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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라지: 오늘의 강연-포퍼와 반증

 

포퍼와 반증 - 강연 4

Popper and Falsification - Lecture 4

 

―― 윌리엄 라지(William Large)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학을 여타의 담론과 구분할 수 있게 할 어떤 기준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과학을 종교와 대립적인 것으로서의 과학으로 만드는가? 과학의 방법에 고유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응은, 과학은 (어떤 식으로 저쪽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다루고 종교는 주관적인 믿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과학은 참이고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단순한 규정을 살펴보았을 때, 그것은 덜 확실하고 명료한 듯 보였다. 왜냐하면 과학은 나중에 이론들로 변환되는 사실들에 대한 많은 관측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념은 귀납의 문제―가장 간결한 형식으로 특수한 판단에서 보편적 판단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하다―에서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당한 논리적 기교도 특수자에서 보편자로 데려다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과학은 종교보다 더 객관적이지 않으며, 이론은 여느 신앙과 마찬가지로 믿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게다가, 귀납주의적 과학상이 결코 정확하지 않다는 점도 분명했는데, 왜냐하면 사실들은 우리가 수집한 다음에 어떤 보편적 법칙을 구성하게 되는 공통 특징들을 인식하도록 세계 전체에 걸쳐 흩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이미 선재하는 이론으로 사실들에 접근하는데, 그 이론이 적절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우리가 간주하는 사실(또는 심지어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실)들을 결정한다. 래디먼(Ladyman)이 설명했듯이, 뉴턴은 케플러의 데이터에서 중력 법칙을 찾아내지 않았는데, 그 데이터를 해석하기 위해 그는 이미 그 법칙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이론과 사실 사이의 관계의 이런 역전, 즉 이론이 먼저이고 사실이 나중이라는 점이 우리가 살펴볼 그 다음 과학철학, 즉 포퍼의 반증 이론의 기반이며, 그것은 사실상 '귀납주의'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에서 비롯되었다. 포퍼의 주장은, 과학의 기반으로서의 귀납은 포기해야 하지만, 그런 거부가 비합리주의를 낳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는 귀납을 연역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첫 번째 강연에서 연역은 동어반복에 불과하지 때문에 과학의 기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연역적 논리는 세계에 관한 새로운 것을 전혀 말해주지 않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분석할 뿐인 반면에, 과학은 자연에 관하여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실제로 말해준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가 특수자에서 보편자로 이행하기만 한다면 연역은 과학의 기반으로서 작동하지 않지만, 역으로 보편자에서 특수자로 이행한다면 연역이 작동한다. 사실상 보편자에서 특수자로의 이런 이행이 바로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포퍼는 주장한다. 우리는 사실들에서 출발한 다음에 법칙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들에서 출발한 다음에 그것들을 사실들로 시험하려고 시도한다. 논리적 핵심은, 관측 자체가 참일지라도 우리는 관측에서 이론으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는 이론에서 그 이론이 거짓인지를 보여주는 관측적 진술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머스의 사례를 활용하면, 오늘 강의실 밖에서 누군가가 하얀 까마귀를 보게 된다면, 이것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을 연역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그런 연역적 논증은 후건 부정의 형식(modus tollens)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P라면, Q일 때, ¬Q라면, 당연히¬ P이다라는 형식을 취한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이 바로 일어나는 일인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중력이 빛을 휘게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에딩턴의 증명을 고찰하자. 그 이론이 옳았다면, 태양 너머에 존재한 항성은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도록 관찰자의 방향으로부터 변위되어야 했었다. 일반적으로 햇빛 때문에 이 항성은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햇빛이 차단되면 보일 것이다. 에딩턴은 1919년에 일어난 일식으로 바로 그런 변위를 측정해내었다. 포퍼의 경우에,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에딩턴이 달리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 변위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반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종교 또는 여타의 담론과 과학 사이의 진짜 차이는 제시되는 이론 또는 가설들이 아니라, 그것들이 시험되는 방식이다. 과학은 인간의 여느 담론만큼이나 창의적이고 이런 창의성의 기원은 어떤 논리적 설명도 벗어난다고 포퍼는 단언한다. 누군가가 그런 시기에 그런 관념을 고안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릴레오나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그들의 관념들을 고안했는지, 그리고 왜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엇이 이런 창안물들을 과학적인 것으로 만드는지는 알고 있는데, 여타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것들은 반증될 수 있다는 점이다(이것이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의 차이점이다). 반면에, 종교를 논리적으로 반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듯 보인다. 언제나 나는 무언가를 믿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학에서 고전적인 악의 문제를 고려하자. 나는 어떻게 세계 속의 악으로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가? 라이프니츠가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선의 것'이라고 주장했듯이, 그런 이유를 찾아내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간들의 이해 부족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퍼의 생에 관한 이야기를 약간 알 필요가 있다. 젊었을 때 포퍼는 공산주의자였고, 그래서 물론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으로 간주되었다. 어느날 그는 친구들과 함께 행진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은 경찰의 공격을 받게 되어 그들 가운데 일부가 살해당했다고 포퍼는 말한다. 포퍼는 이 사건으로 매우 동요되어 자신의 정치적 지도자들에게 말해야 했었다. 그들은 포퍼에게 이런 죽음은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설명되었듯이 노동자들의 정치적 해방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무엇이 마르크스주의를 반증할 것인가?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그의 친구들의 죽음을 비롯하여 어떤 사례도 반증할 수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과 사이비과학(종교는 그것이 과학적 의문들에 대답하고 있다고 자처할 때에 사이비과학일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종교는 포퍼에게 전적으로 유의미하다) 사이의 차이이다. 사이비과학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고 결코 참이 아닐 수가 없는 반면에, 과학은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는 않고 언제나 거짓일 수 있다. 포퍼의 술어를 사용하면, 경험 과학을 여타의 것과 구획짓는 것은 바로 이것이고, 그것은 논리적 형식이라기보다는 방법의 문제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진술과 실재의 양태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실증주의적 강박이다. 형이상학과 종교는 그것들이 과학이라고 억지로 자처할 때에 사이비과학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과 관련하여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 [...]

 

어떤 과학적 이론을 과학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반증이라면, 정확히 무엇이 반증을 실행하는가? 어떤 반증도 과학적일 수 있는가? 그런 광범위한 일반화는 옳은 듯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무언가를 반증한다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과학적 이론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창세기를 인용함으로써 물리학을 반증할 수 있을 것이지만, 아무도 내가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해답은 간주체적 시험 가능성(intersubjective testability)이다. 창세기에 서술되어 있는 방식으로 신이 우주를 창조했었다고 주장한 물리학에 대한 나의 반증을 시험할 실험을 구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아무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해 제시된 예측을 통해서 뉴턴 과학의 반증을 시험하는 것―그것이 바로 에딩턴의 사례가 입증한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상상할 수 있으며, 원칙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간에, 다른 과학자들도 그런 실험을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반증이 이루어질 때마다 이론은 그저 임시방편적 수정을 덧붙임으로써 항상 안전하게 될 수 있는가? 예컨대, 차머스의 사례를 활용하면, 모든 빵은 몸에 좋다라는 일반화가 빵을 먹은 프랑스 마을의 주민들이 죽음으로써 반증된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마을의 이 주민들이 먹을 때를 제외하고 모든 빵은 몸에 좋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이론을 수정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무엇이든 반증이 발견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작업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임시방편적인 수정은 과학적 발견에 있어서 어떤 진보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임시방편적 수정과 진정하지 않은 임시방편적 수정를 구별지을 수 있는가? 이 사례에서 수정은 반증될 수 없고, 그래서 그것은 세계에 관한 새로운 것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상 수정된 이론은 모든 빵은 몸에 좋다라는 원래 이론보다 더 적게 말해준다. 그래서 진정한 수정도 역시 반증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대신에 맥각균(Claviceps purpurea)으로 불리는 어떤 곰팡이에 감염될 때를 제외하고 모든 빵은 몸에 좋다라고 말했었더라면, 이것은 진정한 임시방편적 수정이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시험되어 반증될 수 있고, 그래서 세계에 관한 새로운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학적 이론의 진정한 임시방편적 수정과 진정하지 않은 임시방편적 수정 사이의 이런 구별짓기는 이론의 반증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시방편적 수정이 어떤 이론을 부인하기보다는 확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왕성의 발견 사례를 생각하자. 천왕성 궤도의 불규칙성은 관찰된 적이 없었던 다른 한 행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예측했다. 과학자들은 뉴턴의 이론을 거부하기보다는 그것을 설명할 행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1846년에 해왕성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뉴턴의 이론을 반증하기보다는 확증했다. 우리는 과학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뉴턴주의를 거쳐 아인슈타인주의로 이어지듯이, 이론을 교체시키는 일련의 반증들일 뿐이라고 간주하기보다는 대담한 추측들에 대한 확증과 조심스러운 추측들에 대한 반증으로 간주해야 해야 한다. 우주는 걸쭉한 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같은 추측들을 반증하거나 조심스러운 추측을 확증하면 과학에 무슨 차이를 가져다 주겠는가? 그런데 대담한 추측을 만들어내는 것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배경 이론들 자체임에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배경 이론들과 비교하여 무엇이 대담할 것인지 아니면 소심한 것일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경 지식은 조심스러운 추측이고(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것), 대범한 추측은 모든 사람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 공공연히 맞선다. 여기서 우리는 반증주의자와 귀납주의자 사이의 근본적인 실제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반증주의자는 과학의 역사를 진지하게 여기며, 귀납주의자는 과학의 역사에 관한 어떤 관념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배경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들은 도대체 아무 맥락도 없고 과학은 영원한 현재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축적된다.

 

그렇다면 반증은 비판에 끄덕하지 않는가? 대답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여전히 이론과 관측에 대한 관계이다. 우리가 연역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O가 존재한다면, T의 허위성은 O가 주어지지 않을 때 당연히 도출된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증거 자체의 기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증거가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까마귀는 흰색이라고 말한 사람이 흰색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면 어쩔 것인가? 포토샵으로 흰색 까마귀의 사진이 만들어졌을 수 있더라도, 그런 증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포퍼는 증거의 올바름에 관해서 실증주의자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실제로 과학을 살펴보면, "모든 백조는 흰색이다'라는 형식을 띠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보편적 진술들의 복잡한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어떤 예측이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면, 그것이 말하는 것은 전제들 가운데 하나가 틀릴 수 있지만 어느 것인지 모른다거나 또는 심지어 우리 자신의 경험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퇴출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시험 상황' 자체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론을 반증할 수 있게 하는 전제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것이 뒤엠/콰인 테제이다). 예컨대 래디먼의 사례를 활용하면, 어떤 유성의 행로를 예측하고자 한다면, 중력 법칙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예측이 옳지 않다면 반증되고 있는 것이 중력 이론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분리가 가능할지라도, 반증은 실제로 과학은 무엇이고 과학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포착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과학의 역사을 살펴보면 거대한 추측이 교체되는 것을 찾아내지 못하며, 과학자들은 그들의 이론들이 반증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고수하거나, 또는 당시에 알려진 모든 증거가 애초에 때려눕혔음에도 새로운 가설을 채택한다. 파이어아벤트와 쿤이 서술하듯이,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의 궁극적인 전환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후자에 의한 전자의 단순한 반증이 아니다. 과학이 작동하는 까닭은 어느 정도는 과학자들이 독단적이고 반증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과학을 여타의 독단과 차별화하거나 구획짓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기준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