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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데크루즈: 인터뷰- 과학 소설 또는 환상 소설을 쓰는 철학자: R. 스콧 배커

 

과학 소설 또는 환상 소설을 쓰는 철학자들 ― 3부: R 스콧 배커

Philosophers who write sciene fiction or fantasy ― part 3: R Scott Bakker

 

―― 헬렌 데크루즈(Helen De Cruz)

 

Q:  당신 자신에 관해, 그리고 어떻게 과학 소설/사변적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저는 레이크 이리(Lake Erie)의 점토질 절벽 호숫가에서 진흙 폭탄을 던지고, 몰래 담배를 피우고, 농부의 딸들을 껴안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헤드뱅어가 되었고, 감당할 수 없는 가죽 옷을 입었으며, 그래서 비를 맞는 것을 무서워했습니다. 그 다음에 대학에 진학하였는데, 그곳에서 저는 '공식적'이라는 낱말이 대개 통속적인 편협한 행위들을 뒤집는 술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교가 아니라 확신을 경멸합니다. 저는 문자로 표현된 진술들을 문자 그대로 간주하느라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이것은 저를 은유적으로 기묘한 입장에 처하게 하는 듯 보입니다. 저는 키가 큽니다. 제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저는 제가 알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맹세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환상 소설과 과학 소설을, 우상화된 하워드(Howard), 톨킨(Tolkien) 그리고 허버트(Herbert)의 소설을 탐독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십대 초에 제 첫 소설을 완성했었는데, 아마도 포기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강박적으로 거듭해서 고쳐썼습니다. 저는 영문학 학사 학위, 이론 및 비평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밴더빌트 대학교에 갔습니다. 저는 하루에 두 갑의 담배를 피웠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의 최종 단계에서 저는 잭슨(Jackson)의 유명한 메리(Mary) 사고 실험을 다루겠다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었으며, 그리고 이 주가 채 지나지 않아 제가 더 이상 '기초 존재론(fundamental ontology)'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제의 맹세를 하기 전날 밤에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운이 좋게도, 신이 개입했습니다. 그해 초에 제 좋은 친구가 저로 하여금 <<나타나는 어둠(The Darkness that Comes Before)>>의 원고를 저명한 더나우 앤드 칼슨 에이전시(Dunow and Carlson Agency)의 대행업자가 된 그의 오랜 동거인에게 넘기도록 설득했었습니다. 암담한 우울증 발작을 하는 와중에 저는 뉴욕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해가 끝날 무렵에 저는 세계 전역에서 세 건의 출판 교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전체 상황이 있을 법하지 않는 일로 여겨지지만, 그 당시에는 정녕 그렇지 않았습니다.

 

Q: 당신은 사제의 맹세를 하기 전날 밤에 무신론자가 되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까? 이것에 관해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 저는 주로 철학과 환상 소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의 서사시적인 환상 소설 연작의 순전한 규모(6권의 책)가 증언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 소설이 과학 소설만큼이나 과학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망각합니다. 환상 소설을 환상적인 것, 또는 '특별히 허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설정 상황의 주술화된 본성, 즉 재현되는 세계들이 농밀하게 심리적인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런 세계들이 규범이었는데, 성서에 입각한 세계들과 공유하는 존재론이 그것들을 평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령, 마법, 신, 주술, 물신, 마녀.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게 된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것들은 환상적인 것들을 확실하게 가리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과학적 탈주술화 과정이 자연의 이런 일부, 즉 인류를 마법적으로 공유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영혼의 난제들에 대해서 저는 '아무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분별 있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적으로 탈주술화된 견해를 갖추고 있고, 그래서 제 경우에 모든 지향적 철학, 즉 지향적 기능 또는 존재자들을 상정하는 철학은 한 편의 환상 소설입니다. 그런 철학은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인지는 제한적 인지, 생태적 인지로서 일반적 인지를 흉내내기에 충분한 굴절 적응적 '찌꺼기'를 소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과학에 의해 재조직되고 재현된 것으로서의 근대 세계는 우리가 해결하도록 적응되어 있는 유의미한 세계들로부터 항상 더 멀리 떠돌고 있다. 우리는 제가 '크래시 공간(crash space)'으로 부르는 것,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기본적인 발견법적 툴킷들의 문제 해결 신뢰성이 격하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제가 보기에, 환상적인 이차적 세계들은 독자들에게 모조의 적응적 문제 생태들, 즉 심리학적 견지에서 믿음직하게 분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 설정 환경을 제공합니다. 그것들은 제가 '치트 공간(cheat space)'으로 부르는 것,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가 우리의 인지적 편향들을 게임하게 된 장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당신은 환상 소설을 일종의 문화적인 중대한 표지, 우리의 죽은 친척들이 살아 있다고 믿게 만드는 장소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무엇이 의미 있는 것이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환상 소설이 엄청난 문화적 및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환상 소설이 철학적 관념과 주제들을 표현하는 데 이상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근대주의적 서사들의 주요한 수사는 외양적으로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분투하는 주인공이라는 착상이어야 합니다. 그런 서사적 탐색이 독자에게 더욱 더 매혹적일수록, 그 작품을 '문학'으로 부르게 되는 경향이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를 제공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환상 소설은 환상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호하게 반근대주의적인 동시에 일반적으로 모든 장르들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최소로 문학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1990년대로 돌아가서, 저는 이것이 환상 소설이 예술이 가장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확신했습니다(해리 포터 책들을 공개적으로 태운 사건은 이 직감을 재확인했을 뿐입니다). 저의 끝없는 고쳐쓰기에서 결정적인 주제적 순간은 제가 '의미 구성자 인간'이라는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객관적으로 유의미한 세계에 무의미성을 가져오려고 분투하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고 깨달았을 때 왔습니다. 일단 제가 그 문을 차서 쓰러뜨린 후에는 서사와 주제적 가능성들이 끝이 없는 듯 보였고, 책들이 자체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또한 어떤 의미에서 고대의 발명품인 철학 역시 환상 소설 세계들에 적합합니다. 과학이 제도적 지배자로 등극하기 전 철학에 관해 생각하면, 대체로 철학은 인지적으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의미한 제 주인공의 유의미한 세계가 또한 풍성하게 철학적인 세계, 동지중해와 중동에서 후기 헬레니즘 세계와 유사한 것이기를 바랬습니다. 저는 전통 전체를 발명했고, 상이한 경전들을 만들어내었으며, 심지어 철학과 마법 사이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환상 소설 세계의 준거틀 내에서 실재는 진정으로 인간형상적이고 심리학적인 것이었습니다. 정보 부족이 흔히 제 등장인물들의 논쟁들을 우리 자신의 논쟁들만큼이나 처리할 수 없게 만들지라도,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한 문제에 관한 사실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마법사들은 다양한 형이상학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도출하기 위해 준경험적 탐구를 수행합니다. 그들에게는 독자적인 경전, 이른바 독자적인 '난해한 아인슈타인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매우 상세한 철학적/환상적 치트 공간을 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Q: 당신의 철학적/환상적 치트 공간에 관해 조금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이 일반적인 (비소설) 철학적 저작에서는 표현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종류들의 철학적 관념들을 소설에서 탐구할 수 있습니까?

 

A: 철학적 문제들을 탐구하는 데 서사를 활용하는 명백한 이점은 유명한 '보여주기 대 말하기' 구별짓기에 놓여 있습니다. 거의 틀림없이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은 '사고 실험', 즉 다양한 문제들을 (명백히) 실시간적으로 격리시키기 위해 고안된 작은 서사들에 대단히 의존합니다. 결국 제 박사 학위를 파괴한 것은 색맹 신경과학자 메리의 이야기였습니다.

 

서사 속 주장들은 언제나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갖습니다. 그때, 저기. 지금, 여기. 이론 속 주장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사의 애매성은 매우 흔히 이해를 생성하는 반면에, 이론의 애매성은 일반적으로 이해를 감소시킵니다. 서사 내용의 특수성은 그것의 내부에 일반화의 가능성, 어떤 상위의 이해의 가능성, 말하자면 어떤 해석적 이론을 품고 있습니다. 서사가 더욱 더 애매할수록, 특수자들은 양립 불가능한 일반화에 더욱 더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면, 설(Searle)의 중국인 방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모든 해석들에 관해 생각합시다. 무엇이든 어떤 한 가지 해석이 다른 해석들의 가능성을 폐쇄하기 때문에 애매한 서사들에 대해 일반화하는 것은 가능성을 폐쇄하는 일종의 폭력이 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므로, 자체 내부에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해석들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한, 서사는 특별한 인지 형식, 합리성을 초월하는 것을 구성하는 듯 보입니다.

 

이야기들은 불가능한 객체들에 의해 투영된 그림자들이 됩니다... 서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들의 담지자가 됩니다. 성서.

 

또는 최소한 그것은 뮤즈가 허용할 때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요지는, 서사들은 이론과 독립적인 방식들로 상이한 문제 생태들의 특수자들을 포착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크래시 공간을 생각하게 만들고, 이른바 독자적으로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것들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환상 소설은 속임수, 인간형상적 자만심을 충족시키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탈주술화, 세계를 이해하는 직관적 방식들의 분쇄에 대한 대응책입니다. 환상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관장하는 바로 그 크래시 공간을 약화된 형식으로 제기할 수 있게 하는 크래시 공간 인공물입니다. 그런 것으로서 환상 소설은 해결책을 제공하기보다는 요청하고, 우리의 사회인지적 도구들의 실제적 응용을 강요합니다. 환상 소설 덕분에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조금도 해결하지 않은 채 인간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환상 소설은 어떤 전문 용어도 사용하지 않은 채, 수십 년의 전문적인 훈련도 받을 필요도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큰 이점입니다(후세의 죽음을 감안하면 말입니다). 환상 소설은 우리 모두에게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