림없이 안전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고, 국가는 그것을 제공할 수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야기 끝.

 

그런데 현재 상황을 훨씬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11월 13일에 저질러진 범죄 행위가 상이한 종류의 비극들, SIS/다애쉬(Daech)와 아무 관계도 없는 전적으로 다른 위협들에 대해 매우 상이한 해결책들을 고안해야 할 비극들을 포함하는 다른 행사가 막 열리기 며칠 전에 일어나 버렸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파리에서 개최될 세계기후변화총회, COP21을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기관총을 가진 정신 이상자들의 유혈적 탈선 행위에 대한 경찰의 대응보다 덜 긴급한 것, 덜 심각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늘날 국가들에서 확연해지고 있는 위협들의 수준과 범위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해당한다. 무장한 광신자들은 틀림없이 범죄자들이지만, 그들은 우리가 살고, 생각하고, 생산하고, 학습하거나 공간에 거주하는 방식을 거의 위태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에 맞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해적들이 국제 무역의 가치들을 위태롭게 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이데올로기 속의 그 어떤 것도 우리가 가장 깊이 품고 있는 가치들을 위태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에 맞서 싸워야 하며, 그리고 그것이 그것과 관련된 전부이다. 이 싸움은 어떤 정치적 메시지나 심지어 어떤 전술적 독창성도,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어떤 종류의 영성적 교훈도 전혀 산출하지 못한다. ISIS/다애쉬 지배 하에서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과학자, 시민 또는 예술가를 거명하라. 판사, 어머니, 음악가 또는 운동 선수를 거명하라. 심지어 나는 덧붙일 것이다. 신앙인을 거명하라. 이 상황은 내부에서 분리되었던 과거의 내전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이런 종류의 살인자의 행위는 모든 애국적 선동과 동원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아니라 법과 질서의 문제이다.

 

기후 변화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매우 다르다. 지구 온난화는 산업적 생산, 사업 그리고 주거에서 문화와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식으로 모든 국가를 위협한다. 그것은 가장 깊은 층위에서 우리의 가치들을 위태롭게 한다. 이 지점이 국가들이 실제로 교전하고 있는 곳인데, 문화의 연성 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시장 점유율과 경제 발전을 위해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우리 자신들에 맞서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 느낀다. 사실상 "문명의 충돌"이 존재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우리 각자와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국가 정부들이 테러 위협에 직면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찰로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시민 사회 전체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하고 정치적 기구들로 하여금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압박해야 한다.

 

아무리 필요할지라도 반테러 조치들이 프랑스 국가로 하여금 COP21을 일종의 바그다드 안전 지대로 변모된 르부르제의 요새화된 캠프 내에서 관료와 전문가들 사이에 주고받는 외교적 논의에 한정하도록 요구하게 만든다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해질 것인지 우리는 살펴보고 있다. 이것이 전체 기후 쟁점이 지금까지 결여하고 있는 문명적 차원을 마침내 띠게 된 직후에 일어나야 했다는 것은 얼마나 얄궂은 일인가?

 

이런 이유 때문에, 새로운 안전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걸려 있는 몫이 엄청난 시민 사회가 자체의 견해들을 평화롭게 표현할 기회를 얻도록 압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ISIS/다애쉬를 근절하는 것은 장기적인 문제이지만, 사형 선고는 이미 내려졌다. 테러는 지속될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어제의 싸움으로서 아무것도 새롭지 않으며 또 하나의 자살 벨트가 부가될 뿐이다. 반면에, "기후 변화"라는 술어에 함축된 위협은 내일의 난제이고, 경찰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쟁점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에 의존한다. 테러 문제는 다루고 기후 변화 문제는 무시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

 

사실상―그리고 이것은 전혀 놀랍지 않아야 한다―그 두 난제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중동의 기후 변화와 시리아의 위기 사이에 맺어진 빈약한, 또는 최소한 너무나 간접적인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나는 테러 행위자들에 의해, 고국의 전면적인 파괴에 의해 쫓겨난 난민들의 공포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대응한 방식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자살 폭탄 테러 행위자들이 현재의 현세적 실존보다 죽음과 내세를 선호하게 만드는 가증스러운 견인력을 언급하고 있다. 확실히 이런 종류의 자기 파괴에 대한 후보자들은 매우 단순한 형태의 허무주의를 드러내지만, 아무리 어리석고 잔인하기 짝이 없을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끊임없이 팽창하는 근대화의 발전 모형이 지금까지 산출한 우리의 집단적 자살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11월 13일의 사태는 파리 총회와 향후 다른 총회들의 실패에 이어질 파국의 전조이다. 여러분이 올바르게도 허무주의라는 낱말을 이런 강경파 광인들을 서술하는 데 사용한다면, 내게는 그 낱말이 자신의 자살 충동을 뒤틀린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더 광범위한 의미들을 함축한 채, 적용되는 듯 보인다. 살해 행위 중에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들과 꼭 마찬가지로, 전지구적 기후 변화라는 쟁점을 가장 진지하게 떠맡지 못하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테러 행위자들과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죽음이여 영원하라!

 

한정된 시간과 장소 내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데 열중하는 자들을 정확히 찾아내어 파괴함으로써 장기간에 걸쳐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모든 형태의 생명을 휩쓸어 버리며 어마어마한 대규모로 살해할 자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또 다시 연기하게 된다면 정말로 비극적일 것이다. 잘 조정된 비상 사태가 안전한 거리 시위를 고려하는 것이 합법적일지라도, 현재의 권력은 다른 한 비상 사태, 이번에는 극도의 비상 사태를 선언할 수 있으며, 시민들에게 더 큰 적을 식별하여 맞붙어 싸울 방법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구 온난화의 원인과 처방들을 둘러싸고 끝없이 논쟁하면서 국가, 영토 그리고 민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대단히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전쟁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정부만으로는 무력한데, 이런 노력에 있어서 모든 시민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부는, 시위를 통해서 선출된 공직자들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시민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마침 이것은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나시옹 광장까지 이어지는 또 하나의 행진보다 더 혁신적인 시위들을 발명할 기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