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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인용-철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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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과학의 진보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렇더라도 철학은 진보한다. 철학은 윤리에서 정치까지, 인식론에서 과학의 본성까지 걸쳐 있는 모든 종류의 의문들에 관련된 개념적 공간―경험적 공간에 대조되는 것으로서―에 대한 탐색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주어진 의문(예를 들면, 과학적 이론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경험적으로 적합할 뿐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들의 고차원적인 풍경을 상상하자. 철학자는 논증들을 구성하고, 반대 논증들을 향유하며, 어떤 견해를 버리거나 정교히 함으로써 그런 풍경을 탐색한다. 그 과정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최종 답변에 이르지 않는데(그것은 수많은 나쁜 답변들을 제거하지만), 개념적 공간은 경험적 공간보다 훨씬 더 넓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특수한 의문을 바라보는 하나 이상의 좋은 방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런데 또 다시 수많은 나쁜 방식들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진보는 개념적 공간에서 이런 봉우리들을 식별하여 "올라가는 것"에 놓여 있다. [...]

 

또 하나의 대중적 신화는 철학은 동일한 의문들에 관해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 함의는 또 다시 철학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래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의문들"이 충분히 넓게 규정된다면, 과학 자체에 관해서도 바로 그 동일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우주론이라는 전공은 소크라테스 이전 원자론자들 이래로 "동일한 의문"(우주의 기원과 진화)에 관해 생각해 왔다. 그리고 [...] 생물학이라는 분과학문은 네 가지 근본적인 원인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또 하나의 철학자!)의 명확한 표명 이래로 적응의 본성에 관여해 왔다. [...] 물론 우주론에는 더 구체적인 하위 의문들이 충분히 많이 존재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사실상 해결되었으며, 그리고 물론 우리는 더 넓은 그림에 관해서도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그런데 철학, 또는 수학, 또는 논리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른 규모에서 그리고 다른 시간 틀 내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철학(특히 과학철학)이 과학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계속해서 묻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답변이 있다. 첫째, 대부분의 과학 철학은 결코 과학을 진전시키는 데 관여하지 않는데, 이것은 철학이 왜 그렇지 않았는지 묻는 것은 범주 오류(유용한 철학적 개념)라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철학의 주요 목적은 과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과학이 작동하지 못할 때(가끔 그렇다) 왜 그러한지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철학은 과학적 기획에 적용되는 인식론이다. 그리고 철학은 과학의 작동 방식들을 연구하는 데 관여하는 유일한 분과학문이 아닌데, 과학사와 과학사회학도 그렇지만, 나는 그것들이 힉스 보존을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그런 분야는 일축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둘째, 진화론과 종 개념들에서 양자 역학의 해석들과 초끈 이론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관한 연구의 개념적 및 이론적 양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실제로 수많은 철학자, 과학자 그리고 수학자들이 어떻게 협력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과학철학의 몇몇 전문적인 논문들을 찾아보라고 나는 제안한다. 그런 논문들은 과학의 진보에 대한 철학의 긍정적인 기여를 구성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최소한 과학이 이론과 그것이 경험적 증거와 맺는 관계들에 대한 명확한 표명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기획이라면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 되풀이해서 들은 흔한 이야기는 과학적 진보는 "단순한 안락의자 사변"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이루는 데 수학의 연역적 힘(물론, 입수할 수 있는 이전의 경험적 증거에 의해 특징지워지는)을 사용하는 이론 물리학자들에게 노벨상의 한 온전한 범주가 설정되어 있다. 또는 자신의 궁덩이를 의자에 확고하게 묻은(그리고 어떤 실험실 근처에도 가지 않은) 채 어떻게 나름대로 흥미로운 지성적 인공물과 더불어 과학에 대한 방대한 양의 매우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더할 나위 없는 사례인 수학 자체를 고려하자. 나는 철학이 수학이나 이론 물리학과 꼭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실험실 환경과 관련되어 있지 않거나, 또는 실무자들이 편안한 의자를 좋아한다는 점을 근거로 어떤 탐구 분야를 일축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 모든 과학의 지성적 모친, 즉 철학을 얼마간 존중해야 한다. [...] 지난 이천 오백 년 동안 철학의 역할들 가운데 하나는 수많은 과학적 분과학문들의 탄생과 궁극적인 지성적 독립성에 대한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 이것은 과학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또는 양자 역학이 등장함에 따라 멈추지 않았다. 갈릴레오와 뉴턴과 더불어 물리학은 독립적인 분야가 되었다(뉴턴은 사실상 데이비드 흄과 임마누엘 칸트로 하여금 윤리학과 형이상학에서 자연철학화와 유사한 것을 행하도록 고무했다). 생물학은 다윈(그의 스승인 윌리엄 휴웰은 저명한 철학자였고, 무엇보다도 예술가에 비유하여 "과학자"라는 술어를 만들어낸 인물이다)을 기다렸다. 심리학은 윌리엄 제임스 덕분에 [...] 느즈막히 19세기 말에 자체의 철학적 고치에서 실을 내게 되었다. 언어학은 수십 년 뒤에 이어진다(촘스키에게 묻자). 그리고 인지 과학은 여전히 마음의 철학과 깊이 얽혀 있다(대니얼 데닛의 책을 보라). 그곳에서 진보의 어떤 유형이 보이는가? 그 이야기는 어떤 주어진 경험적 연구 분야의 새롭게 획득한 독립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언어학 그리고 인지 과학이 생성되자마자, 철학자들은 외부에서 바라본 그런 분야들에 대한 분석에 집중한다. 그래서 지난 세기 동안 이른바 "무언가의 철학"―물리학(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양자 역학)의 철학, 생물학(특히 진화생물학)의 철학, 심리학의 철학, 언어의 철학 그리고 마음의 철학―이 놀랍도록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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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