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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 샘 미키: 오늘의 에세이-코스모폴리틱스: 진행 중인 의문

 

코스모폴리틱스: 진행 중인 의문

Cosmopolitics: An ongoing Question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 샘 미키(Sam Mickey)

 

1. 진행 중인 의문

 

"코스모폴리틱스"라는 단순한 낱말의 의미는 거의 자명한 듯 보인다. 코스모폴리틱스는 코스모스의 정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런 규정은 후속 탐구를 요청하는데, 어떤 종류의 "코스모스"가 정치를 갖는가? 일상 생활에서는 전혀 별개의 이 두 술어가 결합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맥락에서 코스모스는 함께 실재를 구성하여 집단적 사회―상황을 달리 보려는 빈번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항상 비인간들을 포함한 사회―를 형성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킨다. 코스모스는 인간과 비인간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맺어지고 단절되는 많은 연합들에 의해 정치와 결부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코스모스는 자체적으로 인간들의 역사에 병합되지 않는 역사적 존재자이다.

 

정치적 코스모스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만물의 생태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스모폴리틱스는 오늘날의 파편화된 지식의 풍경을 항해하기 위한 통합적 실천으로 출현한다.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의 경우에 이런 파편화는 사실과 가치, 주체와 객체, 자연과 사회, 시간과 역사, 또는 세계와 표상 사이의 분열을 가리킨다. 이런 분열―이른바 자연의 이분화―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데, 정치생태학의 과업이 사실과 가치를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이분화 때문에 우리는 사실과 가치를 동일한 통합생태학의 양면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할 간극을 연결할 수 없는 채로 남게 된다. 그것은 마치 미학, 가치 그리고 주체들의 영역들이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사실, 객체 그리고 소여들에서 비롯된 상이한 우주에 속하는 듯 보인다.

 

이분화된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체와 객체는 실재의 두 가지 별개의 권역들을 형성하는 동시에 모든 곳에서 충돌한다. 지식은 외부의 통일된 세계에 대한 거울상을 만들어내도록 구성된다. 언어, 사회 그리고 역사는 그 선의 이쪽에 속하는 반면에,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는 저쪽에 속한다. 코스모폴리틱스는 이런 이분화된 것들을 관련시키는 독특한 실천을 제시하는데, 우리가 다수의 환원 불가능한 세계들에 참여한다―지식과 개념들의 층위(인식론적 다원주의)뿐 아니라 세계 자체의 층위(존재론적 다원주의)에서도―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다원주의는 코스모폴리틱스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지배적인 영향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그의 "존재론적 원리"―즉, 무언가에 대한 이유는 항상 하나 이상의 현실적 존재자들이다―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별개의 용기들―자연으로 불리는 용기와 사회로 불리는 용기―를 상정함으로써 실재를 공간화하는 대신에 코스모폴리틱스는 존재자들만큼이나 많은 실재의 양태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과업은 자연과 문화의 공허한 추상물들 사이에서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들이 공동의 생태적 집합체―비인간들도 사회에서 발언권을 갖는다―에 참여할 때 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다수의 연합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제시함으로써 코스모폴리틱스는 두 가지 별개의 권역들(자연과 사회)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없는 설명을 제공하고, 존재자들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미소한 간극과 교차들로 가득차 있는 지형을 탐구한다. 지식-세계 간극을 물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폴리틱스는 지식과 세계 사이의 간극을 관계들의 문제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라투르의 표현에 따르면, "언어와 사물을 분리하는 거대한 심연은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나의 거대한 간극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미소한 간극들로의 변환은 중요한데, 세계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간극을 가로지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코스모폴리틱스는 주체-객체, 자연-문화 이분법에 의지하지 않은 채 대단히 다양한 사물들 자체로 우리를 귀환시킨다. 여기서 세계 전체를 표상하도록 언어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고 라투르가 경고하는 "취약한 준거의 간극"은 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들로 집합체를 집결시키는 많은 연결들 가운데 하나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인식적 탐구를 위한 도구로만 간주하는 대신에, 코스모폴리틱스는 모든 존재자들을 표상할 책임을 지고 있는 유일한 양태로서가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의 연합들을 만들어내는 많은 연결들 가운데 하나로서 지식에 접근함으로써 지식의 존재론을 서술한다.

 

이런 의미에서 코스모폴리틱스는 물질적 세계를 지식 및 관념들의 세계와 분리시키는,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이분화"로 부르는 것을 극복한다. 일단 자연의 이분화가 폐기되면, 존재론적으로 실재적인 세계들의 수는 늘어난다. 코스모폴리틱스에 의해 함축되는 실재적 세계들의 다수성은, "다문화주의"라는 술어가 허용될 수 있다면 "다자연주의"―즉, 우리가 도대체 계속해서 낡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라는 술어도 수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자연주의로의 전환은 지식의 가능성들을 재구성하고, 여기서 코스모폴리틱스는 무언가 급진적이지만 아마도 전적으로 합당한 것을 제시한다. 다수의 시각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단일한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 서로 얽혀 있으며 상이한 실천들의 집합들에 의해 현시되는 다수의 세계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 실천 또는 장치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단일한 세계에 관해 올바르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코스모폴리틱스는 사회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가 기성의 환경, 기술 그리고 지식들을 포함하는 다종의 생태들에서 깊이 얽혀 있는 집단적 역사의 입장을 취한다.

 

2. 시간의 생태학

 

그러므로 코스모폴리틱스는 인간과 비인간을 두 가지 방식―시간적으로는 역사와 자연적 존재론 사이의 날카로운 구별짓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인접하게도 애초에 인간 주체나 인공물과 비인간적인 것들 사이의 존재론적 구별짓기를 거부함으로써―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코스모폴리틱스의 시간적 전개는 "생태적 특이점"들을 통해서 되풀이 된다. 이런 특이점―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건―들은 원인과 결과, 또는 조건과 사건 사이의 엄격한 경계를 허용하지 않으며, 다수의 "가치 세계"(스탕제가 펠릭스 가타리로부터 차용한 술어를 사용하면)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원인이나 조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 조건의 "내부"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가능성의 구조를 형성하는 일의적인 선험적 주형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건은 우리에게 수량적 다수성의 논리를 숙지시키는 자체적으로 내재적인 가치들―어떤 특정한 사건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성분들―이다. 존재적으로 실재적인 수량적 다수성을 인정함으로써 코스모폴리틱스는 상이한 실천, 실무자 그리고 그들이 조립하는 비인간 인공물들에 의해 관계를 맺게 되는 "현전의 양태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다면 코스모폴리틱스의 경우에는 모든 존재 양태들이 조직화될 수 있는 주권자적 권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모든 담론적 실천 또는 물질적 실천의 다양성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메타언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메타언어는 상이한 존재자들을 비용을 치르며 내부로부터 통일하는 술어들이다. 그리고, 조건과 마찬가지로, 모든 메타언어는 사건들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내재적이다. 예를 들면, 여타의 것들을 시험하는 주권적 지식 체계로 흔히 간주되는 물리학은 자체의 무기력한 가치 판단 체계로 환원될 위험에 처해 있다. 스탕제의 경우에, 물리학은 자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물리학으로 환원되어 버렸다. "현상의 물리학에 대한 법칙의 물리학의 승리". 법칙과 현상 사이의 관계는 코스모폴리틱스에 중요한 것이다. 어떤 물리적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견지할 수 없는 입장―고 말하기보다 스탕제는 법칙과 현상 사이의 얽힘에 관한 더 복잡한 그림을 제시한다. 코스모폴리틱스는 우리로 하여금 현상의 물리학과 법칙의 물리학을 포함하는, 물리학에 관한 생태적 및 역사적 관념을 품고서 생각하기를 요청하는데, 여기서 법칙의 물리학은 그 속에서 현상들이 상호작용하는 생태적 환경에 자체적으로 내재적인 것이다.

 

법칙과 현상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에 관해 스탕제는 또 다시 화이트헤드로부터 끌어낸다. 화이드헤드의 경우에 법칙은 더 정확하게 습관―어떤 특수한 전개 단계에서 창발하는, 상호작용하는 현상들의 행태적 특징들―으로 서술된다. 화이트헤드의 말을 인용하면, "관계들이 관계항들의 본성을 수정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관계항들도 관계의 본성을 수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스탕제와 화이트헤드의 경우에는 법칙과 현상 사이의 관계가 복잡한데, 법칙은 현상의 층위의 외부, 아래 또는 위로부터 작용하는 외재적이거나 통일된 용기가 아니라, 오히려 현상들 자체의 성질과 상호작용들의 내부에서 비롯되는 역능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봉건적 위계를 구축할 수 있는 절대적 주권자를 성별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코스모폴리틱스는 더 민주적인 상이한 전진 방식을 제시한다. 코스모폴리틱스는 존재자들의 각 영토를 별개의 개연성, 성질 그리고 의무들이 가득차 있는 것으로 접근한다. 각 영토는 개체들의 거동에 영향을 미치는 내재적 법칙들을 형성하는 독자적인 "습관" 또는 "관습"을 산출한다. 그것을 화이트헤트의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와글거리는 세계 속에, 동료 생물체들의 민주주의 가운데 처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을 동화시키지 않은 채 각자의 가치들을 통합하여 그것들에 울타리를 치지 않은 채 포함하는 방식으로 이런 별개의 영토들에 접근하는가? 코스모폴리틱스는 우리를 이런 다양성을 향해 정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일련의 실천과 개념들을 제공한다.

 

3. 실천들의 생태학

 

제약과 의무 사이의 동역학을 다루는 한 가지 핵심 개념은 실천들의 생태학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태학"은 그저 유기체와 환경 사이가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무엇이든 존재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호작용들에 관한 연구를 가리키고, 그래서 여기서 상호작용들은 결코 단순히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항상 의미의 생산과 가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스탕제의 말을 인용하면, 생태학은 "다양체들, 별개의 인과 관계들 그리고 비지향적인 의미의 창조에 관한 과학"이다. 생태학을 인과성 자체에 관련시킴으로써 코스모폴리틱스는 생태적 관계들에 대하여 그 술어의 통상적인 과학적 용법으로 고찰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코스모스는 상호작용하는 존재자, 관념, 실천 그리고 기술들의 생태이다. 여기서 "실천들"은, 어떤 외부의 통일된 세계를 표상하거나 그것에 접속하기 위한 방법들과는 대조적으로, 어떤 공동체의 인간 구성원과 비인간 구성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들을 계발하는 방식들을 가리킨다. 종합하면 이런 항들은 가치들의 존재론에 이중 관계를 제시하는데, 어떤 실천들은 어떤 가치들을 생성하고, 어떤 가치들은 어떤 실천 종류들의 현존을 유지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관계망"으로부터의 "사회"의 창발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단의 가치들이 더 큰 존재들의 생태 내에서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한 번 이상 일어날 필요가 있는데, 즉, 그것은 반복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흔히 이것은 그것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독특한 하부구조, 전체적인 사회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지식은 연구자들이 마치 공평무사한 관찰자처럼 연구하는 세계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을 때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은 연구자들과 연구 주제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강력한 연결이다. 지식은 분류하고 분리하기보다 결부시키고 뒤얽는다. 지식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들을 증식하며, 개념과 관념들을 만들어내는 연구자들만큼이나 개념과 관념들이 연구자들을 포획하는 방식을 중시한다. 이것을 말하는 다른 한 방식은, 중성미자가 물리학자와 만남으로써 포획되고 변환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도 중성미자에 의해 포획되고 변환된다는 것이다. 일단 물리학자가 자신이 "중성미자"로 부른 존재자를 자각하게 되면, 그는 과학자로서의 실천의 범위와 역량들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존재자들의 목록에 이 존재자를 부가해야 한다. "코스모폴리틱스"의 "코스모스"는 한때 오로지 인간적인 사태로 간주되었던 "정치"에 진입하여 교란시켜 버렸다.

 

실천들의 생태가 얽힌 존재자들의 공(共)발명을 가리키는 한편으로, 그것은 이상적 평화 또는 포괄적 조화로 귀결되는 갈등하는 부분들의 합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가치 양태들 사이의 이런 합의의 결여가 상호적 관계 증진의 가능성을 차단하지는 않는다. 스탕제의 경우에 "공생적 협약"는 상이한 존재 양태들이 서로 안정하게 만드는 사건들을 서술한다. 어떤 실천이 그 실천을 안정화시키는 어떤 일단의 가치들을 유지할 때, 공생적 협약이 맺어진 것이다. 공생적 협약은 지식과 의사 결정의 윤리적 실천들과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의 실천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존재 양태들의 투쟁과 도전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책임감―"고통 분담"―을 요청한다.

 

오랫동안 특정적으로 인간적인 사태로 간주된 정치는 이제 생태적 환경에서 전지구적으로 연출되어야 하는데, 생태적 차이의 어떤 균질화도 삼가하며, 그 대신에 무엇이든 어떤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다양한 다수의 존재자들의 참여를 촉진해야 한다

 

4. 다수의 종, 기술 그리고 관념들

 

여태까지 우리는 주로 인간, 그들의 기술 그리고 지식을 구성하는 실천들에 의거하여 코스모폴리틱스를 서술했지만, 그 개념은 다수의 종에도 적용된다. 다종 코스모폴리틱스의 중심 성분은 인지동물행동학(cognitive ethology)―동물 마음에 관한 학문―이라는 점점 성장하고 있는 분야인데, 그것은 코스모폴리틱스가 독특한 방식들로 이끌어내고 복잡하게 만드는 분야이다.

 

초기 연구는 동물 마음의 존재조차도 의심했던 반면에, 더 최근의 접근 방식들은 비인간들이 생각, 느낌 그리고 정서를 비롯한 광범위한 인지 능력들, 기쁨, 즐거움, 고통 그리고 두려움의 경험과 더불어 기억, 미래 감각 그리고 개인적 선호 같은 더 복잡한 기능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동물 감지력의 실재성에 관한 연구와 그것의 수용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은 의식에 관한 케임브리지 선언(The Cambride Declaration of Consciousness)이다. 비인간들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선언은 지금까지 동물의 체험에 관한 연구를 저지한 인간중심주의와 싸우는 장정에 나서며, 그리고 이 점이 그 선언을 코스모폴리틱스의 핵심 동지로 만든다. 비인간 마음이라는 관념을 훨씬 더 멀리 가져가는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를 비롯한 다른 연구자들이 그 선언에 합류했다. 마굴리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의식이 있는, 적극적으로 소통하는...미시적 생명을 지적할 수 있다...지각, 자각, 추측 등의 과정들이 미시 세계, 즉 우리의 박테리아 조상들의 세분화될 수 있는 세계에서 진화했다." 인지동물행동학의 통찰을 진지하게 여기다면, 어떤 코스모폴리틱스의 실천도 진지하게 간주해야 하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생태계에 관한 새로운 견해를 찾아내게 된다. 박테리아에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들은 다양한 범위와 정도로 어느 수준의 마음 또는 감지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생태학자 알프 호른보그(Alf Hornborg)는 이 견해에 관해 성찰한다.

 

각 유기체와 종은 주변 세계를 지각하고 해석할 수 있는 자체의 역량 덕분에 현존한다. 생태계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외재하는 공학자의 마음의 반영으로서 자기 기능들을 무심히 실행하는 기계가 아니다. 생태계는 독자적인 주관적 세계의 렌즈를 통해서 서로 관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감지력을 갖춘 주체들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표현이다.

 

다종 코스모폴리틱스는 상이한 인간 실천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다수의 가치 세계들을 인식할 뿐 아니라, 비인간 종들의 얽힌 세계들에 속하는 가치 세계들도 인식한다.

 

매우 작은 것에서 매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중의 척도에서 도출된 인지동물생태학의 통찰들이 코스모폴리틱스에 중요한 기여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한 가지를 누락시켰다. 동물행동학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들에서는 흔히 인간 생태계와 인간 이상의 생태계들을 구성함에 있어서 무기적인 기술적 행위자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지구의 생태계들의 구성에 있어서 영향력이 있는 한 인자로서 기술은 인간 종과 비인간 종들의 공진화의 요인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여기서 코스모폴리틱스와 동반자 종에 관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작업이 특히 통찰력이 풍부하다. 지구의 배치에 있어서 기술이 수행하는 역할의 증가에 주목하면서 해러웨이는 "기술적 조립체들"이 독자적인 유형의 "종"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코스모폴리틱스가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생태가 가치 판단의 중심이면서 가치도 방출하는 유기체, 기술 그리고 비생물적 존재자들의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사회라는 점이다. 유기체 종에 못지 않게 기술도 주의할 필요가 있는 독자적인 가치, 제약 그리고 의무들의 체계들을 생성한다.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기술도 독자적인 내용이나 특징이 없는 가치중립적인 도구가 결코 아니다. 모든 종류의 기술―용도가 무엇이든 간에―은 역동적이고 생생한 행위자이고, 그래서 인간의 유용성에만 의거하여 이론화될 수 없는 일련의 예측 불가능한 제약, 요구 그리고 가능성들을 생성한다. 여기서 생태적 현상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초연한 관찰자들에 의해 높은 곳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종들―인간과 비인간,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친숙한 것과 섬뜩한 것을 비롯한 상황에 관여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물질적-기호적 연결망들에 참여하는―과 동반하는 행위에서 출현한다.

 

마지막으로, 코스모폴리틱스는 지식과 관념들의 생태가 수행하는 독특한 역할도 존중한다. 특히 스탕제는 인간과 인간의 실천들을 형성함에 있어서 지식―개념과 허구들을 포함하는―이 갖는 힘뿐 아니라 이런 실천들이 비인간 공동체들에 미치는 영향도 중시하기 위해 "지식 생태"를 "지식 경제"에 병합한다. 여기서 표현되는 착상은, 실천들의 생태가 상이한 활동들이 어떤 정체성, 사유, 관념 그리고 지식들을 고무하도록 다시 접히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서로 포획되어 서로에게 그리고 그것들을 전개하는 정신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가리킨다는 것이다. 지구는 관념과 개념들의 고뇌하는 생태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가 관념들을 포획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도 관념들에 포획되어 있다. 주요한 주장은, 해러웨이의 말을 인용하면, 관념들은 "자체적으로 탐구들을 추구하기 위한 기술이다. 관념들은 그저 실천들에 묻어 들어가 있지 않다. 그것들은 바로 상황에 처한 종류들의 기술적 실천들이다."

 

코스모폴리틱스라는 관념은 우리를 얼마나 멀리 데려갈 수 있는가? 그것은 사실과 가치, 자연과 문화, 비인간과 인간의 통합을 향하여 데려갈 수 있다. 그것은 공동 세계의 구성에 필요한 마찰과 투쟁에 대한 참여적 관여를 향하여 데려갈 수 있다. 그것은 지구의 모든 생태적 특이점들 사이의 관계들을 상호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정향된 대안적 지구화를 향하여 데려갈 수 있다. 그러므로 코스모폴리틱스는 인간 및 비인간의 실천과 생태들,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와 요구들 그리고 지식과 관념들의 생태의 영향력이 있는 행위 주체성의 얽힘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