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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스토아적 달걀

 

스토아적 달걀

The Stoic Egg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

이제, [...] 몇 가지 명백한 경고를 제시한다. 첫째, 이 주제에 관한 이전의 내 에세이의 독자가 신랄하게 물었듯이, 왜 굳이 통일된 철학적 체계를 발달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생은 그런 종류의 것에 대해서 정말로 너무 복잡하지 않는가? 그것에 대한 내 반응은, 자기 생에 관해 성찰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계에 관한 한 가지 (다소간) 정합적인 견해, 즉 그에게 의미를 형성하고,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견해를 추구한다. 그런 철학에 명시적으로 명칭을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거나, 또는 그것을 하나의 "철학"으로 결코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해당하는 독자가 실재의 본성, 인간 조건, 윤리 등에 관한 견해들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그는 이런 견해들이 상호 모순적이지 않거나, 또는 최소한 너무 단호하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꽤 확신하다. 다시 말해서, 수 년 동안 그는 하나의 철학적 체계를 발달시켰다. 사실상 나는 특별히 성찰적이지 않는 사람들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통속적인 철학적 체계로 지칭할 수 있을 것으로 생을 항해한다고 말할 정도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더 명시적으로 그리고 주의 깊게 한번 더 발달시켜려고 노력하면 왜 안되겠는가? 그리고 만약에 그렇다면, 스토아주의는 결코 유일한 출발점은 아니지만 좋은 출발점이 된다. [...]

 

두 번째 경고. 스토아 철학으로 합당하게 불릴 수 있는 것과는 거의 아무 관계도 없는 것만 남게 되도록 상황을 변화시키고 재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염두에 두어야 할 위험이지만, 흔히 과장된다. 우선, 철학들(그리고 종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진화한다. 고전적 스토아 철학 시기 동안에도 학자들은, 제논과 크리시포스의 "구 스토아 철학"(서기전 3세기), 파나에티우스와 포시도니우스의 중기 스토아 철학(서기전 2세기와 1세기) 그리고 에픽테토스, 세네카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로마 제국의 후기 스토아 철학(서기 1세기와 2세기) 사이의 유의미한 차이점들을 인식했다. 게다가, 어떤 근대 철학자도 그의 선행자들이 제시한 것의 초기 판본을 채택하지 않을 것인데(또는 채택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내하면 알다시피 철학은 진보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를 들면, 필리파 풋(Philippa Foot)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원래 판본이 아닌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미덕 윤리학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또는 다른 일례를 들면,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스스로를 공리주의자로 간주하지만, 제레미 밴덤(Jeremy Bentham)이나 심지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같은 의미에서의 공리주의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추구할 것은 원래의 스토아 철학에 의해 고무되고, 정신에 있어서 가능한 한 원래의 철학에 가깝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많은 세기 동안의 모든 과학과 철학으로 갱신된 어떤 종류의 신스토아주의이다.

[...]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들이 철학적 탐구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많은 비유를 사용했다. 내가 선호하는 것은 달걀의 비유(그림을 보라)이다. 껍질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논리학"이라고 부른 것에 해당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지식에 관한 이론도 포함하는, 넓게 해석되는 이성에 관한 연구로 더 잘 이해된다. 백색의 내부, 말하자면, 체계의 흰자는 "윤리학"이 차지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스토아 철학자들의 경우에도 윤리학은 그저 옳고 그름에 관한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도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생과 우리가 건설하기를 바라는 사회의 종류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 다음에 노른자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자연학"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근대적 용어로 그것은 사실상 형이상학뿐 아니라 모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조합이다. [...]

 

사실상 스토아 철학자들은 논리학이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자연학"이 주요 주제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명백히 윤리학은 항상 그것들 사이에 위치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이해하게 되는 그런 견해을 견지할 것이다. 달걀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철학(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스키엔티아"라고 부를 것)의 상이한 부분들은 상호의존적이고, 그래서 별개로 연구되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을 예시하기 위함이다. 윤리학―많은 그리스-로마 사상가들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했는데, 왜냐하면 윤리학은 인간의 생에 직접 적용되기 때문이다―에 관심이 있더라도, 우주(물리학, 형이상학)와 인류(생물학, 사회과학)에 관한 관련 사실들을 적절히 추리할 수 없거나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달걀의 비유에서 윤리학은 논리학의 단단한 껍질과 "자연학"의 부드러운 핵심 사이에 떠 있다.

 

나의 작은 개념 지도의 나머지 다른 성분들로 이동하기 전에 스토아적 논리학과 "자연학"을 갱신하기 시작하는 것에 관해 약간 언급하자. [...] 나는 신스토아 철학이 고대인들이 철학의 이 두 부분과 관련하여 생각한 것의 특정한 내용에 의해 한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까닭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스스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경쟁 학파들, 특히 회의주의 학파로부터의 비판에 대응하여 그들의 견해들을 수정했다는 증거가 풍부하게 존재하며, 그리고 나는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그 과정이 임의적으로 정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토아적 논리학과 "자연학"의 기본 특성들 가운데 몇 가지와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빨리 살펴보자. 논리학에서 시작하면, 스토아적 접근 방식은 항들보다는 명제들에 집중되었는데, 이것 때문에 스토아적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과 구별되며, 현대의 명제적 논리학, 특히 고틀롭 프레게(Gottlob Frege)의 작업과 훨씬 더 유사하다. 또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대체로 크리시포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 방식에 대한 대안을 나타내는 연역 논리학의 체계를 개발했다.

 

나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무형의 존재자들에 관한 관념(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나중에 물론 기독교도들에 의해 수용되었다)을 거부하는 동시에 구체적 물체들과 추상적 존재자들 사이에 분별이 있는 구별짓기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라고 깨닫는다. 이것은 근대적 종류의 수정된 존재론, 즉 개념, 수학적 구조 등과 같은 어떤 유형들의 사물들의 "현존"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객체들을 위해 물질적 현존을 따로 마련하는 존재론과 양립 가능하다. 내 자신은 엄격히 물리주의적이라기보다는 자연주의적인 이런 종류의 다원주의적 존재론이 꽤 마음에 든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논리학의 개념 속에 지식에 관한 이론을 포함시키는데, 그 이론은 이성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 근사적인 진리에 이를 수 있다―감각의 도움을 받아서―는 관념에 기반을 두었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상들"에 관한 판단을 할 수 있어서 올바른 인상들과 잘못된 인상들을 구별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 인지과학은 인간들이 수행할 수 있는 올바른 판단의 범위를 상당히 축소시켜 버렸지만, 근본적인 관념은 우리가 실재에 대한 올바른 표상을 형성했는지 여부에 관해 추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가정이 없다면 현대 과학(인지에 관한 연구를 포함하는)도 사라질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두드러지게 현대적인 형식으로, 우리 판단들의 신뢰성의 연속체를 인정했는데, 최고 등급의 지식은 전문적 지식의 사용과 인류의 집단적 노력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또 다시, 세부 내용은 역사적으로 흥미롭지만, 어떤 형태의 신스토아주의에도 전면적으로 도입될 필요는 없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탐구 정신, 이상과 경험적 증거의 적실성 그리고 전문가 집단 판단에 관한 중요한 관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데, 그것들 모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탐구에 관한 근대적 관념에 꽤 잘 부합된다.

 

스토아적 "자연학"(즉, 형이상학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어떠한가? 스토아 철학자들은 보편적 원인과 결과의 존재를 믿었던 유물론자들이었고,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자연 철학은 물리주의(또는 내 경우에는 자연주의)와 심지어 결정론에 관한 우리의 현대적 관념들로 갱신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거의 없다(결정론의 경우에는 일부 스토아 철학적 저작들이 운명이라는 개념을 보편적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과 혼동하기 때문에 상황이 약간 애매한데, 그 두 가지 개념은 같을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고스, 즉 우주의 작동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합리적 원리의 존재도 믿었다. 그런데 그들은 로고스를 제우스(신) 또는 자연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스토아주의와 어떤 종교적 전통들(예를 들면, 기독교) 또는 전적으로 무신론적인 우주관 사이의 양립 가능성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둔다. [...]

 

로고스에 대한 근대적 해석들은 두 가지 제시될 수 있는데, 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없고 나머지 다른 한 해석은 더 급진적이다. 근대적 시각으로 스토아적 로고스를 바라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방식은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적 언어로 쓰여져 있다는 갈릴레오의 유명한 진술과 유사한 것이다. 우주는 실제로 논리적 원리들에 따라서 구성되는데, 그래서 이성, 과학 그리고 수학의 연장들을 활용하는 인간들이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추리 노선은 약간 더 밀고 갈 수 있는데, 결국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임스 래디먼(James Ladyman)에 의해 옹호된 존재자적 구조적 실재론―근저에는 어떤 입자 또는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는 수학적 관계들일 뿐이다―이라는 관념과 유사한 주장으로 귀결된다. 이것에 대한 더 급진적인 판본은, 우주의 논리의 근저에 놓여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의 수학적 우주 같은 것에서 살고 있거나, 또는 심지어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의 모사된 우주들 가운데 하나의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은 그 정도로 멀리 가지 않을 것인데, 오히려 탄탄한 갈릴레오의 기반을 선호한다. 그래도, 다른 가능성들에 관해서도 생각하는 것은 즐겁다.

 

이제 우리는 윤리학과 내 개념 지도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자. 여러분은 스토아적 달걀의 상이한 부분들이 세 가지 근본적인 스토아적 미덕들(정의, 자기 통제 그리고 지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인데, 결국 그것들은 에틱테토스에 의해 서수된 세 가지 스토아적 규율들(행위, 욕망 그리고 동의)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살펴보자.

 

가장 명백하고 자명한 연결 관계는 윤리학이라는 학문과 정의라는 미덕 사이에 존재한다. 결국 정의는 행위의 규율과 연결되어 있는데, 에픽테토스의 경우에 행위의 규율은 우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사회적 관계(즉, 가족)와 획득된 사회적 관계(즉, 친구와 다른 인간들)들에 의해 부과되는 의무들을 비롯한 우리 의무에 의거하여 행동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에 놓여 있다. 그리고 스토아적 윤리학은 모든 인류와 심지어 자연 전체로 확대되어야 하는 관심 영역 팽창의 원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런데 "자연학"[...]과 자기 통제 사이의 연결 관계는 무엇인가? 여기서 나는, 과학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 인간 본성에 관해 폭넓게 가르쳐주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으며, 그것에 작용할 수 있게 한다는 관념을 수용한다. 자기 통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이해이고, 욕망의 규율은 인간 본성과 훨씬 더 폭넓게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에 의거하여 우리가 추구하기에 좋은 것과 피하는 것이 최선인 것을 알게 되는 방식이다. [...]

 

마지막으로, 논리학과 지혜라는 미덕을 관련시키게 되는데, 지혜는 우리의 경험에 관한 합리적인 성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이것은 동의의 규율과 연결되는데, 이 규율을 통해서 우리는 (개연적으로) 참인 것과 참이 아닌 것을 판별할 수 있거나, 또는 합당한 결론에 이를 수 없다면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스토아 철학의 세 가지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전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덕 및 규율들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경우에 철학의 주요 관심사는 윤리학이라는 관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여기서 다른 탐구 유형들(현대적 표현으로 과학을 비롯한)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지식을 발달시키는 데 있어서 보조물로 필요하다.

 

그런데 물론 앞에서 언급된 것은 여러분의 견해에 부합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최소한 스토아 철학 전체를 현대 과학(그리고 철학)과 양립 가능하고 21세기 인간들에게 여전히 유용하고 유의미한 판본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시도의 시작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