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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오늘의 에세이-개념과 역량: 지식의 생태학

 

개념과 역량: 지식의 생태학

Concept and Capacity: The Ecology of Knowledge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이 논문에서 나는 묻는다. 관념이란 무엇인가? 내 목적은 어떤 관념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사유, 행위 그리고 지각 사이에 맺어지는 생태적 관계들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내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 나는 마음의 철학, 특히 발제주의(enactivism)의 문헌을 활용하여 지식이란 관여 기술이라고 제안한다. 지식은 다중의 종, 실천 그리고 기술의 배치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대조들에 대한 적응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개념화를 사변적 역량, 즉 주체를 직접성을 넘어서 현존하는 것들에 의해 가능해진 차이의 공간들로 도약시키는 육체의 수행이다. 나는 생태적 지식관이 일인칭 경험의 윤리와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넌지시 주장함으로써 결론을 맺는다.

 

발제주의

 

발제주의로 알려져 있는 틀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발제주의를 소개하기 위해 나는 함께 고려하면 인지에 대한 발제주의적 접근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네 가지 핵심 개념을 서술한다. 이런 개념들은 육화(embodiemnt), 자율성(autonomy), 체험(lived experience) 그리고 감각 형성(sense-making)을 포함한다.

 

발제주의적 틀 내에서는 주변 환경에 대한 살아 있는 육체의 관여가 중요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뇌는 인지의 가능성에 대한 필요하지만 불충분한 조건인데, 한편으로는 뇌의 활동이 육체의 행위들에 밀접히 의존하고 관련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가 자체의 주변 환경에 대한 개입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화된 마음의 견해는 확장된 마음의 견해이기도 하다. 이 설명에 따르면, 마음은 뇌를 포함하는 육체와 육체 행위를 대면하는 환경 사이에 개입하는, 조정이 가능하고 맥락 특정적인 관여이다.

 

자율성도 발제주의에 중요하다. 이 맥락에서 자율성은 유기체의 적응 역량 및 자기조직화 역량을 가리킨다. 모든 유기체는 연속적인 재생산과 유지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조직된다. 유기체는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추진되어야 하는 다양한 신진대사 및 발달 과정들을 통해서 어떤 진행 중인 방식으로 자체의 현존을 획득한다. 여기서 한 가지 따름 정리는, 각 유기체는 그것을 자체의 의미 감각 내부로부터 목적을 생성하는 가치의 중심으로 만드는 내재적 이유―기본적인 이기심 또는 목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유기체의 행동은 이런 욕구, 가치 그리고 관심사에 의거하여 이해될 수 있다.

 

세 번째 개념은 체험이다. 내 독법에 다르면, 체험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발제주의에 중요하다. 나는 첫 번째 이유를 실존적 정언 명령이라고 부른다. 그것 덕분에 연구자들이 현상적 의식의 관점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일인칭 설명과 더불어 물리적 과정으로서의 인지에 관한 삼인칭 설명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한에 있어서 실존적 정언 명령은 중요하다. 다음 절에서 더 자세히 서술될 것처럼, 지각은 계발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고, 그래서 그런 계발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들―사색 및 종교적 실천, 실험, 습득된 노하우, 현상학, 예술, 음악, 체육 등―이 세계에 대한 육체의 관여에 중요한데, 바로 이런 역량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변 환경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째 이유를 실천적 정언 명령이라고 부른다. 실천적 정언 명령은, 지각은 감각적 정보의 수동적인 수용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세계에서 생명 형태가 차지하고 있는 입지에 연루된 일종의 관여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발제주의가 취하는 입장을 가리킨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각은 유기체의 상태를 변형시키는 결과를 낳는 지각 대상에 대한 능동적인 관여 과정이다. 실천적 정언 명령은, 일인칭 경험에서 유기체에 의해 사용되는 관여 양태가 삼인칭 서술로 표현되는 유기체의 조직화의 성분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는 한 방식은, 일인칭 경험은 인지 과정들의 부수 현상이 아니라, 유기체가 자체의 생리학적 조직의 층위에서 환경을 이해하고 그것에 관여하게 되는 절차들에 실제로 참여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천적 정언 명령은 발제주의의 네 번째 핵심 개념, 즉 감각 형성을 서술함으로서 더 잘 옹호될 것이다. 감각 형성은 어떤 관점으로 유의미한 세계를 발제할 수 있는 유기체의 역량을 가리킨다. 발제주의자는 감각 형성을 두 가지 얽혀 있는 과정들로 구성된 역량으로 간주한다. 첫째, 감각 형성은 대조, 판별 그리고 범주화를 위한 차별적 능력을 포함한다. 둘째, 감각 형성은 적실성을 식별하고, 흥미를 보이며,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평가적 능력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감각 형성은 정동, 즉 타자들에 흥미를 보이고 타자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과 인지, 즉 다양한 행위자들과의 만남과 관련된 실용적 추리를 해낼 수 있는 능력 둘 다를 필요로 한다.

 

발제주의적 견해가 제시하는 것은, 평가 역량, 즉 환경 속에서 의미를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은 신체적 이해의 기본 유형이라는 점인데, 여기서 이해는 객체를 파악하기 위한 지각, 정동 그리고 인지의 조정으로 규정된다. 즉, 가치와 의미의 발제는 육체의 지능 속에 중심을 두게 된다. 유기체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역량에 덧붙여, 감각 형성은 대체로 집단적 또는 다종적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감각 형성은 흔히 참여적 감각 형성, 즉 다수의 종을 가로지르는 조정과 호혜성을 필요로 하는 간(間)주체적 발제 과정이다.

 

현전의 다양성

 

육화, 자율성, 체험 그리고 감각 형성이라는 네 가지 개념은 우리를 인지에 관한 알바 노에(Alva Noe)의 해설의 궤도로 데려다 준다. 오성을 언어를 담지하고 있는 유기체들의 담론적 역량으로 간주하는 접근 방식들과 대조적으로, 오성에 대한 노에의 접근 방식은 고층위의 인지 능력들에 한정되어 있지도 않고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에, 노에는 신체적 기술의 층위에서 한 가지 오성 양태를 예화하는 접근 방식을 제시하며, 그리고 이것은 모든 유기체들이 어떤 관점으로부터 유의미한 세계에 관여한다는 발제주의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노에의 제안은, 이해를 무엇이든 세계를 의식에 노출시키는 활동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성을 오로지 언어적 능력 또는 추상적 추리 능력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노출 능력과 동일시함으로써 노에는 능력의 양태적 초점의 다원성에 놓여 있는 지각관을 제기한다. 어떤 노출 양태들은 본성상 인지적이거나 언어적이고, 다른 노출 양태들은 본성상 신체적이거나 지각적이다. 노에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접근 방식들 각각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현상을 노출시키고 그것에 관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들 각각은 하나의 관여 양태 또는 양식이다.

 

노에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유기체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유기체가 어느 정도의 이해 역량을 갖출 수 있고, 그래서 결국 이것 덕분에 의미, 가치, 중요성이라는 범주들을 생태적 및 진화적 과정에 기본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생태에 관한 더 완전한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유기체의 육체의 층위에서 지각과 이해를 관련시킴으로써 노에는 많은 유형들의 이해와 파악이 추상적 추리나 담론적 추리의 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시사한다.

 

노에의 경우에, 추상적 사유는 물리적 운동과 꼭 마찬가지로 현상에 대한 접근 양식이고, 두 접근 양식은 육체 속에서 얽혀 있다. 여기서 노에가 시사하는 바는, 아는 마음은 움직이는 몸과 종류에 있어서 상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노에는 이렇게 적는다. "사유는 지각에 선행하지 않는다. 지각도 사유에 선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유는 경험에 선행하지 않는다. 경험 자체가 일종의 사유이다." 지각은 사유와 같거나 사유는 지각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둘 다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 무엇이 현시되고 무엇이 현시되지 않는지 파악하기 위한 능숙한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지각의 사유 같은 본성과 사유의 지각 같은 본성을 강조함으로써 노에는 심미적 경험이 모든 지각적 경험의 범형적 사례라고 시사한다. 경험을 한다는 것은 심미적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접근 양식들에 관한 노에의 작업은 현상적 자각이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습득되는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갖출 수 있는 역능이라기보다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공예 또는 기술과 같다. 현상적 자각에서 드러나는 것은 부분적으로 주변 환경에서 입수할 수 있는 현상에 관여하는 데 사용하는 지각의 기술들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과 우리 의식 속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성에 대한 발제주의자의 강조를 유지할 때, 문제가 되는 현상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에 종속될 수 없다.

 

그렇다면, 개념에 관해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은 사물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관계를 획득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우선 지각과 행위를 분류하는 인과적 관계들을 재구성하는 식으로 지각과 행위에 새로운 종류들의 대조를 도입하는 방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조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대단히 많은 세부 사항들을 탐지하고, 그런 세부 사항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런 세부 사항들에 작용하기 위한 그런 식으로 육체를 분절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개념은 상호작용을 위한 역량을 발제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감각 형성을 위한 능력은 모든 유기체들에게 중요한 듯 보이는 반면에, 새로운 개념들의 능숙한 사용을 통해서 지각을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은 소수의 유기체들에게만 고유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인간에게서 특히 명백한 힘인 듯 보인다.

 

지식과 경험

 

우리가 이해했듯이, 발제주의자의 목적은 먼저 유기체의 조직 역량에 있어서 생물체에 의해 수행되는 역할을 고려하는 것이다. 육체들의 조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발제주의자는, 경험 형식들은 종 특정적인 것으로서 유기체에 상대적인 시간, 공간 그리고 의미를 표현하며, 그리고 그 속에서 각각의 외양이 역동적인 살아 있는 육체로서의 유기체의 조직화와 관련을 맺게 되는 가능한 경험 양태들의 다양성을 구성한다고 넌지시 주장한다. 표면상, 이 설명은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제시한 경험에 관한 설명과 매우 유사한 듯 보인다.

 

예를 들면, 칸트적 틀에서는 사물들이 경험에 주어지는 조건이 그것들이 사유되는 조건에 선행하지만, 사물들이 사유되는 방식이 사물들이 경험에 주어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칸트주의자의 경우에 문제는 현상이 사유의 대상(개념)에서 경험의 대상(직관)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의문이다. 즉, 새로운 개념적 능력이 어떻게 감각적 경험에 이르게 되는가? 칸트의 체계에서 경험적 개념들, 즉 경험에서 도출되는 개념들은 표상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과거 표상들을 재고함으로써, 다중의 사례들에 공통적인 특수자들을 추상함으로써, 그리고 현상 집합들에 관한 판단 또는 규범적 평가를 내림으로써 배치된다. 반면에, 선험적 미학에서 표현되는, 직관 형식들(시간과 공간)을 비롯한 선험적 개념들과 선험적 분석학에서 표현되는 오성 범주들은, 그것들의 이름들이 함축하듯이, 선험적인 것, 즉 경험에서 도출되지도 않고 경험 내에서 발견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유와 경험이 일어날 수 있기 전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선험적인 것은 전통적인 칸트적 의미에서 형식적 구조 또는 보편적 구조일 수가 없다. 생태적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명확히 비칸트적인 방식으로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을 얽어매도록 간청한다고 나는 제기한다. 칸트적인 선험적 접근 방식을 생태적 자각에 비추어 재개념화할 수 있으려면, 행동에 대한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된 원인들은 존재하지 않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대신에, 맥락 의존적이고 가변적인, 행위에 대한 유연하게 조달된 원형들이 존재한다. 이런 견해에서 바라보면, 유기체들은 자연 법칙에 의해 부과된 선험적인 범주 또는 직관들의 담지자들이라기보다는 한정되어 있지만 가소성을 지닌 관여 공간 안에서 출현하는, 막대하지만 유한한 수의 생리학적 가능태들의 부드러운 조립체 또는 복합체들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적 틀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칸트적 틀의 다양한 양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움이 된다. 직관은 개념에 감각 소여를 제공하고 개념은 직관에 조직을 제공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개념 없는 직관은 판별되지 않은 날것의 감각 인상들―숲, 꽃 그리고 비가 아니라 색깔, 냄새 그리고 소리의 조각들―만 남길 것이다. 개념은 감각 소여가 현상적 의식 속에 출현하기에 앞서 그것들을 종합하는 수단이거나, 또는 더 잘 서술하면, 개념은 현상적 권역 속에 새로운 종합적 대조들을 가져다줄 수 있는 수단이다.

 

그렇다면, 개념과 직관에 대한 생태적 접근방식의 한 가지 결과는 인간 육체는 언제나 획득된 지식과 물리적 지각의 교차점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은 육체는 결코, 정보를 그저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사물을 적나라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에 보게 되는 것은, 특수한 세부와 특질들에 주목한 채, 그리고 다른 특징들보다 어떤 특징들에 관심을 기울인 채,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을 육체에게 부여하는 그것에 관한 입수 가능한 지식과 결합된 현상이다. 이런 교차점을 시각화하는 한 가지 방식은, 현상적 의식을 지금까지 획득할 수 있었던 지식 및 경험과 결합된 육체가 수행하는 신체적 행위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유기체들은 지각과 인지적 활동을 얽어맨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은 그것이 의식에 현시되는 데 도움을 주는 육체의 지식 생태 안에 주어진다. 앎과 감각하기가 서로 연결되는 이런 맥락에서 지식은 개념적 역량, 즉 유의미한 방식으로 차이와 대조에 관여할 수 있는 능력의 획득을 나타낸다. 지식의 생태는 개념과 감각이 교차하는 공간, 즉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어떤 주체를 주체로 산출하는 데 참여하는 현상적 감각계를 가리킨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자기(self)는 자체적으로 하나의 성취 또는 실천이다. 그것은 발제 습관이다. 톰슨(Thompson)도 이런 활동을 "자기 형성(I-making)"으로 불렀는데, 이 활동은 시간과 공간에 걸쳐 지속되는 "나"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하여 자체를 사유하는 자와 행위하는 자로 간주하게 되는 과정이다. 자기 개념은 자체적으로 습득된 기술, 어느 곳에 정위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방식으로 비자기(non-self)로부터 자기를 판별하는 대조들에 대한 조율인데, 어떤 특정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의 생태 안에 무리를 이루게 된다. 자기는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궤적과 유사하다.

 

개념에서 역량으로

 

이제 문제는 개념적 이해가 어떻게 경험적 관찰로 변화되는가라는 의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경험적 관찰을 개체들을 가로질러 매우 가변적인 것으로 만드는 역량의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새로운 지각 양태들이 습득될 수 있다는 것은 식물학자, 화가 또는 건축가의 경험적 관찰들이 문외한의 경험적 관찰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서 명백하다. 이런저런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는 경험적 관찰에 특별한 정교함의 감각, 즉 훈련되지 않은 눈이 갖추고 있는 판별 역량을 넘어서는 일단의 지식, 훈련 그리고 경험을 부여한다.

 

이런 판별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어떻게 식물학자, 화가 또는 건축가가 되는가? 각 기술에 요구되는 역량들로 경험적 관찰을 운반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작용들은 무엇인가? 각 경우에, 훈련 과정은 수많은 기계, 장비 그리고 제도 및 수많은 정향된 실천과 행동을 포함할 뿐 아니라, 관념들과 관련된 실질적인 이론적 처신도 포함한다. 관념들과 관련된 처신은 실천에 선행하지도 않고 실천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에, 이런 처신은 경험적 실천과 환경적 어포던스의 한계 내에서, 추동과 현실의 흐름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학습이라는 과업은 대체로 반복과 실천을 촉진하는 공간들의 생산을 통해서 실재계의 흐름을 유도하는 것에 근거를 둔다. 반복과 실천은 결국 개념의 내부화를 통해서 육체의 변형을 고무한다. 생태적 맥락에서 학습은 지각 역량의 안정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인데, 여기서 지각은 판별과 연결을 위한 어떤 역량들의 발제된 수행이다. 개념이 진입하여 훈련받은 개체의 경험적 기술 꾸러미의 일부가 된다. 노에의 표현에 따르면, "개념은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한 기법이다. 개념은 행위를 위한 연장 또는 기법이다."

 

다시 말해서, 개념화는 사변적 기술로서 주체를 직접성을 넘어서 현존하는 것들에 의해 가능해진 차이의 공간들로 도약시키는 육체의 수행이다. 개념은 특정한 유형들의 대조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육체가 지각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다양성에 있어서 개념들은 인간 유기체의 조직들과 교차하는 여러 층위들의 학습된 정교화 역량들이다. 개념들은 관심의 새로운 스펙트럼들을 발달시키고, 이전에는 입수할 수 없었던 의사 결정을 위한 벡터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학습은 지식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그리고 미각을 횡단하여 가로지르는 생태적 공간을 특징짓는다. 이것은, 지식이 인간 육체의 감각적 체계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별개의 표상 층위가 아니라, 오히려 지각 자체의 조직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은 물질적 현상이고, 학습은 생태적 사건이며, 그리고 둘 다 지각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렇다면 개념과 감각의 교차는 지식과 지식이 유기체와 맺는 관계들에 대한 생태적 이해를 위한 기초이다.

 

상황적 개념화

 

경험적 연구는 지식과 개념적 능력이 육체의 조직화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관념을 뒷받침한다. 지식은 지식 획득과 관련된 새로운 신경 연결들과 지각적 범주화와 관련된 신경 조직의 구성을 통해서 육체 속에 현시된다. 다른 연구들은 개념화 능력, 개념화에 있어서 상황적 맥락의 역할 그리고 다양한 개념 종류들과 어휘적 조직 사이에 대응하는 관계들의 지도를 그렸다. 또한 신경과학자들은 개념들이 다른 존재자들의 행동에 관한 지식을 육화하고, 추상적, 범주적 표상들의 신경적 기초에 준거하며, 그리고 사건들의 기본적 특성들을 탐지하고 사건들을 일반화된 집합들로 저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약하면. 개념은 뇌의 양상 특정적 영역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육체적 조직의 유연하고 분산된 양태이고, 지각과 행위에서 육화되는 의미론적 지식을 구성하며, 그리고 감각 경험의 조직화를 보증하고 환경 내에서의 행위를 인도한다. 개념은 마음에 관계와 차별화의 새로운 경로를 구성하고, 육체를 형성하며, 육체를 대조에 조율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런 경로는 현상의 역동적 파악에 이르는 것의 일부로서 생태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채택된다.

 

개념의 생태적 본성을 수용할 때, 우리는 개념 구상에 관한 고전적 견해도 대면할 것이다. 필요충분 조건―즉, 무모순성의 법칙(어느 것도 A인 동시에 A가 아닐 수 없다), 동일성의 법칙(무엇이든 A는 A이다) 그리고 배중률(모든 것은 A이거나 아니면 A가 아니다)―에 의거하고 있는 고전적 개념 구상은 확률과 사용에 기반을 둔 개념에 관한 상황적 견해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개념의 의미는 국소적 문제이다. 개념화는 항상 상황적 개념화이다. 개념적 역량은 과거 사건들의 기억 또는 기록이 결코 아니라, 조직화와 분화의 양태라는 점이 중요하다. 개념은 경험의 배열과 육체의 재조직에 있어서 능동적이다.

 

개념이 우리가 다른 행위자들과 맺는 상호작용에 작용할 수 있는 한 방식이고, 이런 작용이 우리의 현상적 의식 속에 매우 다양한 현전을 실현할 수 있다면, 개념적 획득을 통해서 육체의 감성들을 명확히 하는 것은 육체로 하여금 환경 내의 더 많은 세부 사항들을 탐지할 수 있게 만든다. 또는 더 간단히 서술하면, 지각은 더 많은 다수의 현상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는 고양된 대조들과 증가된 층위들의 차별적 세부 사항들의 생태이다. 내재화된 개념, 즉 개념의 육체적 역량으로의 신진대사화는 특수자들 사이에서 분별하고 판정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지식은 새로운 운동과 정통한 판단을 위한 자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개념을 학습한다는 것은 유기체를 새로운 양식의 조직으로 접는 것이다. 철학자가 새로운 관념―화이트헤드가 서술하듯이, 새로운 대안―을 도입할 때, 안정된 단위의 지식 또는 정보의 획득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육체의 새로운 재조직화에 관해 말하는 것이 더 낫다. 관념은 일종의 육체의 변신을 위한 가능성을 나타낸다. 관념은 차이와 대조를 도입함으로써 지각이 입수할 수 있는 특징들의 수를 배가한다. 여기서 관념은 육체의 현존하는 역량들의 매트릭스를 만나서 병합되어 오성의 형태를 새로운 의식 체제로 변형시키고, 새로운 접근 양식들을 가능하게 만들며, 관심, 주의 그리고 의사 결정의 의미론적 지형도에서 특이하게 되는 것을 변화시킨다. 관념은 현상적 의식을 발제하기 때문에 육체의 성취이다. 그것은 경험을 조직하고 세계 속에서 행위를 인도하는 지식 양태이다.

 

결론

 

이 논문에서 나는, 육화, 자율성, 체험 그리고 감각 형성을 비롯한 발제주의에 중요한 핵심 개념들을 검토했다. 그 다음에 나는 노출로서의 이해에 관한 알바 노에의 설명을 서술했는데, 그것 덕분에 우리는 지각, 운동 그리고 사유가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 그리고 존재해야 하는 것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들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노에의 노출 설명을 수용하면서 나는 개념은 현상적 의식에 새로운 대조들을 도입할 수 있는 역량이라고 넌지시 주장했다. 개념은 새로운 관여 양태들이 가능하게 되도록 육체에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노에의 의미에서, 개념은 현상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부 사항들을 파악하기 위한 기법, 도구이면서 또한 그것을 넘어선다. 또한 개념은 변형 기법, 즉 사유라는 기법을 통해서 개체를 변형시키는 힘이다. 이사벨 스탕제의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개념은 사유 행위 속에서 제작자를 만드는 사유의 실천이다. 스탕제의 사유의 이런 자기 형성 차원은 그가 실천의 생태라고 부르는 것, 즉 우리 자신의 관여 양태들에 의해 우리가 포획되고 변형되는 방식들에서 실현된다. 독자적인 관여 양태에 그런 개념적 노출을 실행할 수 있는 유기체는 총체적인 진화적 그림 안에서 독특한 장소, 즉 현상적 의식의 양태로 물질이 개념이 되는 장소이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주로 서술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사유, 행위 그리고 지각에 관한 생태적 설명이 윤리적 및 정치적 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의 제약 때문에 여기서 나는 이런 주제들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지만, 미래의 작업에서 내 목적은 일인칭 기술들―감각운동적 기술, 경험관측적 기술 그리고 이 논문에서 탐구된 개념적 기술―이 자원의 지리적 분포와 다른 육체들에 대한 어떤 육체들의 정치적 우선 순위화와 깊이 결부되어 있고 그것들에 의해 입수 가능해지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일 것이다. 이 논문에서 제기된 논증들을 결합시키면 나는, 아마도 후속 논의를 여는 글로서, 일인칭 경험이 본성상 미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지각과 행위에 대한 윤리학, 즉 정치체를 인간 유기체의 생리학 수준까지 추동하는 것이 구체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