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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만: 오늘의 에세이-사회에 관한 조립체 이론

 

사회에 관한 조립체 이론

The Assemblage Theory of Society

 

"조립체 이론"은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가 자신이 가장 최근에 수행한 작업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은 사회에 관한 이론인데, 인간 조립체들이라는 한정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이 하나의 이음매 없는 전체로 용해되지 않는 일단의 더 작은 하위성분들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조립체 이론은 전면적인 존재론이며, 게다가 그것은 좋은 존재론이다. 데란다의 우주 모형의 다양한 요점들에 관해 성찰하면 단 몇 분만에 사변 철학의 수많은 핵심적 역설들이 떠오르며, 그리고 그것은 강한 철학적 이론의 최선의 징표이다. 오늘 나는 이 모형의 네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논의할 것이다. 그것들은 실재론과 조립체들의 이중 주창과 본질과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이중 비판이다. 이런 주제들 각각은 밀접하게 관련된 쌍둥이가 있다. 데란다의 실재론은 그로 하여금 잠재적인 것(the virtual)에 관한 이론으로 이끌게 된다. 그의 조립체 이론은 창발(emergence)이라는 신조를 수반한다. 본질에 대한 그의 비판은 완전히 형성된 개체들에게 역사적 생성(historical genesis)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그의 비판은 기계적 형식으로 상호작용들을 산출하기보다는 어떤 인자들이 상호작용들을 촉진한다고 진술한다. 이어지는 강연에서 나는 데란다가 이런 여덟 가지 주요 주제들 전부, 즉 실재론, 잠재적인 것, 조립체, 창발, 본질, 생성, 인과관계 그리고 촉매를 어떻게 다루는지 간략히 서술할 것이다.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은 이 학술회의의 표명된 주제인 열린 우주의 문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함의를 갖게 된다. "조립체 이론"은 데란다의 저작에서 이 모든 주제들을 함께 묶는 최고의 표현이고, 조립체들은 데란다와 다른 사람들이 씨름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의 책들은 내가 선호하는 최근의 철학서들에 속하기 때문에 내 발언의 정신은 대체로 긍정적일 것이다. 우선 네 가지 주요한 표지들을 간략히 개괄함으로써 시작하자.

 

첫째로, 데란다는 자신이 실재론자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그는 이것을 매우 무뚝뚝하게 그리고 매우 흔히 말하기 때문에, 실재론이 그의 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인기가 없더라도, 그것을 외면할 수가 전혀 없다. 지금까지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재론이 항상 존중할 만한 선택지였던 반면에, 데란다는 실재론자라고 자처하는 매우 드문 대륙철학적 성향의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명백히 이렇게 하지 않고, 후설도 메를로-퐁티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푸코의 추정된 "유물론"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와 푸코는 실재론자라고 자칭하기보다는 죽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바디우는 결코 실재론자라고 자처하지 않고, 지젝도 그렇지 않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도 그렇지 않다. 브뤼노 라투르는 이따금(특히 <<판도라의 희망>>에서) 공개적으로 실재론을 요청하지만, 실재론이 의미하는 바를 과감하게 재규정하는 대가를 치러고서 그럴 뿐이다. 더 젊은 세대의 대륙철학자들을 제외하면, 데란다만이 표정을 바꾸지 않고 반어적인 수법도 없이 실재론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실재론은 얼토당토 않은 형용사로 비방을 받으며 "소박한" 실재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표현은 실재론의 한 가지 유형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어구이지만 사실상 모든 실재론이 소박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데란다가 소박한 사람으로 판정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의 실재론은 근년의 무미건조한 상식 실재론과 유사하지 않다. 물리적 덩어리들에 대응하기라는 책무와 그것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지루한 인간의 코기토와 결합된 단단한 물리적 덩어리들의 무미건조한 풍경 대신에 데란다는 실재들이 우리 마음은 물론 물리적 영역에서도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는 않는 실재론을 제공한다. 그는 이 모형을 들뢰즈의 "잠재적"이라는 술어와 관련시키며 이 술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그것은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자동적(intransitive)" 영역과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을 것인데, 데란다는 바스카의 영향을 자유롭게 인정한다.

 

둘째로, 데란다는 모든 종류의 존재자는 조립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떤 객체도 자체의 성분들을 완전히 흡수하는 이음새 없는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실재에 대한 반환원주의적 모형도 함축한다. 쿼크 또는 전자가 노르웨이, 나토 또는 국제 들뢰즈 학회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이유는 전혀 없다. 거시적 존재자들이 환원될 수 있는 매우 작은 미시적 입자들의 궁극적인 층도 전혀 없다. 우리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든 간에 그 지점에서 존재자들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조립된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그것들은 통일된 것들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항상 자율적인 성분들의 방대한 부대로부터 결합된다. 또한 이것은 데란다가 진정한 창발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작은 물리적 부분들의 거동을 설명함으로써 더 큰 존재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로, 데란다는 모든 형태의 본질에 반대한다(그리고 여기서 그는 바스카와 갈라서게 된다). 그는 완전한 형상들의 피안적 영역에 반대할 뿐 아니라, 다수의 특정한 존재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어떤 고정된 수의 자연종들이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학적" 판본의 본질도 반대한다. 여기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일반적인 반박 증인이고, 예상대로 데란다는 그를 소환한다. 그런데 또한 데란다는 이것보다 조금 더 나아가며, 그리고 어떤 개체도 본질을 갖고 있지 않는 더 중추적인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한 가지 이유는 존재자들을 특정한 순간들에 포착될 수 없는 역사적-유전적 과정들로 간주하는 그의 궁극적인 베르그송주의적 관점이다. 수소라고 불리는 자연적 종은 전혀 없으며, 방대한 일군의 수소 원자들이 있을 뿐인데, 각 수소 원자는  다양한 항성들의 핵심들에서 시작하는 나름의 독특한 삶 이야기를 갖고 있다. 나머지 다른 한 이유는 실재들이(현실태와는 달리) 덩어리들로 양자화되기보다는 하나의 연속체에 속한다는, 그의 2002년 들뢰즈 책에서는 꽤 두드러지만 2006년 경에는 다소 희미한, 그의 견해이다. 또한 이것은 어떤 본질도 고정된 또렷한 윤곽을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본질은 필연적으로 인접하는 가능태들로 번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거부할 것이고, 데란다의 조립체를 다른 방향으로 밀려고 시도할 것이다.

 

넷째로, 데란다는 놀랍게도 구식의 선형적 인과관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촉매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왜소화된다고 생각한다. 담배는 모든 흡연자에서 암을 유발하지는 않으며, 모든 폐암 희생자도 삶의 어느 시점에서 흡연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담배는 그저 암에 대한 촉매로 간주되어야 한다. 데란다가 보기에, 이것은 이미 결정론적 인과관계에 관한 전통적 관념을 위협하기에 충분한데, 이런 논변은 결정론에 반대하는 바스카의 논변과 유사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메커니즘의 바로 그 요새를 타격하지 않는다면 선형적 원인들은 알기 어렵다는 점을 입증할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데란다의 반현실화 견해들은 반관계론적 견해들을 수반하고, 그래서 결국 이것은 인과관계를 강력한 수수께끼로 만들기 때문에 데란다는 인과적 관계들에 관한 훨씬 더 기묘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1. 실재론

 

모든 사상가는 필요할 때 수정하거나 희생시킬 수 있는 어떤 핵심 술어들을 사용하는 반면에, 다른 것들은 사활이 걸린 문제로 간주한다. 데란다의 사활이 걸린 술어들 가운데 하나는 "실재론"인데, 이것은 오늘날 대륙철학 학파들에서 인기가 거의 없는 낱말이다. 사실상 실재론/관념론 분리는 흔히 화석화된 옛 시대에 속하는 진부한 사이비 문제로 일축당한다. 그러나 이것은 데란다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 마음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율성을 실재에 부여하는 철학자들이 존재한다... 이런 철학자들은 실재론적 존재론을 갖고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여전히 기본적으로 비실재론적인 대부분의 탈근대적 철학자들과 구별해야 하는 그런 실재론적 철학자이다." 들뢰즈에 대한 한 가지 독법으로서 이것은 얼마든지 많은 이유들 때문에 거부당하거나 그저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여기서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데란다의 표현에 따르면, "여기서 전개되는 이론은 엄밀히 말해서 들뢰즈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고 느끼는 독자들은 그것을 '신조립체 이론', '조립체 이론 2.0' 또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데란다가 독자적으로 솔직하게 실재론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탈근대적 철학을 "기본적으로 비실재론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적어도 "실재론"은 실재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어떤 자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 인간의 마음에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를 애초에 분리한다. 실재에 대한 인간의 접근은 일종의 실재의 번역, 왜곡, 변형, 단순화 또는 절단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이것은 인간 현존을 필요로 하는 실재의 부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좋은 일례는 인간 사회 자체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적고 있듯이, "사회적 존재자들은 분명히 마음과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사회적 존재론에 대한 실재론적 접근 방식은 사회적 존재자들에 관해 우리가 품고 있는 관념들로부터 사회적 존재자들의 자율성을 단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것의 심연까지 간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낳음으로써 그들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통제를 너머 그리고 흔히 우리 지식을 너머 야생 개처럼 세계에 놓아준다.

 

그런데 대부분 유형들의 실재론과 관련하여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는 실재론이 "소박하"다는 것이 아니다(어쨌든 냉소적 실재론은 더 좋을 것인가?). 오히려 문제는 실재론이 흔히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세계 상관물의 외부에 놓여 있는 물자체를 거부하든, 또는 그런 마음 밖의 실재들을 고집하든 간에, 이런 끝없는 논쟁은 인간과 세계라는 음울한 단일 쌍 주위를 공전한다. 그저 이 두 항 사이의 관계가 열린다면 존재론의 모든 비밀을 드러낼 마법의 열쇠인 것으로 간주된다. 데란다의 가장 중요한 미덕들 가운데 하나는 이런 폐쇄 공포증의 인간/세계 이중주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실재론은 그저 인간 마음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관찰할 인간들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여간 현실화로부터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시공간에서 특정한 점들을 관통하는 현실적인 것들의 현실적 궤적에 대조적인 것으로서 데란다는 특이성 또는 끌개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존재자들의 현실적인 식별 가능한 거동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실재들에 의해 관장된다. 데란다의 표현에 따르면,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상태 공간에서] 궤적들은 항상 끌개를 향해 점근적으로 접근하는데, 즉 궤적들은 끌개에 무한히 가까이 접근하지만 결코 거기에 이르지 않는다. 이것은, 세계에서 객체들의 현실적 상태들을 나타내는 궤적들과 달리, 끌개들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데, 궤적의 어떤 점도 끌개 자체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특이성은 어떤 체계의 현실적 상태가 아니라, 장기적인 경향을 나타낼 뿐이다.

 

이런 "특이성들"은 세계의 인과적 역능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받는 듯 보이는데, 데란다가 어떤 궤적의 현실적 거동은 "그것의 이전 상태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끌개 자체의 유형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데란다는 실재적 끌개들의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이런 지위를 서술하며, <<차이와 반복>>에서 다음과 같이 들뢰즈를 인용한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적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잠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한에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 잠재적인 것은 심지어 실재적 대상을 구성하는 어떤 엄정한 부분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마치 실재적 대상이 자신의 부분들 중의 하나를 잠재성 안에 갖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객관적 차원에 해당하는 그 잠재성 안에 잠겨 있는 것처럼 정의되어야 한다....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은 미분적 요소와 비율적 관계들 안에, 또 이것들에 상응하는 독특한 점들 안에 있다. 구조는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이다.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와 비율적 관계들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조심해야 한다. 먼저 그것들이 갖고 있지 않은 현실성을 부여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한편 그것들이 갖고 있는 실재성을 박탈하지 말아야 한다.[449-50]

 

데란다는 승인의 정신으로 이런 진술을 인용한다. 그런데 들뢰즈나 데란다뿐 아니라, 오늘날 가장 인기가 높은 존재론에 대한 다양한 신흥 접근 방식들과도 관련하여 어떤 긴장이 발생한다.

 

그 긴장은, 데란다가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Intensive Science and Virtual Philosophy)>>이라는 2002년 책의 핵심 술어로 제시한 "다양체"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데서 가장 잘 보인다. 대체로 기초를 놓은 후에 데란다는 다양체를 "자체의 묻어 들어가 있는 각 층위들을 규정하는 끌개들의 분포와 더불어 대칭을 깨는 이분화들에 의해 서로 관련된 벡터 장들의 중첩된 집합"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우리가 모든 어려운 술어를 명료하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양체에 관한 정의에서 나타나는 양가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다양체는 묻어 들어가 있는 층위들의 끌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묻어 들어가 있는" 끌개들 자체와 마찬가지로, 전체로서의 다양체는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이것은 다양체가 그저 그것에 관한 우리의 인간적 자각을 넘어선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여간 어떤 현실화도 넘어선다. 다양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양체와 접촉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다양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어떤 존재자는 그것이 "수정하거나, 변형하거나, 교란하거나 또는 만들어내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데란다의 경우에 그런 결과들은 현실화에 불과할 것이다. 라투르가 궁극적인 관계들의 철학자―그에게 사물은 어떤 "우연적" 표현도 갖지 않으며 그것이 여기서 그리고 지금 나타내는 모든 특정한 특징들과 철저히 결부되어 있다―라면, 데란다는 거꾸로 선 라투르인데, 다양체는 비관계적인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어떤 관계들을 맺든 간에 여전히 굳세게 그대로 남게 된다. 이것은 이미 황량한 인간/세계 간극 또는 비간극(어느 것이든 거의 중요하지 않지만) 진보를 보여주는데, 데란다의 끌개들은 그것들을 목격하는 인간들이 주위에 전혀 없더라도 그것들의 현실화보다도 더 깊기 때문이다. 실재와 실재에 관한 지식 사이의 일반적인 구별짓기는 실재와 어느 형태의 현실태 사이의 더 흥미로운 간극으로 대체된다. 데란다는 이런 움직임을 보인 것에 대한 대부분의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들뢰즈에 관한 그의 2002년 책에서, 어느 정도 그것은 여전히 두 세계 이론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현실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은 두 개의 전적으로 상이한 규칙들의 집합에 의거하여 작동하는 두 가지 고정된 영역이다. 우리가 이미 그의 말을 들은 대로, 어떤 궤적의 현실적 거동은 "그것의 이전 상태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끌개 자체의 유형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사태는 모든 인과적 영향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명백하고 측정 가능한 현실적인 것들이 아니라 불가해한 특이성들의 영향을 받는다. 숨은 끌개들이 모든 인과적 작업을 수행한다. 명확한 사태들은 후속 사태들이나 서로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당연히 현실적 세계는 전적으로 이산적인 구역들로 쪼개지는데, 각 구역은 실재 자체가 전개되는 다양체, 벡터 장 그리고 끌개들의 더 깊은 층위를 덮는 하찮은 장식이다. 그런데 현실태의 다양한 부분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박탈당하는 반면에, 실재적 평면 또는 잠재적 평면의 경우에는 기묘하게도 정반대의 상황이 참이다. 데란다의 다양체, 즉 그가 부르는 대로 "구체적 보편자"는 명료하고 또렷하기보다는 "모호하고 또렷할"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자체의 모든 상이한 현실화로부터 그저 물러서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들은 함께 융합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 설명도 없이 지나가는 말로 데란다가 서술하듯이, "구체적 보편자들은 하나의 연속체로 함께 엮여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다양체들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들고, 다양체들이 영원한 원형들의 저장고와 매우 상이한 연속적인 내재적 공간을 형성하는 식별 불가능한 영역들을 만들어낸다."

 

그 다음에 우리는, 데란다의 현실적 세계는 어떤 식으로도 서로 영향을 미치거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불모의 작은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에, 실재의 비현실적 영역은 관계들을 형성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연속체로 함께 스며든다. 충분히 참이게도, 데란다는 "다양체들은 서로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역량으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의 "중립성 또는 불모성"을 언급한다. 그는 "매우 특별한 독립성을 [다양체들에게 보증하]"고 "어떤 독자적인 인과적 역능도 [보유하고 있지] 않는" 특이성들 사이에서 "공명과 반향들"을 만들어내는 준인과적 조작들에 호소한다. 그래도 데란다는 여전히 그것들이 하나의 연속체에 속한다고 말하며, 그리고 그것이 애초의 이질성으로부터 함께 엮여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단일한 연속체가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의 다양체들은 아무튼 수많은 상이한 끌개와 벡터 장들을 관련시키는 거대한 고안물이다. 게다가, 데란다는 "미분적 요소와 관계들"의 구조로서의 잠재태에 관한 들뢰즈의 정의를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상황은 다음과 같다. 데란다의 경우에, 다양체들은 인간의 모든 접속을 넘어서며, 그리고 사실상 인간의 자각과는 별개로 모든 현실화도 넘어선다. 어떤 의미에서 실재는 철저히 비관계적인데, 아무것도 전적으로 현실화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또한 다양체들 자체는 끌개와 벡터 장 같은 상이한 실재적 성분들의 묻어 들어가 있는 층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게 된다. 제기되는 한 가지 명백한 의문은 왜 다양체를 구성하는 실재적 끌개들 사이의 관계들이 실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관계 또는 두 개의 현실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보다 도대체 덜 문제적인가하는 것이다. 어떤 현실적 궤적도 기저에 놓여 있는 자체의 끌개들을 결코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어떤 실재적 다양체도 자체의 실재적 성분들을 결코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점도 옳아야 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그것은 관계들의 문제이며, 그리고 관계들은 자체의 항들을 소진할 수 없을 뿐이다.

 

달리 서술하면, 데란다의 경우에 실재적인 것은 어떤 현실적 사태에서도 전적으로 전개되거나 고갈될 수 없다는 "수직적" 의미에서 관계들이 더 문제적이다. 준원인들에 관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다양체들의 상정된 연속체는 잠재적 영역이 아니라 현실적 영역에서의 "수평적" 문제를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2002년의 데란다는 모든 것이 꼭대기에서는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지만, 바닥에서는 ("이질적"이지만) 비단처럼 매끈한 혼합물이 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그런데 2002년 책에서도 두 개의 상이한 규칙들의 집합을 갖춘 이런 두 층위 우주 모형은 세계는 자율적이고 창발적인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란다의 생생한 감각과 어긋난다. 그가 진술하듯이,

 

특히 개별적인 세포들과 그것들이 구성하는 개별적인 유기체들 사이에 두 층위를 이어주는 여러 중간 구조들(조직들, 기관들, 기관들의 계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의 개별적 원자들과 견고한 재료의 덩어리 사이에도 미시 차원과 거시 차원을 이어 주는 중간 차원의 구조들이 존재한다(개별 원자들이 결정체들을 형성하고, 개별 결정체들이 작은 덩어리들을 형성하고, 개별적인 작은 덩어리들이 보다 더 큰 덩어리들을 형성하는 등). 서로 다른 크기를 가진 결정체들과 덩어리들은 특정한 인과적 과정들에 따라 개별화되며, 개별 표본 덩어리의 성질들은 이 중간 구조들 사이의 인과적 상호 작용에 의해 창발된다.[93]

 

이것은 <<사회에 관한 새로운 철학(A New Philosophy of Society)>>이라는 2006년 책에서 후속적으로 전개되는 데란다 사유의 측면이다.

 

잠재태와 현실태로 이루어진 이층 집에서 상이한 규모의 조립체들로 이루어진 다층 구조로의 암묵적인 움직임은 데란다의 영감에 있어서 들뢰즈에서 로이 바스카로의 이동을 시사하는데, 바스카는 인기 있는 비판적 실재론의 정초자이며, 데란다가 그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다. 바스카와 관련하여 데란다가 싫어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본질"이라는 관념에 대한 바스카의 신봉이다. 곧 논의될 이유들 때문에 데란다는 본질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런데 다른 점들에서 데란다는 바스카에 특별히 가까운 듯 보인다. 특히 실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이층 구조를 상호연결된 형태들―각 형태는 자체 환경에서 결코 전적으로 현실화되지 않는다―의 끝없는 연쇄로 대체하려는 데란다의 경향은 철저히 바스카적인 듯 보인다.

 

<<과학에 관한 실재론적 이론(A Realist Theory of Science)>>이라는 바스카의 책은 지금은 먼 시기인 1975년에 출판되었지만, 그것의 많은 구절들은 여전히 놀랍도록 최근의 것인 듯 느껴진다. 예를 들면, "실재적 구조들은 사건들의 현실적 패턴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리고 흔히 그것들과 어긋난다"는 바스카의 주장에는 이미 들뢰즈적인 풍미가 있다. 데란다는 "현실적인 것(경험의 확정된 대상으로 식별되는)만이 실재적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현실주의(actualism)"에 대한 바스카의 비판에 공개적으로 편을 드는데, 현실주의에 대한 가장 재능 있는 최근의 옹호자는 확실히 브뤼노 라투르이다. 더 일반적으로 데란다는, "객체가 [인간들] 및 [인간들에게] 그것에 대한 접근권을 부여하는 조건과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실재적 구조 또는 메커니즘이 되는 [실재의] 자동적 차원"이라는 바스카의 개념을 승인할 것이다. 또한 바스카와 데란다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접근을 특별히 중요한 존재론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견해가 일치한다. 바스카의 경우에 실재적인 것은 현실적 사건들과 독립적이지만, 이런 현실적 사건들도 그것들이 인간들에 의해 경험적으로 지각되는 것과 별개로 현실적이다. 실재적 사물들이 모든 현실화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경험 없는 사건들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평탄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라는 술어를 둘러싸고 그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듯 보일지도 모르는데, 바스카는 평탄성을 비난하고 데란다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자세히 검토하면, 그들은 그 술어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가치 평가를 완전히 설명하는 대립적인 의미들로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바스카의 경우에 평탄한 존재론은 실재 전부를 인간 지각에 주어지는 경험적 소여의 단일한 평면으로 압축하는 것이고, 그래서 경멸할 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데란다의 경우에 평탄한 존재론은 셀 수 없이 많은 더 크고 더 작은 구조들의 층위들이 동등한 존재론적 존엄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지지할 만하다. 결국, 이 두 저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보다 더 깊은 실재적 차원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적인 것들"이 창발 과정을 통해서 창조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바스카는 데란다에 못지 않게 환원주의를 우호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바스카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중간 차원들의 영역으로 [윌프리드 셀라스에 의해] 생생하게 서술된 것에서 일상적 객체들의 특성들이 매우 작은(또는 매우 큰) 것들에 의거하여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일상적 객체들을 그것들을 설명하는 존재자들보다 덜 실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원자 구조에 의거하여 아연과 황산의 반응을 설명할 때 아연과 황산이 더 이상 어떤 식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지는 않는다.

 

이 구절은 존재자들을 그것들의 더 작은 성분들로 환원시키거나 아니면 그것들의 더 넓은 사회적 맥락으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미시적 환원주의와 거시적 환원주의 둘 다에 대한 데란다의 공격의 전조이다. 그런 시도들에 맞서서 바스카는 이렇게 역설한다. "흑체들이 실재적이라면 물리학자들도 실재적이고, 하전 입자들이 실재적이라면 뇌우도 실재적이다. 요약하면, 창발은 우리 세계의 환원 불가능한 특징이고, 그래서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특질을 갖는다." 더 작은 층위들을 더 큰 층위들로 구성하는 과정은 "대응 규칙들이 아니라 인과적 연결 관계들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아연"은 사실상 쿼크와 전자들 또는 미소한 끈들의 작은 집단인 것을 가리키는 느슨한 인간의 별칭이 아니라, 아연이라고 불리는 새롭게 창발된 존엄한 자율적 실재를 가리킨다. 나아가서 바스카는 우리는 부분이 없는 가장 작은 가능한 것들의 어떤 종점에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하는데, 그는 "세계의 층서가 정말로 궁극적인 존재자들을.... 갖는다"는 것을 "뒷받침할 아무 이유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데란다의 대부분의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스카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상승하고 하강하는 화합물들의 연쇄로서의 세계에 관한 전망인데, 여기서 각 화합물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조각들로부터 자율적이고 그것이 얽혀 있는 더 넓은 맥락과도 독립적이다. 연필은 원자들로 환원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생산하는 사회 그것이 생성하는 광범위한 연필-효과들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기능주의(functionalism)도 환원주의만큼이나 창발에 크게 위험한 것으로 판명된다. 철학은 "중간 차원들의 생생한 영역"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것이 객체 또는 다양체들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2006년의 데란다와 바스카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이층 모형이라기보다는 다층 모형이다. 바스카의 우주는 전적으로 양자화되어 있다. 그것은 띠엄띠엄한 덩어리들로 쪼개져 있는데, 각 덩어리는 아래로부터의 실재적인 인과적 작업에 의해 생성된다. 달리 서술하면, 2002년에 데란다는 다양체들의 연속체, 즉 실재적인 모든 것이 똑같이 공유하는 단일한 "실재적" 층위를 단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스카의 경우에 그리고 2006년 데란다의 경우에 각각의 창발적 존재자는 독자적인 규모에서 새로운 "실재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이런 실재적인 것들 각각은 한 연속체에서 여타의 것들과 부분적으로 공유되기보다는 해당되는 존재자에만 속하게 된다. 바스카의 "자동적" 실재는 그의 "타동적(transitive)" 현실태와 꼭 마찬가지로 덩어리 형태이거나 양자화되어 있다. 끌개들은 현실적 막대 및 돌과 꼭 마찬가지로 서로로부터 해석학적으로 밀봉되어 있다. "신은 스펙트럼을 만들고 인간은 칸막이를 만든다"는 앤터니 플루(Antony Flew)의 개탄스러운 주장을 비난하면서 바스카가 화려하게 서술하듯이,

 

나는 그런 주장에 대한 가능한 보증을 전혀 찾아낼 수 없다. 문자 그대로 간주하면, 그것은 염색체 집계는 어떤 개체의 생물학적 성을 결정하는 것과 무관하고, 살아 있는 것들의 집합은 죽은 것들의 집합으로부터 관행적으로 분리되어 있을 뿐이고, 화학적 원소들은 자체 특성들에 있어서 연속적인 점층화를 드러내며, 튤립은 진달래속 관목에 융합되고 단단한 객체들은 텅빈 공간으로 기체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2006년에 데란다가 다양체라기보다는 조립체에 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사소한 용어 변화에 불과한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다양체들의 연속체는 모든 모양과 크기의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적 덩어리들의 바스카적 세계를 위해 사라진다. 이것은 수많은 철학적 보상을 낳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초래한다.

 

2. 조립체

 

우리는 데란다가 설명의 "거시적" 층위와 "미시적" 층위 사이의 어떤 절대적인 구별짓기도 거부한다는 것을 알았다. 존재자는 자체의 더 작은 성분들과 비교하면 항상 "거시적"이지만, 그것이 참여할 더 큰 조립체와 비교하면 항상 "미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생생한 중간 영역들인데,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는 상승하고 하강하는 조립체들의 연쇄 속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조립체는 "이음새가 없는 전체도....아니"고, "자체의 부분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특성들이 없는.... 단순한 집합체"도 아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데란다의 존재론이 "평탄하"다면, 이것은 모든 것이 연속체를 이루는 단일한 내재적 평면의 평탄성이 아니다. 몇 가지 점에서 그것은 모든 작은 조립체와 거대한 조립체들을 동일한 발판 위에 놓는 것을 통해서 라투르(그 외에 데란다가 거의 공유하는 것이 없는 사상가)의 평탄한 존재론과 더 유사하다. 데란다가 어떤 피안의 차원을 위해 내재성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이다. 데란다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세속적인 사상가이다. 그러나 바스카와 꼭 마찬가지로 데란다는 대체로 유해한 "심층의 숨어 있는" 것의 철학자이다. 조립체는 초사실적인 것이거나, 또는 새로운 술어를 사용하면, 조립체는 초현실적인 것이다. 조립체는 결코 전적으로 현실화되지 않는다. 멈추어 있는 객체도 끌개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기보다는 여전히 끌개 주변에서 미약하게 요동친다는 데란다의 견해를 감안하면, 사실상 조립체는 부분적으로도 현실화될 수 없다. 데란다와 바스카의 경우에 심층의 숨어 있는 것은 우리 우주의 모든 층위에 걸쳐서 점재되어 있고, 그래서 세계의 바닥에 있는 어떤 축축한 하이데거적 샘에서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요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현실화되어 있고 다른 현실태들에 대해서 완전히 무력한 세계의 접근 가능한 층위와 현실화되지 않은 연속체의 더 심층적인 층위 대신에 우리는 세계의 어느 층위에서나 이중성을 찾아낸다. 우리는 여타의 존재자들로부터 단절된, 완전히 확정된 "현실적" 개를 더 이상 갖지 못하는데, 그것에게는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개체화될 뿐인 전(前)개체적인 전(前)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것은 개별적 객체들은 항상 현실적인 것이고, 실재계는 전(前)개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존재자들은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를 가지며,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자율적 존재자들에 선행하는 연속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자에만 속한다.

 

"조립체"라는 술어의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일방적인지 기억해야 한다. 조립체라는 개념은 구식의 자연적인 통일된 실체들을 다룰 때 유용한 논쟁적 가치를 갖는다. 존재자들은 통일된 자연적 종류로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작은 하위성분들의 강력한 부대들로 구성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화석화된 고대의 단위체들에 반대할 수 있다. 이것은 이야기의 한 면이며, 그리고 좋은 면이다. 그런데 조립체는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자. 기계나 인간 사회는 그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넘어설 뿐 아니라, 그것의 어떤 현실화도 넘어서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 전체 속에서 그것이 미칠 수도 있는 어떤 특수한 영향들과의 독립성을 감안하면, 그것은 자체가 세계의 다른 부분들에 미치는 어떤 관계적 영향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앞에서 서술한 양가성이다. 조립체는 관계를 맺는 성분들로부터 형성될지라도, 그것은 그런 성분들을 넘어서는 창발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체의 부분들의 실재를 넘어서는 것과 더불어, 또한 그것은 자체가 미칠 수도 있는 어떤 외부 영향들보다도 더 심층적인 것이며, 자체의 실재를 여전히 유지하면서 도대체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선거 연합이 그것들의 조작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분명하지 않다. 무능한 전략가들이 그저 이용하지 않았던 다수의 실재적인 "메케인 승리 연합"이 존재했었을 것이다. 비슷한 형식으로, 세계사적인 천재의 어떤 새로운 음악 양식을 오늘밤 스타방에르(Stavanger) 해변에서 들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레코드 회사, 저널리스트 또는 심지어 음악가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데란다의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데, 조립체가 되는 것과 더불어 존재자는 창발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조립체"라는 낱말의 다원주의적 음조들에 흡족해 할 뿐이라면, 실재적 통일체들의 존재를 소박하게 믿고 있는 반동적인 멍청이들을 조소하면서 모든 통일체들을 무리, 집합체 또는 다발들로 분해함으로써 우리의 첨단의 자격을 입증한다면, 우리는 데란다의 요점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존재자는 창발하기 때문이다. 존재자는 모든 무리와 집합체들을 넘어서는 것이고, 관습적인 결합의 습관을 통해서 접착된 특성들의 다발이 전혀 아니다. 존재자 또는 객체(나는 이런 술어들을 창발적 조립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는 조립체들에 의해 생성되어 새로운 조립체로 진입하는 사회적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또한 존재자는 이런 사회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존재자는 그것이 결코 전적으로 현실화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들로부터 물러서 있고, 그런 부분들을 넘어서 새로운 실재를 구성함으로써 자체의 조각들로부터 물러서 있다. 존재자는 자율적이다. 컴퓨터 과학의 용어를 사용하면, 존재자는 "캡슐화되어(encapsulated)" 있다. 전자의 사례에서는 존재자가 기능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후자의 사례에서는 존재자가 조각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점을 더 밀고 가려면, 우리는 창발에 대한 데란다 자신의 기준을 살펴보아야 한다. 데란다는 그 기준의 주창자인 척 하지 않지만, 그는 일상적인 것보다 더 흥미로운 목록을 제시한다. 그는 이런 특징들을 실제 도표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대충 <<사회에 관한 새로운 철학>>의 34-40쪽에 걸쳐 전개된다.

 

*기준 1: 조립체는 자체 부분들에 소급적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이 점에 대한 영예를 바스카에게 귀속시킨다. 데란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전체는 자체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에서 창발하게 되지만, 일단 그것이 생성되면 그것은 그런 부분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가 자체의 구성 부분들에게 제약과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한정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수행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시적-미시적 메커니즘들을.... 밝힐 필요가 있다."

 

*기준 2: 조립체는 "환원적 인과관계"에 의해 특징지워질 수 있다. 조립체들의 이 두 번째 특징은, 간략히 살펴볼 것처럼, 데란다의 사유에 어떤 긴장들을 초래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기본 착상은, 동일한 창발적 조립체가 꽤 많은 상이한 과정들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것의 역사의 정확한 세부는 무관하게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면, 데란다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가지의 미시적 원인들이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 논의들의] 미시적 세부에 대한 설명이 불필요하다면 전체 [대규모의] 공동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창발적 연합을 설명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준 3: 인과적 역능. 명백히 창발적 조립체는 자체의 부분들 외의 다른 존재자들에게도 인과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데란다가 말하듯이, "개인들보다 더 거대한 사회적 조립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독자적인 규모에서 다른 조립체들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신체적 부분들 가운데 일부를 사용해야 하는 사실이.... 그것의 해부학적 성분들로부터의 독자적인 상대적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적으로도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자체의 인과적 역량들을 행사하기 위해서 이런 [더 거대한] 조립체가 사람들을 상호작용의 매체로서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것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기준 4: 새로운 부분들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 여기서 데란다는 이렇게 강조한다. "어떤 부분들은 전체에 앞서 존재해야 하지만, 다른 부분들은 이미 현존하는 전체의 유지 과정들에 의해 생성될 수도 있다. 도시는 인간들 사이의 연결망과 조직들의 개체군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편으로, 이런 개체군들이 도시의 창발에 앞서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사실상 대부분의 연결망과 조직들은 이미 현존하는 도시의 부분들로서 생성된다."

 

우리는 다른 기준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현존하는 목록은 조립체와 더 거대한 세계 사이라기보다는 조립체와 그것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너무 집중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목록이 조립체가 무엇인가라기보다는 조립체가 행하는 것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조립체가 "수정하거나, 변형하거나, 교란하거나 또는 만들어내는" 것, 즉 엄밀히 데란다적인 실재론적 기준이라기보다는 실재에 대한 실용주의적 기준을 위한 라투르의 공식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우리가 이미 이해했듯이, 어떤 존재자도 결코 자체의 끌림 영역으로 진입하지 않게 되는 끌개들의 경우에서처럼, 존재자들의 현실화되지 않은 자율성은 결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실재적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앞에 나열된 네 가지 항목들 가운데 세 가지는 모두 조립체 자체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조립체의 환경적 증상이다. 존재자는 자체의 부분들에 미치는 소급적 영향들, 새로운 부분들의 생산, 또는 같은 규모의 존재자들에 미치는 인과적 영향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효과들의 다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택은 기저에 놓여 있는 주택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일종의 "만성 주택 증후군"으로 변환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화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데란다의 애호를 감안하면, 이것은 데란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라투르적인 것이다. 존재자의 증상들이라기보다는 존재자 자체에 관여하는, 네 가지 기준들 가운데 유일한 한 가지는 환원적 인과관계이다. 어떤 주어진 조립체가 다양한 상이한 원인들을 가졌었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자체의 유전적 역사로부터 단절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립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그것은 뱀-조립체를 의자-특이체보다 더 위험하게 만들거나, 또는 쓰여지지 않은 셰익스피어 희곡을 상업인들의 실패한 기획들보다 더 파괴적인 손실로 만드는 어떤 특성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사물의 성질들은 그것들을 초래하는 부분을 넘어선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중요하게도, 그것들은 그것들의 어떤 현실화보다 더 심층적이다. 사물이 성질들을 갖는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환경에 의해 어떤 식으로 감지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채비를 갖추고 있을 때에만 환경이 그것들을 감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사물이 자체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듯 보이는 고유한 성질들을 갖추고 있다면, 이것은 본질 같은 놀라운 운명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데란다는 아무튼 이 술어를 회피한다. 왜?

 

3. 본질

 

데란다는 플라톤적 판본의 본질을 논의하는 데 거의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데, 그는 명백히 그것을 진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른데, 유, 종 그리고 개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륜 모형은 일치단결된 공격을 받는다. 2002년 책에서 데란다가 잠재적인 것들은 전(前)개체적 끌개와 특이성들에 유보하면서 개별적 존재자들을 오로지 현실적 권역에만 할당하는 듯 보이는 순간들이 있더라도, 사 년 후에 이것은 분명히 맞지 않다. 데란다가 결론을 내리듯이, "유, 종 그리고 개체가 별개의 존재론적 범주들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학적 본질주의와 달리 조립체들의 존재론은 평탄한데, 그것은 상이한 규모의 별개의 특이체(또는 개별체)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회적 과정들에 관여하는 유일한 개별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개별적 공동체, 개별적 조직, 개별적 도시 그리고 개별덕 국민국가들도 관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개별적 존재자들은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규모의 어떤 조립체도 실재적 특이체이고,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들의 어떤 집합에서의 과대결정보다 더 심층적이다. 이집트인들만이 사회적 행위자들인 것이 아니라, 자말렉(Zamalek) 지역, 아메리카 대학, 카이로 자체 그리고 이집트로서 이집트도 사회적 행위자들이다. 모두가 개별체들이다.

 

평탄한 존재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술어(개체, 종 그리고 유) 모두가 별개의 특이체들로 붕괴되어야 한다. 개별체들의 경우에 데란다는 개별체들을 특이체들로 만듦으로서 이것을 쉽게 행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명백히 자체의 개체성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 종의 경우에는 본질적으로 종을 제거하고 다윈풍으로 고립된 재생산 풀을 우연히 점유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개체들로 대체함으로서 그것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유의 경우에는 어떤가?

 

여기서 상황은 달라진다. 종은 수많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환영적 구성물로 다소간 일축되는 반면에, 데란다의 경우에 유는 순전히 추상적이거나 위상학적인 술어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종이 별개의 특이체들로 교체될 수 있다면, 의문은 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이다. 대답은, 생물학적 분류의 최상위 층위들, 즉 계(kingdom)라는 층위.... 또는 심지어 문(phylum)들―인간들이 척추 동물로서 포함되는 '원삭 동물' 문도 비롯한―도 다르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은 모든 척추 동물에 공통적인 추상적 체제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것으로서.... 체제(body-plan)의 각 현실화는 완전히 상이한 메트릭(metric) 관계들의 집합을 나타낼 것이다.

 

달리 서술하면, "체제는 가능한 것들의 공간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 공간은 위상학적 구조를 갖는다." 더 친숙한 영토로 복귀하면서 데란다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가능성 공간들에 관한 형식적 연구는 가능성 공간을 "위상 공간(phase space)"으로 부르는 물리학과 화학에서 더 선진적이다. 그것들의 구조는 구체적인 물리적 또는 화학적 동역학 체계들의 '자유도' 또는 관련된 변화 방식들을 나타내는 차원들과....더불어 "끌개"라고 불리는 위상학적 불변자들에 의해 주어진다. 들뢰즈적 술어를 채용하면서 데란다는 "[어떤] 체제와 동등하거나....조립체들과 관련된 가능한 것들의 공간을 구성할 보편적 특이체들의 집합, 즉 다이아그램"도 언급한다. 생물학을 벗어나서, 데란다는 사회적 조직의 정당성의 이상적 유형들에 관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도식에서 그런 다이아그램들의 일례를 찾아낸다. 척추 동물이 다양한 상이한 형태들―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전적으로 기괴하다―로 나타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당화의 신성한 유형, 카리스마적 유형 그리고 합리적/관료제적 유형이 수많은 상이한 문화적 및 역사적 환경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2002년에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제시된 그런 종류의 이층 체계로 다시 이끌게 된다. 여기서 데란다는 개와 같은 개별적 특이체들과 척추 동물 같은 보편적 특이체들 사이의 절대적 대립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가 서술하듯이, "우리는.... 위상학적 불변자들을 보편적 특이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많은 상이한 체계들이 공유하는 특이하거나 특별한 위상학적 특징들이기 떄문이다." 그리고 게다가, "개별적 특이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을 대체하는 한편으로, 이런 보편적 특이체들의 분포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를 대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연결은 논리적 분화 과정이 아니라, 역사적 분화 과정, 즉 추상적 체제를 실현하는 모든 상이한 척추 동물 종들의 발산적 진화을 포함하는 과정일 것이다. 문 층위를 종 층위와 연결하는 분류학적 범주들은 역사적으로 분화된 체제의 연쇄적인 발산점들을 나타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데란다의 전망의 핵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나는 세 가지 별개의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 개별적 특이체와 보편적 특이체 사이의 어떤 구별도 있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구별짓기가 전혀 필요없다면, 대단히 상이한 두 개의 유형이 아니라, 상이한 규모들의 특이체들이 남게 될 뿐일 것이다. 둘째, 개별적 특이체들의 "본질"을 역동적인 역사적-유전적 과정들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조립체 이론 자체의 원리들 떄문에 실패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 보편적 특이체들을 한 연속체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도 실패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데란다의 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어떤 핵심적인 점들에서 꽤 다른 철학, 즉 자체의 역사로부터 단절되고 그와 마찬가지로 서로로부터 단절된 개체들의 존재론이다.

 

첫째, 보편적 특이체와 개별적 특이체 사이의 상정된 차이를 고찰하자. 거듭해서 이해했듯이, 두 특이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을 결코 완전히 소진할 수 없는 다른 것들과의 모든 관계 및  모든 구체적 현실화를 넘어서는 풍요성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언제나 개는 뛰고 있거나 먹고 있는 개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런 활동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 개를 완전히 소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라투르 같은 저자의 경우에 언제나 개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 이루어지는 그것의 활동들로 완전히 규정되고, 그래서 그것의 덧없는 각각의 화신들 사이에 단단한 연결을 만들어내는 어떤 외부 관찰자에 의해 상정되는 "동일한" 개로 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척추 동물"이 개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까닭은 오로지 그것이 토끼, 인간 그리고 멸종된 안킬로사우루스에 공통적인 추상적 체제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문제는, 이것이 "거시"와 "미시" 사이의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고, 이 두 술어는 "두 개의 고정된 규모의 층위들과 연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공간적 규모에서 구체적인 부분들과 결과적인 창발적 전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데란다의 단언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보편적 특이체들은 비공간적인 것이고, 그래서 데란다의 미시/거시 교환 가능성의 공리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빠져 나갈 수는 없다.

 

요점은 이렇다. 개는 "척추 동물"보다 덜 보편적이고 더 구체적일 수 있지만, "척추 동물" 역시 "동물"보다 덜 보편적이고 더 구체적이다. 더 일반적으로, 데란다의 존재론은 개별적 개들을 위한 여지와 보편적 척추 동물을 위한 여지도 허용하지만, 자체의 모든 개별적 구성원들과 별개로 개라는 실재적 종 같은 것을 위한 여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개"가 셀 수 없이 많은 개별적 개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척추 동물이 개별적 척추 동물들로 구성되지 말아야 하는 명백한 이유는 전혀 없다. 요약하면, 개별자들로 간주되는 실재의 특정한 영역들과 보편자들로 간주되는 다른 특정한 영역들을 찾아내는 것은 나쁜 착상이다. 조립체 이론 자체가 시사하듯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은 개별적 존재자들뿐이다. 달리고 있는 개의 배후에는 명백히 특정한 달리기 행위보다 더 심층적인 과잉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그 개 자체가 존재한다. 그 개의 배후에는 척추 동물  속이 아니라 그 개의 성분들이 존재하는데, 성분들 각각은 그 개를 구성하는 자체의 현실화보다 더 심층적이고 더 풍요롭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미시적 성분들로 알려져 있는 가장 작은 것에서도 명백한 종점을 갖지 않는, 현실화되지 않은 개별자들의 하강하는 연쇄 속에서, 이런 성분들은 결국 그것들 나름의 성분들의 과잉으로 가득차 있다. "미시적" 층위와 "거시적" 층위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둘째, 개별자의 본질을 그것의 역동적인 유전적 역사로 대체하려는 데란다의 시도는 환원적 인과관계의 원리에 의해 논박당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한다. 이제는 유명한 일례에서 데란다는 우리가 "그것의 자연종들을 물화하기를 거부하면서" 원소들의 주기율표를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주어진 종의 원자들은 개별적 항성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합성의] 되풀이되는 과정들에 의해 산출되는 개별적 존재자들로 간주될 것이다. 유기체와 달리 이런 원자들은 훨씬 작은 변이를 나타낼지라도, 그것들이 구체적인 과정으로 생성되었다는 사실은 그것들 각각에 역사를 부여한다." 그런데 개별적 원자들의 전기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어떤 전기도 그것의 주체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지 못하는데, 그저 출판사의 예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데란다 자신이 강조하듯이, 대체로 정보는 전적으로 환원적인 것이다. 어떤 선거에서 인구학적 인자들에 관해 말할 때, 대부분의 개인적 일화들은 무관한데, 상이한 일화적 사고들이 동일한 결과를 낳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적 기어와 레버들이 교체되더라도 기계는 여전히 동일하며, 그리고 인간 육체와 그것의 구성 원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환원적 인과관계는, 조립체는 어느 정도 자율적이고, 그것을 생성시킨 역사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역사적 세부 사항들만이 여전히 그 원자와 관련이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역사로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진정한 궤적을 원자 속에 남겨 놓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수소가 저런 종류의 항성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항성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의 현재 구성과 무관할 것인데, 대부분의 역사는 환원적이며, 그리고 실재는 그것이 오늘의 위치에 이르게 된 대부분의 길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방해받는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항상 그것의 역동적인 역사적 창세기로부터 단절되어 어떤 특수한 현재에 결정화하는데,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완전한 현실화로부터 물러서 있을지라도 말이다.

 

말이 난 김에, 나는 베르그송이나 데란다 같은 인물들을 라투르와 화이트헤드 같은 전적으로 다른 인물들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는 주장을 개진하고 싶다. 때때로 "과정 철학"이라는 술어는 거의 구식의 실체를 거부하는 것으로써만 결합되는 모든 인물들을 포함하기 위해 느슨하게 사용된다. 이 두 가지 전통에서 실체는 정반대의 이유 때문에 거부당한다는 점을 인식하자. 역동적 생성 학파의 경우에 실체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의 과도한 견고성과 고정성이다. 데란다 같은 사람의 경우에 실체는 항상 너무 특정적이다. 그런데 라투르 같은 관계론적 철학자의 경우에 실체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의 불충분한 견고성이다. 실체는 모든 특정한 결정들 배후에 숨어서 변화하는 사태들에 걸쳐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사실상 그것은 그것들에 의해 철저히 규정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베르그송이 어떤 별개의 순간도 거부한다면, 라투르와 화이트헤드의 철저히 관계론적인 사유는 비록 이 기회가 즉시 사라져야 하더라도 존재자들이 한 순간에 전적으로 표명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 연속체 속에서 어떤 종류의 특이체들도 존재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야 한다. 명백한 이유들 때문에 데란다는 고정된 이산적인 본질의 덩어리들보다 연속성이 더 호소력이 있다고 깨닫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추상적인 일반적 존재자들이 서로 날카롭게 구별된 채로 나란히 공존하게 되는 본질들과 달리, 구체적인 보편자들은 한 연속체 속에서 함께 엮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실재적인 것은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수용하면, 어떤 실재적 연속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현실화가 없는 실재적인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더라도(그리고 나는 이것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실재적인 것들의 요점은 실재론, 즉 어떤 현실화나 심지어 현실화들의 총합도 넘어서는 것의 과잉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적 세계뿐 아니라 실재적 세계도 바스카가 상상한 바로 그 방식으로 양자화되어 있다. 우리가 "신은 칸막이를 창조했고, 인간들은 스펙트럼을 발명했다"고 말한다면, 이런 전도된 상투적 표현은 엄밀히 참인 것은 아니지만, 플루가 표명한 애초의 진부한 말보다 진리에 훨씬 더 가깝다. 베르그송이 우주 자체는 역동적인 운동이며 인간들이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쪼갠다는 모형으로 유명하다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데란다는 뒤집혀진 베르그송의 역할을 향해 경사된다. 실재적 세계는 자체적으로 덩어리들로 가득차 있어야 하며, 그리고 현실화된 사태들의 영역은 연속체가 발견되는 곳이어야 한다. 조립체들은 각각 본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자체의 역동적-유전적 역사뿐 아니라 인근의 존재자들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가지 명백한 문제를 초래한다. 실재적 개별자들이 자체의 철처히 비관계적인 또는 초관계적인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면, 그것들은 도대체 무언가 다른 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인과관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는 두 개의 상이한 종류의 철학들에 의해 일찌기 제기되었다. 첫째, 그 문제는 신에게 창조의 권능뿐 아니라 인과적 관계의 권능도 유보하는 이슬람 및 프랑스 기회원인론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둘째, 그 문제는 위대한 프랑스 기회원인론자 말브랑슈(Malebranche)의 대단한 찬양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흄에 의해 제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기회원인론에 대한 흄의 접근 방식은 전도된 것에 불과한데, 오직 마음만이 습관을 통해서 사물들을 연결하도록 인간의 마음이 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두 경우에 모두 특권을 부여받은 한 존재자는 급진적 실재론이 관계성에 가하는 금제를 넘어서는 마법적인 초월이 가능하게 된다. 기회원인론은 자율적인 실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래서 그것들을 관련짓는 데 문제가 있는 반면에, 흄은 그것들의 관계들로 시작하고, 그래서 마음 속에서 맺어지는 마음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들을 넘어서는 그것들의 자율적인 삶을 확립할 길을 전혀 찾아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흄도 기회원인론자들도 다른 어느 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떤 마법적인 초존재자(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든 멘스 엑스 마키나이든 간에)에 대한 약간의 위선적인 호소를 통해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한다. 데란다적인 종류의 실재론에서는 두 선택지 모두 작동할 수 없는데, 데란다의 경우에 마음은 상호작용에 있어서 필요한 성분이 결코 아니며, 그의 철학에서 신은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란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체의 비관계적 특질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들이 아무튼 상호작용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일종의 "국소적 기회원인론(local occasionalism)"이다.

 

4. 인과관계

 

<<사회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라는 2006년 책에서 데란다는 한편으로 선형적 인과관계와 다른 한편으로 촉매를 구별짓는다. 선형적 인과관계는 그것이 시사하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데, 동일한 원인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촉매는 어떤 작용들을 자동적으로 수반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고무할 뿐이다. 예를 들면, 담배는 폐암을 촉진할 뿐인데, 모든 흡연자들이 암 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모든 암 환자들이 흡연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데란다는, 촉매는 일반적으로 표현적인 것인 반면에 선형적 인과관계는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조는 흥미롭다. 데란다의 경우에 "물질적" 영역은 일반적으로 도시에 대한 가스선 및 하수로와 같은 사물의 기능적 하부구조를 가리킨다. 세계의 "표현적" 영역은 사물의 비기능적인 과잉의 표면을 가리키는데, 예를 들면,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있다. 얼굴이 기질을 표명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스카이라인은 도시를 자랑스럽게 표명하는데, 둘 다 상처받은 사람 또는 도시의 근본적인 기능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변경되거나 훼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데란다의 경우에 존재자들이 원인이라기보다는 촉매라면,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 다수의 인과적 인자들을 고려하는 바스카의 견해(궁극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에서 비롯된)와 비슷하다. 예를 들면, 폭발은 불꽃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가질 수 있지만, 다른 인과적 인자들은 그것이 점화시키는 화약, 창고를 화재에 취약하게 만든 이례적으로 건조한 10월 그리고 방화범이 잠입하게 내버려 둔 야간 경비원의 만취 상태를 포함한다. 무엇이든 어떤 사건의 원인에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관여하는데, 이것은 그것들을 데란다적인 촉매와 유사하게 만든다. 바스카가 보기에, 이것은 결정론을 전복시키기에 충분한데,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한 가지 원인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데란다는 촉매가 선형적 인과관계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원인들의 다수성은 인과적 조건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결코 그것은 각 개별적 원인의 상대적 무능이 더해져서 결국 비결정성 또는 자유 의지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담배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실제 문제를 교묘히 피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동일한 담배 더하기 동일한 유전학 더하기 동일한 섭생 더하기 동일한 환경 등이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 여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란다의 촉매는 선형적 인과관계의 기계적 본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한 의미에서 데란다는 선형적 인과관계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데, 그는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이 조립체의 외부적 표현 효과와 별개로 조립체의 고유한 실재를 가리킨다고 간주하면, 어떤 의미에서 물질적인 것은 어떤 현실화로부터도, 그리고 사실상 어떤 관계로부터도 물러서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과적 관계는 표현적 층위, 말하자면, 조립체의 특성들이 은폐되고 현실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완전히 현실화되는 비본질적 층위에서 일어나야 하는 듯 보인다. 이것은 인과적 관계들에 관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지지물을 찾아낸다. 즉, 사물의 본질적 특징들은 그것의 우연적 특징들에 의해 파괴된다. 링컨의 위대함은 그 사람의 피부를 관통하는 작은 납 조각에 의해 파괴된다. 피카소가 그린 도라 마르의 초상화는 언젠가 깨진 한 잔의 오렌지 쥬스에 의해 훼손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학의 뒷받침도 받는데, 여기서 비유들은 그것들이 비본질적 특징들을 통해서 두 존재자를 연결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펜은 연필 같다"라는 표현은 어떤 비유적 효과도 없는 반면에 "펜은 독사 같다"라는 표현은 그것들의 모호하게 유사한 물리적 형태의 순전히 주변적인 연결에도 불구하고 비유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윤리학에서, 폭력은 자신들 속의 약한 것을 통해서 누군가의 강한 것을 소유하려는 시도이다(또 다시 링컨 암살)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발언 속에서 지지물을 찾아낸다.

 

요약하면, 세계의 표현적 표면 또는 우연한 사건들의 영역이 관계들이 맺어질 수 있는 유일한 현장이다. 들뢰즈는 표현이 인과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강조했었고, 데란다는 이미 이 점을 찬양했었지만, 표현적 영역만이 인과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지하지는 못한 채 그랬었다. 그럼에도 표현은 표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상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표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적인 세계-심층이 현실화된 세계-표면으로 뒤덮이는 낡은 이층 모형을 신봉하는 것이다. 이것 대신에 데란다의 모형은 상승하고 하강하는 연쇄로 연결된 일련의 조립체들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두 개의 조립체 사이의 어떤 관계도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더 큰 조립체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립체들은 한 연속체로 스며들기보다는 덩어리들로 양자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내부들은 자동적으로 다른 조립체들의 내부들로부터 단절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처음에 느껴질 것보다 덜 기묘하다. 유사한 주장이 <<논리적 탐구>>에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지향성은 하나이자 둘이라고 주장했을 때 이미 제기되었다. 누군가가 나무를 지각하면, 인식자와 나무 사이의 관계는 사실상 새로운 조립체이다. 그것들은 새로운 존재자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접촉하게 되고, 이 존재자의 내부가 실재적 인식자가 지각되는 은폐된 실재적 객체의 현실화된 유령 또는 환영을 대면하는 장소이다. 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객체가 나를 대면하면, 그 실재적 객체는 유사하지만 반전된 객체의 내부에서 일종의 유령 같은 나의 영상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범심론이 명백한 결과이다.

 

그런데 또한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관계들이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새로운 조립체의 생성을 항상 수반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두 대의 제트기가 공중에서 충돌하여 불타면서 멀어진다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두 개의 독립적인 존재자들에 미치는 정성적인 상호 영향들에 의거하여 이 상황에 관해 생각한다. 데란다의 견지에서 더 나은 분석은, 두 대의 제트기가 잠깐 동안 새로운 존재자를 형성했다는 것일 것인데, 그 새로운 존재자는 "자체의 부분들에 미치는 소급적 영향"으로서 우리가 이미 만난 조립체의 역능을 통해서 두 대의 제트기를 파괴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그 제트기들은 다시 별개의 존재자들로 분해되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화염에 휩싸였다. 다시 말해서, 인과관계는 선재하는 객체들에 미치는 새로운 영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객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주로 의미한다. 종말을 향해 선회하는 두 대의 불타는 제트기는 인과관계의 육화들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증상들이다.

 

그런데 이 학술회의의 주제는 어떤가? 개방성? 나는 미래의 개방성에 의거하여 이 주제를 해석하기로 결정한다. 미래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 예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은 열린 채로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조립체들의 창조는 항상 가능할 것이라고, 그래서 참신성이 출현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인과관계가 표현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사물의 우연적 특징들이 전개되는 영역 내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바스카도 데란다도 촉매와 다수의 인과적 인자들의 화려한 안개로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 인자들의 복잡성은 우리 자신의 오성을 넘어설 것이지만, 신 또는 사악한 슈퍼컴퓨터의 오성은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선형적 인과관계의 소동 속에서 개방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사변적 실재론을 향하여(Towards Speculative Realism)>>(2010), pp. 170-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