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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객체들에 관한 의문들: 문화적 인공물들의 존재

 

객체들에 관한 의문들: 문화적 인공물들의 존재

Questions About Objects: The Being of Cultural Artifact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의 용어에 의존하여 나는 세계는 단위체(unit)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테제를 신봉하며, 이런 점에서 나는 객체지향 존재론자이다. 나는 단위체들에 관한 그런 테제가 어떤 사유 집합을 "객체지향적"인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기 위한 최소 조건이라고 간주한다. 그런데, "객체지향 존재론(OOO, object-oriented ontology)"이라는 술어는 후설적 현상론 같은 것보다 "관념론" 또는 "경험론" 또는 "합리론" 같은 술어들과 더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세계는 단위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테제를 넘어서는 공유된 일단의 신념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는 실체들(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사물들(베넷) 또는 객체들(하만) 또는 모나드들(라이프니츠) 또는 과정들(화이트헤드) 또는 기계들(브라이언트) 또는 행위소들(라투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테제를 신봉할 수 있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그래서 이런 상이한 입장들 사이에 논쟁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내가 하만―지금까지 내 자신의 사유 발달에 중요했던 인물(특히 <<네트워크의 군주>>는 내게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과 공유하는 입장들이 많이 있는 반면에, 다른 것들에 관해서는 그와 의견이 다른 것(대리적 인과관계, 즉 물러서 있음에 관한 그의 특수한 견해―나는 객체들이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의미에 관한 그의 입장―나는 모든 것이 객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과 꼭 마찬가지로, 내가 베넷과 공유하는 입장들이많이 있는 반면에 다른 견해들(실제로 베넷이 생기론자라면 생기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또는 내가 화이트헤드와 공유하는 것(나는 과정에 관한 그의 견해에 끌린다)이 있는 반면에 그의 강한 관계론은 거부한다.

 

<<객체들의 민주주의>>의 서론에서 나는 철학이 실체들(넓게 해석되는)의 존재를 논의하기를 바라면서 시작하여 기묘하게도 그 대신에 객체들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관계를 논의하게 되는 방식을 검토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기는 쉽다. 우리는 객체가 무엇인지 묻지만, 이것은 먼저 우리가 객체를 알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방법론적 우선성의 문제로서 우리는 객체들의 존재를 논의할 수 있기 전에 이런 지식에 관한 의문들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에 관한 의문들은 사실상 중효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결코 사물 자체에 대한 논의에 이를 수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객체를 그 자체라기보다 우리에 대해서 논의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객체를 분석하는 것은 항상 우리일 것이기 때문에 객체 자체를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그런 주장이 맞지 않다고 가정할 좋은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룰 것이다. 만약에 관심이 있다면, <<객체들의 민주주의>>의 서론과 첫 번째 장을 읽을 수 있다.

 

내가 힘들여 다루고 있는 의문은 객체로 간주될 수 있는 것과 현상―더 좋은 술어가 없기 때문에―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 사이 어디쯤에 경계가 설정될 수 있는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현상"이란 어떤 종류의 주체와 갖는 상관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만과 라투르는 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듯 보일 것이다. 나는 망치가 하만적 의미에서 객체라고 주장하기 매우 어렵다고 깨닫는다. 하만(그리고 라투르)는 망치가 그 어떤 상관관계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립적인 나름의 존재를 갖는 진정한 실체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내게는 망치가 망치를 망치로 사용하는 존재자들에게만 망치인 듯 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가 매우 어렵다고 깨닫는다. 나는 내 손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고 그것이 독립적인 존재를 갖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게 망치의 망치성은 하나의 의미라는 인상을 주고 의미는 의미 부여자들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관계적 현상이라는 인상을 준다. 전지구적 대재난의 결과로서 우리 자신들 같은 의미 부여자들이 사라진다면, 이전에 망치로 알려진 것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지만, 나는 그것들이 여전히 망치성이라는 성질을 어떻게 지니고 있을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 쟁점은 화폐의 경우에 이해하기가 약간 더 쉬울 것이다. 화폐의 화폐성, 즉 그것의 가치는 화폐 사용자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인 듯 보인다. 전지구적 경제의 일부가 아닌 먼 지역 출신의 누군가에게 화폐를 준다면, 그것은 그에게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것은 종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폐의 가치는 관계적인 것인 듯 보인다.

 

여기서 요점은 화폐의 화폐성과 망치의 망치성은 관계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는 "독립적인" 것과 동의어라는 테제를 신봉한다면, 이런 것들은 실체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인데, 망치와 화폐로서의 그것들의 존재는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룰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그의 반관계론)의 몇 가지 핵심 신조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관계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지 않게 실체적인 다양한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는 관계적 존재자이다. 나무는 어떤 토양과 대기 조건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으며, 살아가기 위해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필요로 한다. 나무는 모든 종류의 방식으로 의존적인 존재자이다. 생태계 내의 존재자들도 마찬가지로 의존적이다. 예를 들면, 브라질 개암나무는 생식하기 위해 특별히 강한 턱을 갖춘 설치류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데, 개암의 구근이 엄청나게 단단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이 개암나무를 재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우 특정한 정글 생태가 필요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상이한 집단들이 정글의 상이한 지역들에 위치한 나무들을 둘러싸고 투쟁함에 따라 총체적 정치가 이런 개암나무들을 둘러싸고 발생한다. 이런 나무들은 현재 상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계적 연결망을 필요로 한다. 암석들도 이런 식으로 모든 종류의 관계적 의존성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온도가 너무 높아지게 되면 암석들은 녹아서 파괴될 것이다. 물리학 법칙들이 상이한 다른 한 우주로 통하는 웜홀에 암석를 던진다면, 그것은 산산히 부서질 것인데, 그것은 존재는 우리 물리학 법칙들이 성립하는 우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존재자 또는 실체들이 실체로서 존재함에 있어서 관계적인 것이 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는 듯 보일 것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문화적 존재자와 자연적 존재자 사이에 매우 엄격한 구별짓기를 왜 해야 하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화폐와 망치 같은 문화적 인공물들은 존재하기 위해서 주체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브라질 개암나무보다 덜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떤 주체에 대한 의존성은 나무들에 필요한 토양, 햇빛 그리고 대기 조건 같은 다른 한 생태적 조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화폐는 기묘한 것이다. 화폐의 가치는 우리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를 주관적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화폐는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 가치는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내가 낱말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일 달러 지폐가 백 만 달러의 가치가 있기를 결코 바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낱말의 의미와 화폐 같은 것들과 관련하여 객관적인 것이 항상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문화적 인공물들이 출현하는 실재론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종이 멸종될 수 있거나 멸종되었기 때문에 그 종이 아무튼 덜 실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지구적 경제의 외부에서 살아가는 가상의 사람들처럼 다른 한 문화가 어떤 특수한 인공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튼 이 인공물은 실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히려 인공물은 그런 유형의 사물이기 위해서는 어떤 생태적 조건을 필요로 하며 그런 조건은 다른 맥락에서는 충족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