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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체제에서 모든 것은 복잡하고 모든 결정은 주의와 신중함을 요구한다. 결코 직접 가거나 빨리 갈 수 없다. 신중하지 않은 채 그리고 겸손하지 않은 채 계속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예를 들면, 강의 길이를 따라 나타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멋진 되먹임 고리들을 갖춘 멋진 과학이라는 인상을 종이 위에서 줄 수 있을 것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삶을 생성하지는 못할 어떤 위계화된 체계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안다. 정치를 선동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강이 견딜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던 행위자들이 충분한 의심을 향유하기 시작하도록 불확실성을 덧붙여야 한다. '의심'이라는 낱말은 사실상 부적당한데, 그것은 오히려 탐구, 연구 그리고 실험 작업에 들어맞는 것인 반면에 회의주의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지금부터 사물과 사람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머지 타자들에 의해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은 채 이런 존재자들 사이에 가능한 연합들에 관한 집단적 실험 작업이다.
[...]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은 자연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객체들이 현재 취하고 있는 상이한 이력에 의해 규정된다. 지역 농업 당국, 경작자, 어부 또는 식수 공급업자을 위한 계획자는 물의 욕구를 알았었다. 그것의 한계를 가정하고 모든 굴곡을 무시함으로써 그것의 형태를 보증할 수 있었다. 현재 상황과 이전 상황 사이의 큰 차이는, 우리가 이전에는 강에 관해 알지 못했고 이제는 그것들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객체로서의 이 강의 굴곡을 더 이상 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각각의 개울, 각각의 굽이치는 흐름, 각각의 원천 그리고 각각의 잡목림이 그것들을 관리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목적 및 수단으로 쓸모가 있어야 한다면 하나의 객체로서의 그것의 이력은 더 이상 동일한 형태를 갖지 않는다.
[...] 강의 존재론적 형태들이 변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어머니 지구에 관한 감상주의, 즉 어부, 물총새 그리고 물고기의 합병과 아무 관계도 없다. 그것은 가장 작은 강 계약 또는 가장 작은 관리 계획에 의해 고려되는 존재자들의 불확실한 흐트러진 특질을 가리킬 뿐이다. 그 표현은 자연적 환경과 인간-환경 상호작용들의 불가피한 복잡성을 가리키지도 않는데, 새로운 관계들이 낡은 관계들보다 더 복잡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법에 의한 것처럼 사라지거나 또는 예견되지 않는 듯 보일 수 있으며, 그리고 지역적인 것과 전지구적인 것들의 관계들을 갑자기 조합함으로써 "목적들의 왕국"에 참여하기를 열망하는 다른 참가자들을 기꺼이 고려해야 할 의무를 가리킬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준객체(quasi-object)들을 추적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착과 출발들, 이런 목적과 수단들을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절차들―과거에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된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절차들―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상, 이 논증을 요약하면, 생태학은 자연, 자연 자체의 이해관계 또는 목적들을 고려하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으며, 오히려 만물을 고려하는 다른 한 방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 의문, 한 객체 또는 소여를 '생태화하기'는 그것을 맥락 속에 다시 집어넣어 그것에 한 생태계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 세기 동안 추구되었고, 더 좋은 술어가 없기 때문에 '근대화'로 알려져 있는 다른 한 활동에 대립적인 위치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화된 모든 곳에서 이제 우리는 '생태화'해야 한다. 생태학이 모든 것을 고려하는 문제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생태를 관계들의 완전한 체계로 간주한다면, 이 구호는 명백히 여전히 애매하고 심지어 그릇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태학이라는 술어를 앞에서 규정한 선택 원리에 적용하고 녹색 체제의 정당화을 위한 칸트적 원리를 가리킴으로써 활용한다면 대단히 적절해진다.
'생태화하기'는, 그것들의 복속 관계들이 여전히 불확실하고, 그래서 그것들을 좇는 데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준객체들의 연결망을 좇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절차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화(modernization)와 생태화(ecologisation)의 이런 대립은 한스 요나스(Hans Jonas)의 원리처럼 예방 또는 신중함의 원리를 정착시키는 것을 훌쩍 넘어선다. 또는 오히려, 생태의 체제를 규정하면서―예방의 원리에 관한 주장들 속에서―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삶에 속하는 주장들과 신중함의 낡은 목록에 속하는 주장들을 선택해낸다. 생태학에서 그것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정치학적 연구와 실험 작업을 위한 다른 절차들을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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