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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학제성: 개념적 지리

 

학제성: 개념적 지리

Interdisciplinarity: Conceptual Geographie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학술적(더 나은 낱말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블로그 활동은 탈영토화의 모험이다. 학술적 분과학문은 체계라고 가정하자. 루만의 경우에, (결코 이상적이지 않은) 도표에서 묘사되듯이, 체계는 자체를 환경과 구별지음으로써 자체를 구성한다.

 

체계와 환경 사이의 구별짓기는 그것이 체계의 일방에서만 일어나는 활동(이 구별짓기는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시간성, 즉 시간의 질서 속에서 매 순간 자체를 재생산하여야 하는 진행 중인 과정이다)이라는 의미에서 자기준거적인 것이다.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자체를 구별짓고 외부와 내부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체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환경의 경우에는 이런 구별짓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루만이 "환경"이라는 술어를 모호하게 사용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자체적으로 현존하는 환경이 있다. 이 환경은 들뢰즈가 가타리가 "리토르넬로에 대해"라는 장에서 카오스 또는 "모든 환경들의 환경"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것을 관찰하고자 하는 어떤 체계들의 존재 유무에 무관하게 그 환경은 존재할 것이다. 루만에 따르면, 관찰은 체계가 행하는 것일 뿐이다. 체계는 자체의 환경 내에서(타자준거) 그리고 자체 내에서(자기준거) 일어나거나 전개되는 사건들을 관찰한다. 다른 한편으로, 체계들에 의해 구성되는 환경들이 있다. 이것들은 어떤 체계가 개방되어 있는 타자준거적인 흐름 또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환경을 Ei와 Ec로 부를 수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독립적 환경"과 "구성된 환경"을 가리킨다.

 

독립적 환경(Ei)은 항상 체계보다 더 복잡하다. 달리 서술하면, 체계와 독립적 환경(Ei)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 관계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루만이 기호학적 관념론과 언어학적 관념론을 넘어서는 실제적 진보를 이룬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관념론들은 어떤 외부도 인식하지 못하는 일종의 기호와 기표의 제국주의에 경사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루만의 사상은 결코 완전히 장악될 수 없는 극도로 혼돈스러운 외부의 현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체계와 Ei 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면, 이것은 환경은 극도로 복잡하고 체계는 실시간(또는 어쨌든 체계의 시간)으로 조작과 관찰에 관여할 수 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체계는 선택하여 자체의 환경에 대한 선택적 관계들을 확립해야 한다. 체계는 자체의 환경에 대해 언제나 선택적으로 개방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체계는 필연적으로 위험에 노출되는데, 왜냐하면 체계가 확립한 개방성의 채널이 매우 중요한 것을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체계가 진화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체계를 파괴의 가능성에 노출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우연적인 뜻밖의 위험이다(체계의 개방성은 시간적으로 한정된 복잡성이다).

 

우연적인 것들에 대한 체계의 진화에 관하여 우리는 흑사병이라는 우연적 사건에 대응하면서 기독교(종교적 체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신학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이 사건은 신으로부터의 신호 또는 메시지로, 즉 신의 의지와 불만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흑사병이 발생하지 않았었더라면,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도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리와 세계관에 내재적인 의미들의 체계도 이 사건의 결과로서 재조정되었다. 예를 들면, 이 사건 이후에 참회와 원죄성이라는 관념이 초기 기독교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학술적 분과학문은 소통의 체계라고 가정하자. 각 분과학문은 분과학문으로서 자체를 어떤 환경으로부터 구별짓고 자체의 대상(들)로서의 환경(Ec)을 구성한다. 어떤 체계가 자체의 환경(Ec)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구별짓기를 행해야 한다. 초혼돈(hyper-chaos) 또는 Ei, 즉 모든 환경들의 환경은 관측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루만과 스펜서-브라운(Spencer-Brown)이 주장하듯이, 도대체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공간이 둘로 쪼개져서 현상이 관측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분과학문은 그것이 탐구하는 현상들을 드러내는 토대적 구별짓기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경제학은 "경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현상들의 유표 상태를 만들어내는 구별짓기를 행한다. 어떤 공간이 카오스모스의 나머지로부터 절단되고, 그 공간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분과학문의 객체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예술가 말레비치(Malevich)와 유사한 방식으로, 모든 분과학문은 틀지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틀 속에서 나타나는 것에 선행하는 틀이 존재하고, 그것이 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이다(여기서 데리다의 '파레르곤(Parergon)'이라는 에세이―"구별짓기에 관하여" 또는 "틀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붙일 수 있는―는 미학의 바깥에서도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모든 분과학문은 영토적이고 지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영토는 구별짓기, 즉 경계 설정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구별짓기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에서 외부에 대한 일종의 물리치기 또는 구축 작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분과학문의 영토는 그것의 토대적 구별짓기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분과학문의 지리는 그 분과학문의 객체의 "짜임새"이다. 분과학문의 객체, 그것의 지리는 구별짓기의 유표 공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지리는 자체의 짜임새, 특이성, 특징을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문학 연구는 자체의 지리로서 문학적 객체를 갖고 있고, 그래서 민족지학적 객체, 생물학적 객체, 수사학적 객체, 경제적 객체, 화학적 객체, 철학적 객체 등으로부터 문학적 객체를 구별짓는 일단의 구별짓기들(모든 분과학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흐릿한)을 전제로 한다. 문학적 객체의 짜임새는 담론의 객체로서의 문학에 고유한 모든 특징 또는 특이성들에 놓여 있다.

 

분과학문의 경계가 유지되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체계 또는 분과학문의 주체가 존재한다. 모든 분과학문의 내부에서는 분과학문의 영토성 또는 구별짓기들에 의거하여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주체, 행위자의 형성이 이루어진다. 요약하면, 분과학문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주체화의 과정이 존재한다. 이 과정은 대학원 교육을 통해서 일어난다. 대학원 교육은, 무엇보다도, 분과학문의 영토와 지리에 거주하게 할 선험적 감각, 감성 또는 수용성의 장의 형성이다. 그 다음에 분과학문의 저널, 출판사 그리고 학술회의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체계의 주체들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분과학문들의 영토들과 구분되는 구별짓기들의 내부성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경계 유지 체제이다. 분과학문의 주체는 지구 전역의 동료 주체들과 이야기하거나 소통하게 된다. 물론, 각 분과학문 역시 하위 분과학문, 전문화 그리고 학파들에 의해 규정되는 영토와 지리를 갖추고 있는 하위 체계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하위 분과학문들은 각각 독자적인 체계/환경 구별짓기와 토대적 구별짓기들을 전제로 한다.

 

구별짓기의 한 가지 흥미로운 특징은 그것이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모든 구별짓기는 자체의 무표 공간, 즉 영토와 지리를 정초하기 위해 배제해 버림으로써 체계가 볼 수 없게 되는 것의 공간이 있다. 예를 들면, 경제학은 자체의 객체를 구성하기 위해 구별짓기를 행하면서 사회학과 수사학(그리고 여타의 모든 것)을 자체의 무표 공간에 위치시킨다. 결과적으로, 수사학적 및 사회학적 현상들은 관찰될 수 없게 된다. 이 영토에 대해서는 이런 현상들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구별짓기 자체도 체계에게 보이지 않고, 그래서 영토 내에서 실재 효과를 만들어낸다. 체계는 토대적 구별짓기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구별짓기를 행함으로써 그것이 행한 구별짓기들을 성찰적으로 관찰할 수 있거나, 아니면 자체의 구별짓기들을 활용하여 지시하거나 관측하는 등의 조작을 수행할 수 있지만, 둘 다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 구별짓기를 활용하여 조작할 때 그 구별짓기는 보이지 않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로 하여금 지시나 관찰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우리의 구별짓기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애초에 이런 객체들을 드러낸 것은 구별짓기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이것들이 세계 속에서 현시되는 객체들이라는 점이 자명한 것처럼, 우리가 순수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찰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영원히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담론이 상대 대화자의 경우와 동일하지 않는 사전(선험적인 것으로서의) 구별짓기들에 정초하고 있는 방식을 깨닫지 못한다.

 

사족: 앞서 상술한 것은 대부분의 사회과학들의 실증주의가 최악의 시기에 매우 문제적인 까닭을 설명한다. 이런 사회과학들은 "데이터" 수집 및 데이터는 "스스로 말한다"는 테제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놓치고 있는 것은, 1) 어떤 데이터가 관찰되거나 수집되어야 하고, 2)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선택하는 사전 구별짓기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런 구별짓기는 데이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에 선행하는데, 간헐적으로 그런 구별짓기가 데이터에 의해 교란되거나 자극받을 수 있더라도 말이다. 관찰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구별짓기들에 대한 성찰적 개입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순수한" 관찰 형식은 "전(前)비판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차적 관찰 또는 관찰에 대한 관찰(구별짓기의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구별짓기는 더욱더 전제적인 것이 된다. 사실상 흔히 관찰은 담론 공동체을 괴롭히는 무의식적인 가정과 편견들을 확증하는 것이 된다.

 

영토에 서식하는 맹점들의 결과는 분과학문적 단견이다. 체계는 (자체의 구별짓기들의 결과로서) 그것이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볼 수 없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분과학문적 제국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모든 분과학문은 자체의 영토를 확장하여 그것을 환경들의 환경, 초혼돈, 즉 독립적 환경 Ei를 포착하거나 파악하는 것으로 간주할 위험을 겪는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이 경제적인 것 또는 기호 또는 수사학적인 것 또는 생물학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구별짓기들에 의해 구성된 맹점들을 식별하지 못한다(사람들은 Ec를 파악함에 있어서 그것들로 조작하는 데 너무 바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렇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 체계 또는 영토의 나머지 주체들에게 말할 뿐이고, 그래서 다른 영토들의 주체들에게 말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철학자는 수학자가 말하는 모든 것을 철학적으로 다룬다). 우리의 조작 수단인 구별짓기들의 결과로서 우리는 자신이 들을 수 있는 것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타자들의 모든 진술도 자기 영토의 틀 내에서 읽으며 듣게 된다.

 

물론, 결코 아무도 자기 영토를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극단적인 견지에서 말하고 있지만,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분과학문적 영토(Ec)가 전체 세계(Ei)가 되는 많은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영토 내부의 저널들을 읽을 뿐이고 자신의 개념적 지리 내부의 학술회의들에 참여할 뿐이다. 이것이 블로그 활동의 트라우마(그리고 어떤 면에서 모든 글쓰기 또는 기입의 트라우마)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기입의 운명은 탈영토화이다. 기입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토대적 기입 순간으로부터 탈영토화될 뿐 아니라, 그것의 기입 환경과 기입 영토로부터도 탈영토화된다. 기입된 것은 영토를 벗어나서 세계에 유포될 수 있고, 영토에서 영토로 전달될 수 있으며, 그래서 다른 영토들의 주체들을 만날 수 있는 역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글쓰기는 내재성의 평면에서 그럴지라도 다이몬적이거나 천사적인 것이다. 다이몬과 천사 들은 천상과 지상 사이의 매개자들이다. 그들은 두 영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중간자적 존재자들이다. 이것이 글쓰기 그리고 특히 블로그 활동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영토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영토들을 관통하면서 모든 코드 또는 구별짓기를 마구 뒤섞고, 통과 공간 속 다른 영토들의 시민들을 만나게 됨으로써 스스로 구성한 무표 공간 또는 맹점들을 영구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것의 꼬리 끝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철학자인지, 수사학자인지, 매체 이론가인지, 정치 이론가인지, 사회학자인지, 아니면 다른 주체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런 낯선 만남들의 결과로서 구별짓기들이 접촉 감염처럼 내면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론에 있어서 기민하고 유동적인 사람이 되어서 구별짓기들의 장을 변화시키고 시각들을 끝없이 증식시킨다. 사실상 이것에 대한 물질적 조건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다이몬되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기입 자체의 특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