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존 가드너: 오늘의 인용-신들의 왕

 

- 아래 글은 미국인 작가 존 가드너(John Gardner, 1933-1982)가 "고대 영어로 쓰인 최초의 영웅서사시 <베어울프>를 다시 쓴 작품"인 <<그렌델(Grendel)>>(김전유경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현명한 신부"인 눈먼 오크(Ork)가 그렌델에게 '신들의 왕'에 관하여 말하는 부분(161-3쪽)을 옮긴 것이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저 늙은이의 솟구치는 피로 조각상을 칠갑해 버릴 작정이다.

"저는 신비한 것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모든 것들을 심사숙고했던 유일한 사람이지요."

나는 아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자네가 있어 기쁘다네, 오크."

그러니까 갑자기 장난기 어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때로 나는 장난기가 심하게 발동한다.

"신들의 왕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라."

"왕 말씀이십니까?"

그가 물었다.

"왕 말이다."

나는 웃음을 참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가능성들을 계산하면서 원칙을 찾아 머리를 굴리는 듯 눈먼 눈동자를 굴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아름다움과 위험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기다렸다.

흰 눈이 조각상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늙은 신부는 한쪽 무릎을 수염에 대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엎드려 있었다. 중풍이 바깥에서 닥치는 것처럼, 마치 바람의 작용인 것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신들의 왕이란……."

그는 지력을 모으려고 애쓰면서 속삭였다.

마침내 그는 관절염이 심한 하얀 손으로 깍지를 낀 다음, 몽마(蒙魔)의 꽃을 올리듯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신들의 왕이란 곧 궁극적 한계를 뜻합니다."

그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분의 존재는 궁극적 부조리를 의미합니다." 한쪽 뺨에 경련이 일었고,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 한계의 원인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한계는 그분의 본성이 부과하는 것입니다. 신들의 왕께는 구체성을 띠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구체적 현실성의 근거입니다. 신의 본성에 대해서도 그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본성 자체가 합리성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 내가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길 기다리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고, 보다 더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신들의 왕은 현실적인 실체입니다. 그 실체를 통해 그 수많은 영원한 대상들이 발달 단계마다 등급이 다른 관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어떤 새로운 관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신부의 눈동자에 놀랍게도 눈물이 가득고였다. 눈물은 뺨을 타고 수염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당황하여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창조적 진보의 과정에서 최고신께서 의도하시는 목적은 새로운 강렬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을 끌어내는 매혹물이십니다."

이제 그는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너무 격정적인 울음이라 목이 메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를 지켜보았다. 마디가 울퉁불퉁한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분께서는 모든 창조물의 목적을 정하시려는 영원한 욕망의 추진력입니다. 그분께서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계시며, 우주의 만물이 헛되지 않도록 온화하게 보살피십니다."

그는 격렬하게 몸을 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추워서 저러겠거니 했다. 하지만 몸을 웅크릴 줄 알았던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굵은 손마디는 나를 위협하듯 비틀려 구부러져 있었다.

"아, 시간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궁극적인 악은 증오나 고통이나 죽음 같은 특정한 악보다도 더 심오합니다! 궁극적인 악이란 시간이 영원히 죽어간다는 것, 현실적인 것이란 제거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악의 본성은 그러므로 두 개의 무시무시하고도 성스러운 명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물은 사라진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반대되는 것을 요구한다든 것, 부조화는 강렬하고 새로운 감정을 창조하기 위한 근원이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신비입니다. 우주의 엄숙함과 위대함은 다양한 존재들이 활용되는 완만한 통합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는 어떤 것도, 그 무엇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궁극적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