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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다윈이라는 트라우마

 

- 아래 글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iant)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 <다윈이라는 트라우마(The Trauma of Darwin)>의 일부를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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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교의 인간 중심성에 영향을 미치는 다윈이라는] 트라우마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진화는 모든 종이 유전가능성, 돌연변이, 그리고 자연선택의 우발적 사건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종은 우연의 산물이며, 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어떤 시점에서도 진화가 진행될 수 있는 다양한 다른 방향들이 있으며, 이런 방향들을 결정하는 자연선택의 과정들은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그것들은 달랐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고 밀접하게 관련된 방식으로, 진화는 본원적으로 목적이 없다. 진화에는 아무 목표나 목적이 없다. 예를 들면, 자연선택의 계보가 결국은 인간들을 산출하게 되는 것은 전혀 불가피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네안다르탈인이 결국은 선택받았었을 수 있었거나, 또는 유인원의 계보가 보노보로 끝났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 가지 거대한 종분화 원리가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 틀에서 모든 종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인간들도 결국은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고, 이 다른 무언가는 "더 고등한" 존재이거나 "더 지능적인" 존재일 필요가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무엇이든 언어나 합리성 또는 지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자체 환경의 도전과 맞붙어 싸울 다른 방식들을 발견한, 우리로부터 유래한 종일 수 있을 것이다. 진화는 종에 있어서 더 큰 복잡성을 생성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진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보를 재는 그런 종류의 척도에 따라 "더 고등한" 존재들을 생성한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진화는 본원적으로 반(反)위계적이다. 존재의 거대한 연쇄라는 존재론은 가장 하등의 것에서 신까지의 위계를 상정하는 반면에, 다윈의 경우에는 모든 유기체가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에 있다. 박쥐가 인간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자체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한 가지 방식을 "발견했다." 진화는 "더 좋아지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신조가 무엇이든 가능한 어떤 방식으로 일신교적 종교들의 신학에 부합될 수 있는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전통들은 모두 인간들의 현존과 관련된 필연적인 무언가가 있고(우리의 창조가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 목적이 있으며, 인간들이 존재 내에서 여타의 존재자들의 지위와 존재론적으로 종류가 다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우리의 현존이 특권적이고 특별한 현존이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진화가 의심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주장이다. 이런 신조는 우리가 스스로 목표를 상정하여 그것을 향해 지향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는 목적이나 목표를 갖는 내재적 원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