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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설리: 오늘의 에세이-우주적 진화와 삶의 의미

 

우주적 진화와 삶의 의미

Cosmic evolution and the meaning of life

 

―― 존 G. 메설리(John G. Messerly)

 

진화―우주적, 생물학적 그리고 문화적―속에 삶은 유의미하다거나, 삶은 유의미해지고 있다거나, 또는 점점 더 유의미해지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추세들이 존재하는가? 진화에 진보적 방향이 존재할지도 모르고, 우리가 진화함에 따라 우주의 유의미한 종말론이 점진적으로  전개될지도 모르며, 그리고 우리는 이런 전개를 서술하는 우주적 전망을 명확히 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적 진보는 존재했는가?

 

진화적 진보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생물학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한편으로는 더 최근의 생물학적 형태들이 더 고등한 듯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해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문제에 관한 다윈의 견해는 티모시 섀너한(Timothy Shanahan)이 다음과 같이 멋지게 요약한다. "다윈은 필연적인 진행 법칙으로 결정되는 것으로서의 진화적 진보에 관한 어떤 관념도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특정한 환경 내에서 작동하는 자연 선택의 우연한 결과로서의 진화적 진보는 수용했다." 이것은 다윈 자신의 말과 잘 들어맞는다.

 

"오늘날의 생명 형태들이 옛 생명 형태들보다 더 고등하게 발달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그런데 내 이론에 따르면, 한 가지 특수한 의미에서 더 최근의 생명 형태들이 더 옛날의 생명 형태들보다 더 고등해야 한다. 각각의 새로운 종은 선행하는 다른 생명 형태들보다 생존 투쟁에서 어떤 이점을 지니고 있었던 연유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의 패배한 생명 형태들에 비해서, 이런 개선 과정이 뚜렷하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더 최근의 승리한 생명 형태들의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진보를 시험할 어떤 방법도 알지 못한다."

 

생물학적 진보라는 관념에 대한 가장 떠들썩한 비판가는, 우리가 생물학적 역사를 이해하려면 진보는 대체되어야 하는, 시험 불가능한 짜증나는 관념이라고 생각했던 하버드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이다. 굴드에 따르면, 진화적 진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상 무언가를 향해 정향된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무작위적으로 멀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단순한 기원에서 시작한 유기체들은 더 복잡해졌지만 반드시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굴드의 심상 속에서,  술 취한 사람이 그를 강제로 도랑으로 움직이게 하는 벽에서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면, 그는 결국 도랑에 빠질 것이다. 진화는 개체들을 대체로 무작위적이지만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벽처럼 작동한다. 진화와 관련된 어떤 것도 진보를 함축하지 않는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진보에 대해서 더 낙천적인데, 진보를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적응적 적합성으로 규정한다면 진화는 분명히 진보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양의 되먹임 고리들이 진화적 진보를 추동하는 포식자와 먹이 사이의 무기 경쟁을 살펴보자. 도킨스는 더 진화할 수 있는 생명의 능력, 즉 "진화 가능성의 진화"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보적 진화를 믿는다.

 

"다윈은 명백히 이 두 견해를 조화시켰다...생명 형태들이 복잡해짐에 따라 그것들은 자체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참신한 수단을 개척했다...그런데 다른 동물들의 복잡성의 향상에 의해 초래되는 새로운 관계들로부터 모든 동물이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단순한 동물들 속에 더 복잡해지는 필연적인 경향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더 단순한 생명 형태들에서 시작하여 그것들이 변해버렸다고 가정하면, 그것들의 바로 그 변화들이 다른 생명 형태들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단순한 생명 형태들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그래서 다른 생명 형태들의 복잡성을 자극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을 추동하는 데 어떤 법칙도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유기체들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 점진적으로 복잡한 생명 형태들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마이클 루스(Michael Ruse)보다 진화적 진보라는 관념에 대한 더 위대한 권위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모나드에서 인간까지: 진화생물학 속 진라는 개념(Monad to Man: The Concept of Progress in Evolutionary Biology)>>이라는 그의 책은 그 주제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저작이다. 루스는 박물관, 도표, 전시물 그리고 서적들이 모두 진화를 진보적이라고 서술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진보라는 개념이 진화생물학에서 주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진화의 산물로서의 우리는 진화를 우리 자신의 시각에서 가늠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연스럽게도 철학적 의문들을 제기하는 지능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둘째, 인식론적 상대론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거의 모든 현업 과학자들은 과학이 진전됨에 따라 그들의 이론과 모형들이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과학적 진보에 대한 그런 믿음을 유기체적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전화한다. 마지막으로, 루스는 진화생물학에 이끌린 과학자들은 진보적 관념들을 특히 잘 수용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라는 관념과 진화는 서로 얽혀 있어서 거의 분리할 수 없다.

 

문화적 진보는 존재했는가?

 

우주적 진화가 진화적 진보라는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으로 진보주의가 대부분 생물학자들의 저작에 주입되는데, 루스는 이것이 지속될 추세라고 생각한다. 문화에 주의를 기울이면, 진보적 진화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설득력 있는 논변이 제시될 수 있다. 사학자 윌 듀란트(Will Durant)는 문화적 진보를 옹호하면서 그것이 인간 역사의 어떤 요소들을 고찰하는 데서 도출되는 결론이라고 믿었고,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자신이 수행한 어린이들의 인지 발달에 관한 연구와 과학의 역사에 대한 분석에 의거하여 인지적 진보를 옹호하는 논변을 제시했다. 과학 저술가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는 비영합 상호작용들의 구조에 의거하여 일반적으로 진보적인 진화을 믿는 반면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복잡성과 협력은 진화의 자연적 운명이 아니라 진화의 하부 목표라고 논박한다. 진화적 진보를 옹호하는 논변들의 전체적인 강점은 불분명하지만, 그런 논변들이 철학적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명백히 진화 속에는 진보적 추세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전체로서의 삶이 점점 더 유의미해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진화와 의미의 관련성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친 많은 다른 사상가들이 동조하는 점이다.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진화의 교수법적 범위를 확장하여 진화가 철학적 문제들 전체를 먹어치우는 보편적인 용매로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며,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우리의 현존이 십 억 가지의 우연한 진화적 사건에 의존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잠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과학자 존 스튜어트-윌리엄스(John Stewart-Williams)는 우리에게 목적이 있고 우리가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주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며, 철학자 존 스튜어트는 우리가 과정을 정향한다면 우주는 점점 더 유의미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철학자들은 진화가 의미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는데,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자연과학의 여느 가설과 마찬가지로 다윈의 이론은 철학과 아무 관련도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철학적 탐구의 범위가 협소했던 철학적 환경에서 제기되었던 반면에, 오늘날 과학적 이론들이 철학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우주적 진화에서의 의식적 목적과 의미의 출현은 의미에 대한 관심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거대한 우주적 전망으로 주의를 돌리면,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은 우주가 전적으로 유의미한 종점을 향해 움직이는, 진화적 과정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를 명확히 표명하였다. 쟈크 모노(Jacques Monod)는 테야르의 낙관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생물학은 삶(생명)이 유의미하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는 우리로 하여금 진화를 그것의 가능태를 실현하도록 안내함으로써 우주적 드라마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도록 고무하는 견해―테야르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를 전달한다. 또한 E.O. 윌슨(E.O. Wilson)은 진화적 서사시가 불가해하고 전면적이라고 믿으며,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상가들이 진화는 진보적이면서 의미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테야르, 헉슬리 그리고 윌슨의 경우에, 생명(삶)이 진화하기 때문에 삶은 유의미하며, 그리고 이런 진화하는 의미 속에서 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유의미한 삶을 영위한다.

 

형이상학으로서의 진화

 

그래서 우주적 진화에 관한 연구는 삶이 점점 더 유의미해진다는 주장, 즉 주로 의식적 목적과 의미를 갖춘 존재자들의 출현에 의해 강화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옛날에는, 무심한 우주에서,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었지만, 이제는 의미도 목적도 존재한다. 이런 의미들은 항성과 행성들로 합체된 물질에서 비롯되었고, 항성과 행성들은 결국 뇌를 갖춘 육체들과 그것들의 속성들―행동, 의식, 개인적 정체성, 자유, 가치 그리고 의미―을 진화시킨 유기체들을 부양했다. 의미는 진화적 과정 동안 창발했다. 구성 부분들과 그런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적 관계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게 조직된 뇌가 물리적 및 문화적 환경과 서로 얽혔을 때 의미가 생성되었다. 이런 관계는 호혜적인데, 뇌는 생물학적 환경과 인지적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그 환경들은 다시 뇌에 영향을 미친다.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이런 상호작용은, 무엇보다도 의미와 융합하게 된 실재를 생성했다.

 

그런데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의미는 계속해서 출현할 것인가? 진보적인 진화적 추세들이 꾸준히 최종 의미를 완결할 것인가, 또는 하나의 극한으로서 의미에 접근할 것인가?  인지적 발달의 모멘텀이 그런 진보를 거의 불가피하게 만들 것인가? 이것들은 상이한 의문들인데, 우리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 점에 관해서는 미래가 과거와 비슷할 것이라는 어떤 귀납적 논증을 구성할 수 있지만, 그런 논증은 설득력이 없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어떤 생물학적, 지질학적 또는 천문학적 현상 떄문에 인간 종이 내일 파멸에 이르거나 멸종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과 미래에 일어날 일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없다. 미래는 미지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다른 의문으로 이어진다. 의미의 출현이 좋은 일인가? 의식적 존재자들이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쉽지만, 이것이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일이다. 의식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아무도 타자를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도출하기 않았지만, 이제는 때때로 그렇게 한다. 이 경우에 새로운 종류의 의미가 출현했지만, 이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의미의 출현을 확증할 수 있지만, 이것이 좋은 일이라는 점은 확증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삶의 질과 양 둘 다를 개선할 것이라는 공상에 잠긴다. 우리는 스스로를 불멸의 존재자로 만들고, 더 좋은 뇌를 구축하며, 우리의 도덕적 본성을 변형시킬 것인데, 그래서 삶을 더 좋고 더 유의미하게, 아마도 전적으로 유의미해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지상 또는 우리가 설계한 가상 현실에서 천국을 창조하도록 진화를 환상적인 높이까지 조종할 가치가 있는 조종사가 될 것이다. 의미와 가치가 계속해서 출현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과정에 참여하여 그것을 가속시킴으로써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과거 의미들의 결과로서 그리고 미래 의미들의 출현에 대한 도관으로서 우리는, 헉슬리와 테야르가 희망했었듯이, 더 높이 상승하는 위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존재, 의식, 기쁨, 아름다움, 좋음 그리고 의미의 더 높은 층위들―아마도 정점까지―을 향하여 이어지는 황금 연쇄의 연결 고리로 존재한다. 그런 영광스러운 과정의 일부로서 우리는 의미가 이전에 만들어진 의미로부터 우리 삶 속에 주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우리와 궁극적으로 하나인 우주 속에 의미를 재방출함으로써 대응한다. 자체의 일반적인 경계를 넘어서 확장된 진화적 사유는 자연주의적 천국이 지평선 위에 나타나는 특별히 사변적이고 유사종교적인 형이상학이다.

 

결론: 냉철함과 회의주의

 

그런데, 이런 사유의 산들을 등정하면서 우리는 다시 지상으로 되돌어오게 된다. 과거를 살펴보면 우리는, 진화가 의미를 산출했지만, 또한 그것은 고통, 두려움, 대량 학살, 멸종, 전쟁, 고독, 고뇌, 선망, 노예제, 좌절, 덧없음, 고문, 죄책감, 우울, 소외, 무지, 불평등, 미신, 가난, 고민, 죽음 그리고 무의미함을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래로 주의를 돌리면, 우리의 낙관주의는 마찬가지로 자제되어야 한다. 우리의 향상된 힘이 우리의 개선뿐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진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환상은 억제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의 찬란한 추측이 참인지 여부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환상 비행을 거부할 압도적으로 강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유형과 이야기들을 둘러싸고 언제나 서사를 엮어넣는 악명 높은 유형 탐색자, 이야기꾼 그리고 의미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어렴풋이 알아채는 진보의 유형들이 우리 정신 속에 존재할 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화성 위에는 인간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석쇠에 구운 치즈 샌드위치에는 예수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화 속에서 진보의 유형들을 찾아낸다면, 우리는 단순한 확증 편향의 희생자일 것이다.

 

결국 진보는 진화의 전체 내용이 거의 아니고, 대부분의 종과 문화들이 멸종해버렸듯이, 멸종이 곧 우리에게 닥칠 운명이다. 게다가, 이 방대한 우주(또는 다중우주)는 대체로 우리의 3.5파운드 뇌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된 형이상학적 열망을 진화적 종교로 서둘러 대체해야 한다. 우리는 우주적 전망들을 개진하는 것과 관련하여 더 신중해야 하고, 그런 전망들을 믿는 것과 관련하여 더 회의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겸손이 엄청난 형이상학적 추측들을 억제해야 한다. 요약하면, 과학적 이론에 관한 성찰이 필경 우리의 가장 깊은 소망이 참이라는 것을 밝힐 경우에만 우리의 회의주의적 경고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알고 싶기 때문에 더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 쉽사리 믿는 사람들은 진지한 진리 추구자로서의 우리 일에 지원할 필요가 없다.

 

결국 우주적 진화와 생물학적 진화―그리고 나중에 지능, 과학 그리고 기술의 출현―는 우리로 하여금 외경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지능의 도래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의미는 중요한데, 폴 데이비스(Paul Davies)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주의 어떤 행성에서 어떤 유기체에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히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의식이 있는 존재자들을 통해서 우주는 자기 의식을 생성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세부, 아무 목적이 없는 무심한 힘들의 사소한 부산물일 수가 없다. 우리는 정말로 여기에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Simon Conway Morris)의 저작에서도 비슷한 관념들이 울려퍼진다. 그는, 지능이 인간에게서 발달하지 않았다면, 다른 종에서 발달했었을 것―다시 말해서, 지구에서 지능의 출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마음과 그것의 부수 현상들이 중요하다는 데이비스와 모리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그로부터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거나 지능의 출현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런 인간형상주의(anthropocentrism)에 굴복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 삶과 지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인간의 몰락을 쉽게 초래했었을 수 있었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현존에 지나친 의미를 주입할 때 우리는 잠깐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불가피한 존재자가 아니었고,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는데, 우리는 우연한 산물이다. 우리를 낳은 수조의 수조 개의 진화적 과정이 쉽게 다른 결과들―우리를 포함하지 않은 결과들―을 초래했었을 수 있었다. 지능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우리는 정말, 공룡들이 소행성에 의해 멸종되지 않았었다면 독자적으로 인간 같은 지능에 이르렀다고 가정해야 하는가? 그런 견해는 고지식함을 기화로 삼는다. 공룡들은 더 큰 지능을 발달시키지 못한 채 수백 만 년 동안 생존했었다. 우리는 진화의 목적이 인간이었다―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유형을 탐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강한 성향을 자제하고 우리의 본원적인 우연성을 수용해야 한다. 공룡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소행성에 의해 멸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에세이의 서두에서 제기된 모든 의문들에 대해 확신을 갖고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다. 진화 속에서 어떤 진보가 존재했고, 그 과정에서 의미가 출현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런 추세들이 지속될 것이라거나 또는 그것들이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할 좋은 이유들이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확실히 사변적인 형이상학적 환상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진화함에 따라 유의미한 종말론이 점진적으로 전개될 것인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서술할 우주적 전망을 명확히 표명할 수 있을지는 훨씬 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거대한 우주적 전망의 실재가 가능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 자신의 종말을 향해, 보편적 죽음을 향해, 또는 영원한 지옥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은 그다지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꿈꾸었지만 언제나 우리의 회의주의가 한없이 낙천적인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깨운다. 우주, 인간 종 그리고 인간 지능의 진화는, 삶이 더 유의미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약간의 근거를 제공하지만, 우리의 소망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내일이 정말로 어제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테야르와 헉슬리와 함께 우리는 화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싶지만, 우리의 낭만주의에서 벗어나면, 세계와 관련하여 모노가 옳을 것―고민하는 우리 영혼을 위한 어떤 구원도, 어떤 위안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 빈약한 전망과 그것에 수반되는 고뇌에 직면하게 되는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또 다시, 희망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않지만, 우리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제공한다. 진화적 관점으로부터 도출되고 가장 잘 표현되는 그런 종류의 희망과 관련하여 터무니없는 것은 전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