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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미첨: 오늘의 에세이-지각과 실재

 

지각과 실재

Perception and Reality

 

―― 빌 미첨(Bill Meacham)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가? 우리가 지각적 환영을 겪는다는 사실 때문에 몇몇 사상가들은 우리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제기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뇌가 만들어낸 환영을 본다(또는 맛이나 감촉을 느낀다). 어바인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인지과학 교수이자 저명한 연구자인 도널드 호프만(Donald Hoffman)은 이런 견해의 대중화론자이다. 한 편은 사이언스 채널에, 그리고 다른 한 편은 TED에 올려져 있는 두 편의 최근 비디오는 우리 경험은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는 그의 테제에 대한 즐거운 설명을 연출한다.

 

예를 들면, 위에 나타낸 그림을 고려하자.

 

왼쪽 그림은 다양한 회색 조각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 가운데 오른쪽 그림에서 A와 B에 해당하는 두 조각은 상이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동일한 회색인데, 광도계는 그것들이 동일하다고 알아낼 것이다. 호프만은 이것을 우리 지각의 인지적 양태(그는 이것을 "시각적 지능"으로 부른다)가 우리가 지각하는 회색을 구성한다는 증거로 삼는다.

 

일상적 경험에서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실재적 세계가 아니라는 관념은 새롭지 않다. 고대 인도 철학은 실재의 참된 본성을 은폐하는 마야, 환영으로서의 세계에 관해 말한다. 플라톤은 우리를 동굴 속 포로들로 비유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들을 벽에 투사된 그림자로 비유한다. 철학자는 실재를 정말로 지각하기 위해 자신의 족쇄를 끊고서 대담하게 실재적 세계로 나가는 사람이다. 칸트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우리가 우리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현상의 세계일 뿐이다.

 

호프만이 거론하는 것은 풍부한 실험적 증거뿐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얻게 된 방식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이다. 그의 테제는, 우리의 지각적 장치는 실재를 정확히 지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전적 적합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진화적으로 배선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얼마나 잘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 조상들이 짝짓기를 하여 자식을 가질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살아남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은 정확성이 아니라, 호프만이 말하듯이, "계략과 술수"에 의해 구성된다.

 

이런 설명은 결코 "그냥" 이야기가 아니다. 호프만은 효용성에 집중하는 전략들을 택하는 생명체들이 객관적 실재에 집중하는 전략들을 택하는 생명체들을 경쟁에서 이기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몇 가지 수학적으로 엄밀한 컴퓨터 모의 실험을 수행했다.

 

한 단순한 판본은 이렇다. 여러분은 각 서식지가 얼마간의 먹이와 물을 갖추고 있는 일련의 서식지들에 대한 모의 실험을 구성한다. 그 다음에 그 서식지들을 살펴보고 한 서식지를 선택하여 차지할 두 생명체를 구성한다. 진리 추구자인 한 생명체는 먹이와 물 둘 다의 정확한 양을 살펴보는데, 그것은 실재에 대한 정확한 지각을 갖는다. 단순한 해커인 다른 한 생명체는 물은 무시하고 최대량의 먹이를 찾을 뿐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정확한 지각이 아니라 요령을 사용한다. 진리 추구자는 정보를 수집하여 어떤 선택을 내리는 데 있어서 단순한 해커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요한다. 그 시늉내기는 다양한 서식지들에서 두 생명체를 반복적으로 겨루게 한다. 진리 추구자보다 단순한 해커가 더 신속하게 더 좋은 서식지들을 차지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다시 말해서, 단순한 해커가 진리 추구자를 경쟁에서 이기게 된다. 실재에 대한 정확한 지각은 최적의 전략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호프만과 그의 동료들은 훨씬 더 복잡한 모의 실험들을 많이 수행했는데, 이런 두 전략뿐 아니라 다른 한 전략도 겨루게 하였다. 진리 추구자는 그들이 소박한 실재론적 전략으로 부르는 것을 구현하는데, 그것의 지각은 실제로 현존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단순한 해커는 비판적 실재론적 전략을 구현하는데, 그것의 지각은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실재에 관한 일부 진리를 반영한다. 둘 다 실재에 동형적인데, 즉 둘 다 실재와 동일한 모양 또는 구조를 갖는다. 비판적 실재론적 전략은 소박한 실재론적 전략보다 덜 정밀할 뿐이다. 호프만은 그가 인터페이스 전략으로 부르는 세 번째 전략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지각은 실재에 동형적이지 않다. 모의 실험들에서 인터페이스 전략이 나머지 두 전략들을 능가한다. 호프만과 그의 동료들은 "자연 선택이 항상 소박한 실재론이나 비판적 실재론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 많은 시나리오들에서 인터페이스 전략만이 생존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지각이 실재와 유사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분명하게도, 호프만은 인터페이스 전략이 항상 또는 반드시 이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길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래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어떤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주장은 우리의 지각이 실재와 유사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호프만은 그의 인기 있는 강연에서 더 나아간다. 그는 지각이 아무 유사점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결코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바라보지 않을 때 현존하는 무언가가 있지만, 그것은 시공간과 물리적 객체들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빨강 토마토로 서술하는 지각적 경험을 겪을 때, 나는 실재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지만, 그 실재는 빨강 토마토가 아니며 빨강 토마토와 전혀 비슷하지 않다."

 

여기서 호프만은 너무 멀리 나아간다. 그는 실재가 우리 지각과 유사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자신이 인정한 바에 의하면, 우리는 실재―칸트가 물 자체로 부르는 것―와 결코 접촉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교할 길이 전혀 없다.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실재와 경험이 아니라, 어떤 경험들과 다른 경험들이다. 위에 나타낸 회색 조각들의 시각적 환영을 고려하자. 우리가 우리 지각이 환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광도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경험을 통해서만 광도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알 뿐이다.

 

이렇게 해보자. 이 페이지를 인쇄한 다음에 해당하는 두 조각을 잘라내어 나란히 놓자. 그런 배치에서 그것들은 동일하게 보일 것이다. 만약 광도계가 있다면, 두 가지 배치―맥락 속에서 그리고 병치되었을 때―에서 그것들을 측정하라. 모든 경우에 그것들은 동일하게 측정될 것이다. 여러분은 그 환영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A. 아델슨(Edward A. Adelson)의 웹사이트로 가서 그것들의 동일성에 대한 더 많은 증거를 볼 수 있다.

 

우리가 광도계에 대한 우리 경험과 병치하여 바라본 조각들에 대한 우리 경험이 맥락 속 조각들에 대한 우리 경험보다 더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맥락이 변할 때 색깔이 실제로 변한다고 가정하기보다는 회색이라는 색깔은 동일한 채로 유지되고 우리 지각이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간단하고 더 정합적이다. 그리고 후자의 가정이 우리로 하여금 더 성공적인 예측들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물리적 실재로 수용하는 것은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men Quine)이 "문화적 구상물(cultural posit)"로 부르는 것이다. 콰인의 설명은 묘사적이지만 유익하다.

 

경험주의자로서 나는 계속해서 과학의 개념적 도식을 궁극적으로 과거 경험에 비추어 미래 경험을 예측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한다. 물리적 객체들은 편리한 매개물―경험에 의거한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호머의 신들에 비견될 수 있는 환원 불가능한 구상물―로서 상황 속에 개념적으로 편입된다. 한편으로 비전문가 물리학자로서 나는 물리적 객체들의 존재는 믿지만 호머의 신들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고 불쑥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달리 믿는 것을 과학적 오류로 간주한다. 그런데 인식론적 기반에 대해서 물리적 객체들과 신들은 정도가 다를 뿐이지 종류가 다른 것은 아니다. 두 종류의 존재자들은 문화적 구상물로서 우리 개념에 편입될 뿐이다. 관리할 수 있는 구조로 경험의 흐름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서 물질적 객체들의 신화가 다른 신화들보다 더 효험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점에서 그 신화는 대부분의 신화들보다 인식론적으로 우수하다.

 

마찬가지로, 대체로 우리 경험에 동형적인 것으로서의 실재의 신화가 믿을 만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잘 작동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광학적 환영들은 우리 지각의 결점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적 체계가 표준적 조건 하에서의 실재에 얼마나 잘 적응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