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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오늘의 에세이-개념과 감각

 

개념과 감각

Concept and Sense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I

 

이어지는 몇 개의 블로그 글에서 나는 일단의 친숙한 문제들―한편으로는 지식이 세계과 맺는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이 주체와 맺는 관계―을 탐구할 것이다. 그 다음에 이런 의문들은 사유에 대한 두 가지 일반적인 이미지, 즉 표상적 이미지(representational image)와 발제적 이미지(enactive image)와 연결된다. 무엇보다도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와 앤트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의 저작들에서 이런 구별짓기의 변양태들이 발견된다. 스탕제의 경우에는 관념의 생태와 실천의 생태 사이에서 이런 구별짓기가 발생한다. 피커링의 경우에는 지식의 표상적 어휘와 수행적 어휘 사이에서 이런 구별짓기가 발생한다. 나는 스탕제와 피커링과 함께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지식에 대한 표상적 설명과 발제적 설명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좋은 이유들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대신에 나는 그것들이 학습의 생태에 있어서 상이한 순간들이라고 주장하는데, 표상은 아직 내부화되지 않은 개념이고, 그래서 아직 주체의 세계 체험의 일부가 아니다. 발제는 환경을 지각할 수 있는 주체의 역량의 일부로 통합된 개념이고, 그래서 자체 환경에 대한 주체의 실천적 개입의 일부이다.

 

이런 순간들 사이의 이동은 개념이 이론적 가능태에서 실천적 현실태로 이동하는 것을 특징짓는다. 이어지는 블로그 글에서 나는 개념이 의식적 표상에서 환경에 개입할 수 있는 주체의 능숙한 능력의 일부로 흡수된 육체의 역량으로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제안한다. 첫째, 개념이 주변 매체 환경에서 획득된 기호로 입수된다. 둘째, 개념이 주체의 지각적 장 속에서 의식적 표상으로 간직된다. 세째, 개념이 의식적 표상에서 경험의 조직자로서 작동하는 무의식적 역량으로 이동한다. 이 세 단계를 서술하기 위해 먼저 나는 감각 작용에서 수행되는 개념의 역할을 논의하는데, 나는 이것을 지식과 경험 또는 관념과 실천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다음에 나는 상이한 개념과 감각들을 상이한 종류들의 주체들과의 접촉으로 그리고 접촉으로부터 운반하는 조건을 더 상세히 서술한다. 매체 환경의 역할이 이 부분을 논의하는 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감각 작용과 개념 작용의 이런 진행 중인 변환은 육체와 비인간 행위자들의 생태에 의해 발제되는 지식 생태로 가장 잘 서술된다고 주장한다.

 

II: 지식과 경험

 

지식에 대한 표상적 설명과 발제적 설명 사이의 구별짓기는 새롭지 않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들은 이론적 인지 양태 대 실천적 인지 양태을 둘러싼 이전의 논쟁들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칸트적 틀에서는 사물들이 경험되는 조건이 사물들이 사유되는 조건에 선행하지만, 사물들이 사유되는 방식은 사물들이 어떻게 경험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의문은, 현상이 사유 대상(개념)에서 경험 대상(직관)으로 어떻게 이동하는가라는 것이다. 즉, 새로운 개념적 표현이 어떻게 감각적 경험으로 편입되는가? 칸트적 견해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감각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직관 형식들(시간과 공간)과 선험적으로 분석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오성 범주들은 경험에 선행하는 것, 즉 경험에서 유도되지도 않고 경험 속에서 발견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사유와 경험이 일어날 수 있기 전에 전제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화적이고 생태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런 선험적인 것―여기서는 자체의 존재론적 의미라기보다 인식론적 의미에 한정된―은 형식적으로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선험적인 것이다. 생태적 우주에서 범주와 직관들은 자체의 움벨트를 두루 돌아다니고 파악하는 역사적으로 창발적이고 우발적인 육체들의 발제된 역량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적 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익하다. 직관은 사유에 감각 소여를 제공하며 개념은 직관을 조직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개념 없는 직관은 우리에게 서술되지 않은 날것의 감각 인상들―숲, 꽃 그리고 비가 아니라 색깔, 냄새 그리고 소리의 조각들―만 남길 것이다. 개념은 감각 소여를 전(前)성찰적으로 종합하는 수단이거나, 또는 더 낫게 말하자면, 개념은 새로운 종합적 대조들을 경험적 권역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그렇다면 개념과 감각에 대한 생태적 접근 방식의 결과는 인간 육체가 항상 획득된 지식과 물리적 지각의 교차점이며, 그리고 이것은 육체는 그저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신하는 것처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결코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에 보이는 것은, 특수한 세부 내용과 특질들에 주목한 채,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육체에 부여하는, 그것에 관해 입수 가능한 지식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교차점을 시각화하는 한 방식은 생태적 인지는 인지적 지각을 육체에 의해 수행되는 육체 행위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지 활동과 지각을 서로 얽히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육체의 지식 생태 속에 주어지는데, 지식 생태는 현상이 의식에 현시되는 데 도움을 준다. 알기와 감각하기가 연관되어 있는 이런 맥락에서 지식은 개념적 역량, 즉 유의미한 방식으로 차이와 대조를 중개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 지식 생태는 개념과 감각이 교차하는 공간, 즉 누군가가 세계와 상호작용할 때 주체를 주체로 조직하는 데 참여하는 개념적 감각기(sensorium)를 나타낸다. 지식은 획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솜씨이다. 지식은 새로운 대조들에 대한 조율이다.

 

III: 개념에서 역량으로

 

이제 의문은, 개념적 이해가 경험적 관찰에 어떻게 옇향을 미치는가이다. 물리학자, 식물학자 또는 건축가의 경험적 관찰 결과가 문외한의 경험적 관찰 결과와 같지 않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지각 양태들이 학습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각 전문가는 나름의 방식대로 경험적 관찰에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식별 역량을 넘어서는 특수한 의미의 정교화, 일단의 지식, 훈련 그리고 경험을 부여한다. 그런 식별은 어떻게 달성되는가? 물리학자, 식물학자 또는 건축가는 어떻게 되는가? 각 솜씨에 요구되는 역량들을 경험적 관찰에 혼입하기 위해서 일어나야 하는 작용들은 무엇인가? 각 경우에, 훈련 과정은 수많은 기계, 장비 그리고 제도뿐 아니라 수많은 정향된 실천과 행동을 포함하며, 게다가 관념들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이론적 활동도 포함한다.

 

관념들로 이루어지는 활동은 실천에 선행하지도 않고 실천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에, 이런 활동은 경험적 실천과 환경의 유도성(affordance)의 한계 내에서, 현실의 급습과 흐름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즉각적인 사건들의 내용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대체적으로 학습이라는 과업은 반복과 실천이 그저 개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하게 개념의 내재화를 통해서 주체를 변형시키는 계기가 되는 맥락에서 반복과 실천을 조장하는 공간들을 생산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학습은 지각이 어떤 서술 역량과 연결 역량의 발제된 수행이 되는 지각 역량에 있어서의 안정적인 변화를 성취하는 것이다. 개념은 진입하여 훈련받은 개체의 경험적 솜씨 집합의 일부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둘 다 인간 학습의 얽힌 단계들인 표상의 실천과 실천의 표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개념화는 사변적 솜씨이고, 주체를 즉시성에서 현재에 의해 주어지는 가능성의 공간들로 도약시키는 육체의 수행이다. 개념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또는 특정한 유형들의 대조에 접근하기 위해 육체가 지각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개념에 대한 알바 노에의 규정인데, 나는 대체로 이 규정에 동의한다.) 다수성에 있어서 개념들은 인간 유기체의 조직들과 교차하는 학습된 정교화 역량들의 층위들이다. 개념들은 새로운 관심의 스펙트럼들을 발달시켜 이전에는 활용할 수 없었던 판단용 벡터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학습은 지식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그리고 미각을 가로지르는 생태 공간을 규정한다. 이것은 지식이 인간 육체의 감각 체계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분리된 표상들의 층위가 아니라 오히려 지각 자체의 조직의 일부이다. 지식은 물질적 현상이고, 학습은 생태적 사건이며, 둘 다 지각과 동시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개념과 감각의 교차가 지식 및 지식이 인간 유기체와 맺는 관계에 대한 생태적 이해의 기초이다.

 

개념을 지각의 역량 또는 솜씨로 간주하는 것은 지향성(intentionality)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지향성이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것이라는 테제라면, 생태적 견해에서 볼 때 지향적 과정의 구조 자체가 창발적이고 조형적이며, 새로운 대조 양태와 가치 평가 양태에 열려 있다. 개념 획득을 통해 육체의 감성을 명확하게 표명함으로써 육체는 환경 속의 더 세밀한 세부 내용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는 차별적 세부 내용의 대조가 고양되고 수준이 향상된 생태이다. 내재화된 개념, 즉 육체의 역량으로 대사된 개념은 특수자들 사이에서 차별화하고 판결할 수 잇는 새로운 능력을 낳는다. 지식은 새로운 움직임과 정통한 판단을 위한 자원이다.

 

IV: 매체 환경

 

지식의 내재화는, 우리가 다른 현상들에 맞서서 어떤 현상을 향해 용도를 배치하는 상이한 지각적 기체들을 우리 속에 전파하는 상이한 지식 생태들에 흡수된다는 의미에서 상당한 정도로 환경적인 것이다. 여기서 의문은 한번 더 이렇게 변환된다. 지식은 어떻게 이동하는가? 누가 지식을 입수할 수 있는가? 어떤 육체가 어떤 역량을 개발할 수 있는가? 특정한 매체 감각기의 구성은 어떤 지식과 실천들의 도입과 분배를 위한 환경을 제공한다. 발제적 접근 방식에 따르면, 기록된 지식은 사건들의 일반 집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매체 속에서 반복 가능한 역량을 기입한 것이다. 예를 들면, 텍스트는 일종의 기입 장치인데, 브뤼노 라투르의 술어를 사용하면, 새로운 경험적 관찰 역량들을 위한 유도성으로 가득찬 매체 생태이다.

 

텍스트는 개념적 또는 잠재적 유도성, 즉 실천적 가능성에 대립되는 이론적 가능성을 다룬다. 잠재적 유도성은 현재 시나리오에 대한 대안들을 상상할 수 있는 개념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텍스트는 미래에 다른 한 사람이 새로운 지각 솜씨를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일단의 유도성으로 작용할 수 있는 과거의 인지적 성취에 대한 기록이다. 이런 유도성 덕분에 참여, 행위 그리고 식별을 위한 새로운 역량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는 변형을 불러 일으키는 생태이다. 그렇지만 개념의 잠재력은 텍스트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솜씨를 획득하기 위해서, 즉 텍스트에 몰입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지각이 입수할 수 있는 것을 집단화하기 위해서 독자가 상세히 검토해야 하는 개념적 문제들에 의해 입수할 수 있게 되는 대조들 속에 있다. 또 다시 입수 가능성의 집단화는 개념-주체 관계의 생태적 본성을 드러낸다. 텍스트는 인간 실천에 의해 발제되는 잠재적 토포스(topos)―인간에게 다시 접혀서 새로운 사유 생태들의 변화하는 윤곽을 따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포스―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