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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라지: 오늘의 강연-귀납의 문제

 

귀납의 문제

The Problem of Induction

 

―― 윌리엄 라지(William Large)

 

과학의 정당화는 일견 경험의 일반화인 듯 보인다. 나는 금속 x를 가열하고 그것이 팽창하는 것을 보며, 나는 금속 y를 가열하고 그것이 팽창하는 것을 보며, 나는 금속 z를 가열하고 그것이 팽창하는 것을 본다. 기타 등등. 그래서 내가 모든 금속은 가열될 때 팽창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듯 보인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것이 과학적 논증의 정체라고 생각하며, 또한 대부분은 이것이 객관성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들에 관하여 제기할 수 있는 두 가지 의문이 존재한다. 우선 그런 귀납적 방법은 정말로 지식을 산출하는가? 그리고 둘째,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과학 자체가 그것 자체의 역사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인가?

 

먼저 첫 번째 의문을 고려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더 전통적인 귀납의 문제이고, 그래서 흄의 논변에서 표준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귀납과 관련된 흄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의 인식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흄의 경우에는 두 가지 종류의 명제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관념들의 관계와 사실의 문제이다. 첫 번째 관계에서 우리 관념들의 진리는 우리 관념들에만 한정된다. 그러므로 '총각'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그것에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사실의 문제의 경우에는 우리 개념들을 넘어서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관념들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새로운 것을 말해준다. 사실의 문제는,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다, 또는 금속은 가열되면 팽창한다는 것일 것이다. 물론 관념을 알고 있다면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겠지만, 그 관념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

 

그릇된 사실의 문제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릇된 관념들의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래는 물고기라고 생각한다면, 관념들의 관계와 관련된 오류를 저지른 것이고, 서기전 399년에 플라톤이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사실들의 층위에서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관념들의 관계는 연역에 의해 참인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부정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관념들의 관계는 동어반복적이고, 그래서 피터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는 총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은 것과 총각이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실의 문제는 연역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뿐이고 모순은 오류가 아니다. 내가 에베레스트 산은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말한다면, 그 술어들 가운데 아무것도 서로 논리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그래서 더 높은 산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산이 가장 높은 산인지 알기 위해서 나는 지구의 상이한 높은 산들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흄은 무언가를 연역적으로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 관해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미 알려진 개념들(아무튼 그것들의 기원은 감각일 것이다) 사이의 논리적 관계들이다. 우리가 주장할 수 없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개념들을 검토함으로써 세계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산출한다는 것이다(흄의 견해에 따르면, 신학과 형이상학이 행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구별짓기는 매우 직접적인 듯 보이고, 일견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흄에게 문제는, 보편적 법칙으로서의 팽창하는 금속이라는 관념이 함축하듯이, 사실의 문제가 관념들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결론를 가질 수 있는지 여부이다. 흄의 경우에 이 문제에 대한 열쇠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특정한 종류라고 내가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지금까지 나는 매일 아침 해가 뜬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내가 아직 이 새벽을 실제로 겪지 않았을 때, 그것이 내게 태양이 내일도 뜰 것이라고 말할 권리를 부여하는가? 해가 떠오르면 나는 틀림없을 것이고, 그리고 과거에 의거하여 나는 해가 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나는 해가 내일도 떠오를 것이라고 알 수 있는가? 예상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해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한다.

 

흄의 경우에 귀납은 인과적 논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원인과 결과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 얻어질 뿐인데, 왜냐하면 어떤 인과적 관계가 왜 성립해야 하는지 아니면 성립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성냥이 불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 성냥이 논리적으로 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세계에 대한 실제 경험으로부터 세계의 미래 거동을 추론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경험으로부터 인과성이라는 범주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일반적인 것으로서의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할 것이다. 내가 새벽에 해가 뜬다는 것을 항상 경험한다면, 나는 이 사건들을 연합한다. B가 항상 A에 잇따라 일어나면, 나는 A가 B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미래가 항상 과거와 동일한 경로를 따른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A가 일어나면, 그 다음에 B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연합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근접성(contiguity)과 선행성(precedence)이다. 근접성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B가 A의 뒤를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선행성은 결과가 항상 원인 다음에 일어난다는 것이다(화염은 성냥이 켜지기 이전이 아니라 성냥이 켜진 이후에 일어난다). A가 B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거나, 또는 내일 해는 떠오를 것이라고 말할 좋은 이유가 있다고 우리가 느끼는 것은 바로 연합, 근접성 그리고 선행성 때문이다. 그렇지만 흄은, 내가 이 인과성이 설득력이 있다고 아무리 느끼더라도, 어떤 보편적 법칙의 일반화가 시사하듯이, 이것은 결코 필연적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장 기본적인 인과성의 관계인 듯 보이는 당구공 사례를 고찰하자. 당구공 X가 당구공 Y를 때려서 그것이 움직이게 만든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구공 X가 당구공 Y를 움직이게 만들거나, 또는 그것의 움직임을 산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 두 사건들, X 움직임과 Y 움직임 사이에 필연적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연합, 근접성 그리고 선행성이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불가사의한 '필연적 관련성'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당구공 X와 당구공 Y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어떤 다른 제3의 것이다(보이지 않는 관련성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인과성이다). 우리가 이런 불가상의한 원인을 덧붙일 수 있더라도, 그것이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무엇을 덧붙이는가? 당구공 X와 당구공 Y는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일 뿐이지 않겠는가?

 

흄에게 핵심은, 두 사건이 과거에 항상 연합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들이 항상 그럴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귀납 논증의 결론은 틀릴 수 있지만 그런 점이 결코 그것을 타당하지 않게 만들지는 않을 것인데(그 다음 날 해가 뜨지 않은 것처럼, 사실상 그것을 더 흥미롭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전제들이 참이면 결론이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연역 논증의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귀납적 일반화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자연이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질서가 잘 잡혀 있고, 여러 번 일어나는 일은 동일한 방식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는 믿음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왜 미래가 항상 과거와 동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논리적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물론 우리는 언제나 이런 종류의 추론들을 행하며, 흄도 그것을 수용한다. 잠들 때마다 내일 해가 뜨지 않을 것이라고 정말로 생각한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균일성은 이성이나 논리라기보다는 우리 심리(아마도 진화적 특질)의 결과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규칙성을 찾아내는데, 그것은 우리의 습관적인 사건들의 연합 때문인 것이지, 이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흄의 문제가 매우 심오하며 우리로 하여금 귀납을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과학 자체가 귀납주의가 함축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귀납적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방법론적 비판과 매우 다른 비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귀납의 방법을 탐구했는데, 흄이 말하듯이, 그것은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귀납에 대한 흄의 독자적인 설명이 귀납에 대한 올바른 서술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행하면서 방법에 대한 서술이 실제로 과학자들이 스스로 작업하는 방식인지 여부를 논쟁하고 있다. 하나는 과학적 지식의 내용에 대한 서술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과학자들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서술이다. 과학자들은 정말로 흄의 사례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활동하는가? 이것은 과학의 철학을 행하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선 과학을 수행하는 방법을 서술한 다음에 그것을 과학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자들이 행하는 것을 검토하여 그것으로부터 방법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이해하는 이런 방식은 쿤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왜 과학자들이 여태까지 귀납이 서술된 그런 방식으로 귀납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뉴턴의 <<프린키피아>> 사례를 고찰하자. 이 저작에서 뉴턴은 세 가지 운동 법칙과 중력의 법칙을 제시한다. 이런 법칙들로부터 행성 운동 같은 자연적 현상들이 설명된다. 뉴턴은 관찰로부터의 귀납을 통해서 이런 법칙들을 추론했다고 말한다. 뉴턴의 설명과 관련하여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프랑스 과학철학자 뒤엠(Duhem)이다. 뉴턴이 사용하고 있는 데이터는 케플러의 데이터이다. 그의 데이터는 행성이 원형 궤도로 움직일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반면에, 뉴턴의 데이터는 행성이 타원형 궤도로 움직일 것이라는 점을 증명한다. 이것은, 뉴턴은 케풀러의 데이터로부터 중력을 추론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케풀러의 데이터를 해석하기 위해 중력의 법칙을 이미 가정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게다가 뉴턴의 첫 번째 운동 법칙은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로부터 작용을 받지 않는다면 자체의 운동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고 진술하지만, 우리가 아무 작용도 받지 않은 물체를 관찰한 적은 없고, 그래서 이 법칙은 관찰을 통해서 얻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케풀러의 이론도 관찰에서 도출될 수 없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데이터를 브라헤(Brahe)로부터 취했지만, 행성들은 원형 궤도로 움직인다고 이미 가정함―그가 데이터가 아니라 피타고라스 학파의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수용한 가설―으로써 그것을 조직할 수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단순한 귀납적 설명과 관련하여 회의적일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하나는 귀납의 문제(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더 나은 귀납적 방법을 고안할 수 있더라도)를 통한 방법론적인 이유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이유로서 과학은 귀납 이론이 서술하는 방식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심각한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과학은 과학자들이 행하는 것이지, 철학자들이 이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귀납의 문제는 철학자들의 문제이다. 그것은 과학자들의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