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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버논: 오피니언-2012년 가장 경멸받은 과학 책

 

2012년 가장 경멸받은 과학 책은 ... 읽을 가치가 있다

 

―― 마크 버논(Mark Vernon)

 

매년 나는 가장 경멸받은 올해의 책에 상을 수여한다. 2010년 상은 <<다윈이 잘못 이해했던(What Darwin Got Wrong)>>을 출판한 공로로 제리 포더(Jerry Fodor)와 마시모 피아텔리 팔마리니(Massimo Piattelli-Palmarini)에게 수여되었다. 2011년에는 레이먼드 탤리스(Raymond Tallis)가 <<인간 흉내내기(Aping Mankind)>>로 수상했다.

 

올해 2위는 루퍼트 셀드레이크(Rupert Sheldrake)의 <<만들어진 과학(The Science Delusion)>>인데, 사실상 과학주의적 독단론을 비판하는 책으로 두드러지게 근사한 대접도 받았다.

 

그래서 2012년의 수상자는 <<마음과 우주(Mind and Cosmos)>>를 출판한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일 수밖에 없다.

 

그 책을 자신의 트위트에서 "한때 위대했던 사상가의 조악한 추리"로 서술했을 때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실날 같은 찬사를 담고 그 책을 혹평했다. 제리 코인(Jerry Coyne)은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네이글은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의 길을 간다." 그것은 닉 클레그(Nick Clegg)에 비유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 네이글의 등에는 그들을 찌르고 채찍질하여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비난은 특히 불공정한데, 그 책은 주의깊음, 진지함, 그리고 이성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셀드레이크를 읽으면 대담성을 느끼고, 탤리스를 읽으면 짜릿함을 느끼며, 포더를 읽는 것은 가치가 있지만 고역이라면, 네이글을 읽는 것은 전에는 존재한다고 알지 못했던 정돈된 밝은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마치 그의 심장이 그의 머리에 말하는 것과 같고, 나는 유물론적 환원론이 옳지 않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그의 심장에 말했다. 좋아. 새롭게 바라보자. 그렇다면 무엇이 공격을 유발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주장, 즉  진화가 의식을 향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고려하자. 네이글은 자신이 설계자를 지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그는 과학이 목적론적 추세가 자연에 내재할 가능성을 향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 진화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목적론은 주요한 금기다. 목표지향적 설명들은 자동적으로 다윈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한다.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읽으면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찬양했듯이,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목적론의 한 측면이 있었는데, 이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루어졌는가? 이것은 논의할 여지가 있는 문제다.

 

이 영역에 접근할 때는 과학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예민해진다. <프로스펙트(Prospect)>에 발표된, 네이글의 책이 촉발했던 반응에 관한 말콤 손다이크 니콜슨(Malcolm Thorndike Nicholson)의 군형 잡힌 글을 읽어보라. 어떤 식으로 우주가 의식이 있게 되기를 원할 가능성은 "터무니없거"나 "이상한" 듯 보일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그런데 그가 꼭 그렇게 이어서 말하지는 않지만, 그 불안을 견뎌라. 그리고 논변을 생각하라.

 

여러분이 선전을 용인한다면, 일련의 팟캐스트에서 나는 루퍼트 셀드레이크와 그것들 가운데 일부를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정결한 과학 집단들에서도 그것들이 공표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최근의 일례는 폴 데이비스(Paul Davies)의 베스트셀러 <<골디록 수수께끼(The Goldilocks Enigma)>>다. 데이비스는 자연목적론(natural teleology)의 거부가 자연은 우주의 구조에 쓰여진 법칙들을 따른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양자물리학은 이것이 그렇다고 의심할 모든 이유를 제공한다. 요지는 데이비스 자신이 "생명 원리"를 포함하는 우주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주론자들 사이에서 목적론은 어떻게 수용할 만하게 되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과학의 기본 가정들이 정기적으로 전복되는 데 익숙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생물학은 1859년 이래로 매우 잘 운영되었다. 생물학을 의문시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파괴이자 위험한 행위로 느껴진다. 그래서 <네이션(Nation)>에 네이글의 책에 대한 서평을 발표한 브라이언 레이터(Brian Leiter)와 마이클 와이스버그(Michael Weisberg)는 초자연주의라는 유령을 불러낸다. 그리고 <뉴 스테이츠먼(New Statesman)>에 서평을 발표한 사이먼 블랙번(Simon Blackburn)은 농담삼아 이렇게 말했다. "철학적 바티칸이 있다면, 이 책은 <<금서 목록>>에 올라갈 훌륭한 후보일 것이다".

 

그것은 반은 농조로 쓰여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순수 논변이다. 메리 더글러스(Mary Douglas)가 지적했듯이, 세속적 사회들은 허용 가능한 것들을 유지하고 위협적인 것들을 배제하기 위해 여전히 상징적 경계들을 설정한다. 그 경계들을 넘어가는 자들은 추방당할 위험이 있다. 공적인 검토의 매체 의례가 하나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서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이 최근에 적었듯이, 현대의 철학자들은 과학에 너무나 낮게 고개를 숙이는데, 대체로 그들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그들의 선행자들을 매우 위대하게 만들었던 요소들―역사, 문학, 종교에 의해 보존된 진리들―과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2년 수상은 당연하다. 격렬한 반대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