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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주름과 소용돌이에 관하여

 

주름과 소용돌이에 관하여

Of Folds and Vortice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텍스트의 시기와는 상이한 글쓰기의 시기가 존재한다. 텍스트는 하나의 사물이다. 텍스트는 세계 속에 놓여지게 되고, 일종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며, 독자적인 기계로서 세계 주위를 순환하는 하나의 기계이다. 뇌처럼 텍스트는 기묘한 시간성을 조직한다. 들뢰즈(Deleuze)에 의해 서술되는 대로의 크로노스(chronos)―여기서 시간은 순간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순간들이 나타나는 일련의 순간들이다―와 달리, 텍스트는 시간의 접힘과 층서화를 조직한다. 텍스트는 보존하고, 텍스트는 흔적을 새기며, 결과적으로 시간을 재구성한다. <<축음기, 영화, 타자기(Gramophone, Film, Typewriter)>>에서 키틀러(Kittler)는 이렇게 진술한다. "이름들이 우연적이지 않게도 글쓰기에서 비롯된 축음기와 영화에서 우리가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었다..."(3). 글쓰기를 통해서 이제 과거는 하나의 사진 영상이 다른 하나의 영상에 겹쳐지는 것처럼 현재에 존재하게 된다. 이제 시간의 이행은 더 이상 존재한 것의 점진적인 사라짐과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한 것이 면전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모든 저자가 이것, 즉 글로 쓰여진 것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기묘한 종류의 개체화를 경험할 것이다. 확실히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글로 쓰여진 것이 매우 흔히 죽음과 관련되었다. 저자는 일종의 걸어다니는 시체인데, 자신이 새긴 낱말 속에 갖혀 버리거나 물질화된 사유의 흘러가는 취지를 보존한 방식으로 말이다. 글쓰기는 활동, 즉 저자가 아직 생각하지 못한 사유의 펼침인 반면에, 글로 쓰여진 것은 물질로 타락하여 이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죽은 문자이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에 의해 개체화되어 버렸다. 저자는 항상 둘이다. 저자는 글쓰기이지만, 또한 저자 이후에 지속되는 글로 쓰여진 것이다. 저자는 글로 쓰여진 것에 대해 책임이 있지만, 또한 그렇지 않다. 저자가 자신이 쓴 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런 것들을 새겨서 세계 속에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이미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에서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고, 그래서 자신이 이것을 썼다는 것도 거의 회상할 수 없다. 끊임없이 저자는 이런 의문에 직면한다. "도대체 나는 내가 쓴 것과 동일할 것인가? 도대체 나는 또 다시 그렇게 잘 쓸 것인가?" 분리, 스팔퉁(spaltung), 글쓰기와 글로 쓰여진 것 앞에서 겁을 먹기 쉽고, 공포를 경험하기 쉽다. 자신이 썼다는 것을 망각한 채 자신의 글을 독자로서 마주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생산했지만 생산했다는 것을 회상하지 못하는 텍스트 앞에서 자신의 분리, 걸어다니는 시체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는 것은 얼마나 기묘한가? 글로 쓰여진 것의 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이다. 그것이 세계 속에 기록되는지, 그것이 존재할 것인지 여부를 알기 위해 기다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글을 쓰는 동안, 글로 쓰여진 것 이후에, 글로 쓰여진 것을 넘어서, 어딘가 다른 곳에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내 뒤에 남겨진 시체 앞에서 전율을 느끼며 나는 내 사유 속에서 존재의 최소 단위는 주름이라는 테제가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존재의 최소 단위는 사물이 아니라, 객체가 아니라, 쌍자(dyad), 즉 사물과 장 사이의 다이애드이다. 스스로 주름을 생각하게 허용함으로써 나는 내 자신인 이 다른 육체를 살해하는가? 주름을 새김으로써 나는 글로 쓰여진 육체 속에서 가장 또렷한 것을 살해하는가? 아니면 사물을 생각할 때 나는 언제나 존재론적 종이접기, 존재의 내재적인 종이접기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주름은 연속성에 관한 사유이다. 접힌 것, 즉 사물은 그것이 접히게 되는 장과 연속적이다. 객체지향 철학은 모든 관계의 독립성, 존재는 단위들로 구성된다는 이산적 관념을 주창하는 반면에, 주름 존재론(pli-tology)은 자체가 접히게 되는 장과 연속적이면서도 장과 구별되는 주름의 형성에 있어서 장의 내재화에 관해 말한다. 물론 접힘은 활동, 하나의 동사이다. 존재의 접힘은 완결되면 실현되는 존재 내에서 일어나는 것―잠재태와 현실태, 뒤나미스(Dunamis)와 에네르기아(energia) 사이의 일종의 변증법―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 또는 접힌 것과 장 또는 접히게 되는 것 사이에 영구적인 교환들이 존재하는 진행 중인 활동 또는 접힘의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접힌 것은 장에서 비롯되어 모든 종류의 복잡한 방식으로 장을 주름지게 하며,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방식으로 장을 수정하면서 장으로 복귀한다. 여기서 나는 급하게 쌍자론(dyadism)은 이원론이 아니라는 것을 덧붙인다. 이것, 즉 객체와 저것, 즉 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는 분할하기도 하고 통합하기도 하는 분리할 수 없는 결합, 차이의 접힘, 분화적 활동이 존재한다. 스테이시 알레이모(Stacy Alaimo)가 주장하듯이, 사물들은 초육체적인데, 일반화된 쌍자론에서 그것들은 서로 접혀서 서로 둘러싸게 된다.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면, 나는 "사물"이라는 낱말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 대신에 소용돌이에 관해 말하고 싶다. <<물리학의 탄생The Birth of Physics)>>이라는 훌륭한 책에서 세르(Serres)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소용돌이, 투르비용(Tourbillon)은....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사물 구성의 원시적 형식, 자연 일반의 원시적 형식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세계는 회전과 병진으로 이루어진 이런 열린 운동이다"(6). 사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모형은 바위도 되지 말아야 하고, 망치도 되지 말하야 하며, 오히려 소용돌이치는 물, 토네이도 그리고 허리케인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소용돌이가 되어야 한다. 도처에서 존재는 소용돌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도처에서 난류가 무성한 장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섬세하고 복잡한 비신학적 쟁점들을 만나게 되는데, 운동, 난류―이른바, 형태의 형성―은 외부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내에서 언제나 이미 내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존재, 우주는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 어떤 원동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처에서 난류의 흐름들이 존재한다. 때때로 그런 흐름들이 결합되어 소용돌이가 출현한다. 이런 소용돌이들은 이런 난류의 장들에서 비롯되고 이런 난류의 장들로부터 끊임없이 도출된다. 바위 같은 소용돌이도 난류가 지속되기를 요구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위는 그것을 초과하는 어떤 장의 주름이지만, 그럼에도 이 장(온도, 압력 등의 조건)과 구별된다. 바위가 자체가 성장하고 살아가는 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되면, 그것은 마치 아침 안개처럼 흩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용돌이는 진행 중인 과정으로서 어떤 난류 장의 특수한 조직이다. 회전 운동에 도달한 것은 난류이다. 그런데 회전 운동에 도달함에 있어서 소용돌이는 결코 자체로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소용돌이는 자체가 생성된 난류의 장으로 귀환한다. 이런 회전 운동의 결과로서 장은 재구성되고, 그래서 상이한 난류 형태들과 다른 소용돌이들을 생성시키는 환경이 창출된다. 글쓰기도 주름이고 소용돌이인데, 어떤 장에서 비롯되지만 자체 주변에 모든 종류의 난류를 창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