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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제이콥스: 오늘의 에세이-근대성에 관한 세 가지 거대 서사

 

근대성에 관한 세 가지 거대 서사

The three big stories of modernity

 

―― 앨런 제이콥스(Alan Jacobs)

 

여태까지 근대성의 등장에 관한 영향력이 광범위한 세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해방주의적 서사, 프로테스탄트적 서사 그리고 신토마스주의적 서사가 그것들이다. 해방주의적 설명은, 근대성이란 근본적으로 권력에 굶주린 교회와 종교적 미신에의 예속으로부터 유럽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재발견된 고전적 학문, 특히 문학적 및 철학적 양식으로서의 회의주의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학문을 사용한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적 설명은, 근대성이란 재발견된 성서적 언어들이 수 세기 동안 그런 동일한 권력에 굶주린 성직자들과 스콜라 철학의 몽매주의적 현학 취미에 의해 은폐되었던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람들을 다시 연결시킨 순간을 특징짓는다고 주장한다. 신토마스주의적 설명은, 다른 사람들이 해방 또는 구출로 그리는 것이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비극, 즉 결점은 있었지만 중세 전성기에 여러 세대의 상층 계급 및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큰 도움, 평안 그리고 이해를 제공했던 사유, 느낌 그리고 행위의 통일―단테의 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그리고 당대의 거대한 성당들에서 명백한―을 이루어내었었던 교회에 대한 부당한 반란이었다고 주장한다.

 

해방주의자들의 비종교와 옳지 않은 절단된 "인간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신토마스주의자들은 프로테스탄트들과 의견이 일치한다. 성직자의 능력, 미신 그리고 신토마스주의자들의 진보에 대한 적대감을 비난하는 점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해방주의자들에 합류한다. 신토마스주의자들과 해방주의자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이도저도 아니며, 종교적이지도 않고 세속적이지도 않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이런 설명들은 모두 오백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대중적 형태와 학술적 형태로 모두 살아 남았다. 프로테스탄트 해설은 최근에 N. T. 라이트(Wright)에 의해 산출된 예수와 바울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떠받친다. 신토마스주의적 설명[이십 세기 초에 자크 마르탱(Jacques Martin)과 에티엔 질송(Etienne Gilson)에 의해 가정 철저히 표명된]은 영국 성공회 집단과 브래드 그레고리(Brad Gregory) 같은 가톨릭 학자들처럼 다양한 학자들의 저작에서 지속된다. 고전적 판본의 해방주의적 설명,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의 <<1417년, 근대의 탄생(The Swerve)>>은 최근에 퓰리처 상과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다.

 

세 가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는 듯 보일 것이지만, 사실상 그것들 모두는 단일한 지배적인 관념, 즉 칠십 년 전에 영향력이 있던 신토마스주의자인 시카고 대학의 리처드 위버(Richard Weaver)가 진술한 테제―관념은 결과를 낳는다(Ideas Have Consequencies)―을 신봉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중의 확장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그것들이 공유하는 신념들을 제시할 수 있다. (a) 오백 년 전에 출현했던 (b) 철학적 및 신학적 관념들은 오늘날 서양인들의 모습에 대하여 가장 필수적인 것들이다. 즉, 근대성에 관한 이 모든 서사들은 현 시대를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벌인 500년 묵은 논쟁들의 영향이 여전히 미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이 서사들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틀린 까닭은 그것들이 역사적 중요성과 다른 대학 학자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대학 학자들의 산물이며, 그리고 그들은 물질적 세계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관념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거대 서사들은 모두 파기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것들은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더 특수하고, 덜 포괄적이며, 더 기술중심적인 서사들로 교체되어야 한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인간의 확장"이라고 부른 기술은, 좋든 나쁘든 간에, 성경 해석자들과 강단인들의 논쟁들보다 인간의 이야기에 무한히 더 중요하다. 근대인의 출현에 관한 거대 서사 대신에 우리는 훨씬 더 다원적인 것, 즉 근대성에 관한 기술적 역사들(technological histories of modernity)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런 역사들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방대한 과업이 될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가장 유사한 것은 조지프 니덤(Joseph Needam)이 기획하고 수십 년 동안 편집했던 27권의 연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1954-2008)일 것이다. 또는, 거대한 규모로, 린 손다이크(Lynn Thorndike)의 <<마술과 실험 과학의 역사(A History of Magic and Experimental Science)>>(8권, 1923-58)일 것인데, 손다이크의 기획은 오늘날 낡았지만 사실상 내가 생각하기에 전해질 필요가 있는 이야기의 일부이다. 물론, 근대성에 관한 기술적 역사의 다른 글들이 이미 존재하는데, 책의 역사라는 번성하는 분과학문에서, 다양한 경제사 및 사회사에서, <<패턴 랭귀지(A Pattern Language)>>와 폴 스타(Paul Starr)의 <<매체의 창조(The Creation of the Media)>>와 로이 포터(Roy Porter)의 <<인류에 대한 가장 큰 혜택(The Greatest Benifit to Mankind)>> 같은 책들에서 존재한다.

 

포터가 일찍 죽지 않았었더라면 그는 전체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최적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이 대단히 잘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거대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근대성이 어떻게 발생했고, 중세 후기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관한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물질중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신학적 및 철학적 관념들을 강조하고 경제 및 기술에 주목하지 않은 세 가지 거대 서사가 충분히 오랫동안, 너무나 충분히 오랫동안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