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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켈리: 인터뷰-기크 신학자

 

- 아래 글은 <<와이어드(Wired)>> 잡지의 공동 창간자인 케빈 켈리(Kevin Kelly)가 2011년 7월에 복음 신앙의 잡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와 가진 인터뷰 전문을 옮긴 것이다. 이 인터뷰에서 켈리는 "아미시 족, 천국, 그리고 자신에게 왜 스마트 폰이 없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 이 인터뷰를 읽으며 우선 떠 올린 책은 데이비드 F. 노블(David F. Noble)의 <<기술이라는 종교: 인간의 신성과 발명 정신(The Religion of Technology: The Divinity of Man and the Spirit of Invention)>>이다. 서양인들에게는 기독교 신학적 태도가 기본적인 것이며 세속적 입장이란 항상 대항적이거나 이차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서양의 근대성과 근대과학의 기원도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티브 풀러(Steve Fuller)의 말을 빌리자면, 서양 "과학은 기술적으로 향상된 수단에 의한 신학"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월적 신 개념이 낯설고, 세속적 세계관을 기본적으로 견지하는 동아시아인들이 서양의 과학기술 및 철학을 포함하여 근대성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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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크 신학자

Geek Theologian

 

인터뷰 케이틀린 비티(Katelyn Beaty) | 2011년 7월 15일

 

근대 기술이 영혼에 미친 영향에 관한 시끄러운 경고들 가운데서 케빈 켈리는 괴짜 나라에서 온 유쾌한 복음 전도사처럼 들린다. "우리는 청개구리보다 휴대전화에서 신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와이어드>> 잡지의 공동 창간자는 자신의 가장 최근의 책 <<기술의 충격(What Technology Wants>>에서 주장한다. 확실히 도발적인 제목은 더 도발적인 논제를 제시하는데, 언어에서 바퀴와 위키피디아까지 인간의 모든 인공물은 신성한 것을 반영하는 살아 있는 숨쉬는 유기체처럼 함께 작동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부편집장 케이틀린 비티가 켈리가 연설하고 있던 올해의 Q 컨퍼런스에서 샌프란시스코 토박이와 함께 자리를 했을 때, "기술은 우주 전체에 걸친 신의 작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켈리는 비티에게 말했다. 그는 테크늄(technium)―이런 기술생태계를 나타내는 켈리의 단어―의 참여자들로서 "우리가 세상에서 선택권들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신성한 것의 일부"라고 믿는다.

 

켈리는 열쇠가 없어서 예루살렘 호스텔에 못 들어갔으며 결국 홀리 세퍼컬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의 석판 위에서 잠을 자게 되었던 1979년에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아미시 족, 천국, 그리고 자신에게 왜 스마트 폰이 없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당신은 태초 이래 인간들이 제작한 모든 인공물을 논의하기 위해 테크늄이란 술어를 사용합니다. 왜 그냥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저는 인간의 창조가 그것의 모든 부분의 총합 이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테크늄이란 술어를 사용합니다. 생태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식물 및 동물 요소들과 다르게 움직입니다. 우리의 정신 속에는 모든 신경 활동의 총합 이상인 사유가 있습니다. 사회 자체는 개인들의 총합 이상인 어떤 특성들이 있는데, 우리보다 더 큰 행위주체성이 있습니다. 같은 식으로, 테크늄은 당신이 아이폰이나 전구 하나에서는 발견하지 못할 움직임을 보일 것입니다. 테크늄은 문화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행위주체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태계 또는 기술적 초유기체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이 점은 더 넓은 과학 공동체에서 논란이 있지만―신학적 틀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제가 있습니다.

 

신이 테크늄이 전개하고 있는 진보를 인도하고 있습니까?

 

저는 진보란 신성한 것의 반영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연의 아름다움은 신을 반영한다고 우리가 말하곤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테크늄은 무언가 신의 특질을 반영합니다. 테크늄이 흠이 없다는 뜻은 아닌데, 무엇이든 우리가 발명하는 것은 무기가 되고 악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테크늄은 긍정적인 힘, 긍정적인 선의 전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로 그것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능성과 선택의 수로 측정됩니다. 그것이 제가 선함을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측도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선입니다. 저는 사랑을 그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가능성을 성취하는 데 도움을 주는 행위로 정의합니다. 사랑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고유한 천부적인 재능들을 표현하는 기회들을 제공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을 객관적으로 측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택과 가능성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을 읽는 동안 저는,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일부로서 신은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넘어서 창조할 기회를 제공하며, 그리고 이것은 "매우 좋다"는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환각적인 자유의지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그는 우리가 그를 놀래키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을 놀래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신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었지만, 대신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이 세상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너희들에게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주노라. 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었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내 재능의 어떤 불꽃을 주겠노라.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나를 놀라게 하라." 그래서 우리는 사물들을 발명하고, 신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에, 매우 멋지군! 내가 그것에 관해 생각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대신에 그들이 생각했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기 생명체가 좋고 더 많은 생명체가 더 좋은 것과 같은 식으로, 테크늄 안에는 긍정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생명에 공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잡아찢습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생명은 매년 그것이 파괴하는 것보다 1% 더 창조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계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제 말은, 개선 속도가 0.1% 또는 0.01%만큼 낮을지라도 세상에는 사실상 악보다 선이 더 많이 축척된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차이가 그것이 의미하는 전부입니다.

 

당신은 왜 악보다 선이 더 많다고 믿습니까?

 

지금 세계가 1,000년 전의 세계보다 더 나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제게 생명에 좋은 것에 관한 정량화할 수 있는 어떤 척도를 주고 싶어하든지 간에, 저는 지금이 1,000년 전보다 더 많다고 말할 것입니다. 일인당 전쟁 사상자 수도 더 적고, 폭력도 더 적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전쟁의 이런 잔혹한 행위들 가운데 몇몇은 지독하다고 생각하지만, 징기스칸을 떠올려 보세요. 당신은 그들이 행한 일들에 관해 듣는 것조차 바라지 않습니다. 더 적은 질병, 더 늘어난 수명, 더 적은 문맹, 교육, 여성의 권리, 더 많은 창의성,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사람, 더 적은 기아, 더 적은 노예, 더 많은 여가. 뭐든지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은 영원히 사악하다는, 즉 우리는 선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극적으로 개입할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는 기독교의 중심 믿음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 조건의 오류가능성은 우리가 매년 창조하는 만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좋게 시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신의 은총으로 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고 개선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방향으로의 그런 점진적인 서행이 우리가 신학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이고, 그것이 오늘날의 발전을 거의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매년 악을 향해 조금씩 움직인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겠습니까?

 

당신은 한 장에 걸쳐 아미시 족에 관해 이야기하고, 당신이 물질적 재화의 감축을 강조하는 히피 운동에 참가했다고 언급합니다. <<더 넥스트 크리스천즈(The Next Christians)>>에서 게이브 라이언스(Gabe Lyons)는, 당신은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겨우 세 번 트위터를 사용했을 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기술적 발명이 매우 좋다는 당신의 믿음과 어긋나지 않습니까?

 

기술은 우리의 재능들의 특수한 조합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제가 저의 모든 시간을 그저 기술들을 사용해 보며 보낼 수 있기에는 너무 많은 기술적 선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산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술을 최소한으로 선택합니다. 아미시 족(그리고 히피들)은 기술을 최소화하는 데 정말 능숙합니다. 그것이 제가 마찬가지로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사랑을 표현하고 신을 반영하는 제 사명에 도움이 되는 그런 기술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무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택권을 극대화하고 나머지 것들을 극소화하는 그런 연장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술들의 풀은 극대화되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선택권을 극대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능들을 발견하고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증가시키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이용할 수 없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일종의 절박감으로 아직 발명되지 않은 것들의 발명을 촉진하기를 바라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조 장치들을 발명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피아노 같은 것들―아마도 홀로덱(holodeck) 등―을 발명할 때까지 재능이 드러나지 않을 이 세대의 모차르트들이 있습니다. 당신과 제가 문자, 책, 인쇄술, 그리고 인터넷을 발명한 사람들로부터 득을 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태어난 그리고 태어날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천부적인 재능들을 발견하고 나눠줄 큰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발명품들을 서둘러 구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혁신을 강화하고 그것에 투자하며, 그것이 세계의 다른 장소들에 퍼지는 것을 확인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가 아미시 족을 나무라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최소화하고 있지만 저쪽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아미시 족의 단순한 생활에서 정말 매력적인 것을 봅니다. 더 많은 기술이 그저 우리를 선택의 광란에 몰아 넣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낭만주의라고 부를 것입니다. 우리가 아미시 족에 끌리는 까닭은 그들의 가족 및 공동체의 지원이 놀랍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안팎에서 대단한 자원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행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의료비를 지불하고, 불탄 창고를 다시 짓고, 악성 부채를 떠맡고, 서로의 결혼을 조언합니다. 이것은 정말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에는 댓가가 따르는데, 아미시 족은 선택권을 줄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아미시 족 여성이라면 한 가지 운명이 있습니다. 당신은 저를 인터뷰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엄마입니다. 만약 당신이 소년이라면 두 가지 운명이 있는데, 농부이거나 아니면 후원의 기계공입니다. 이런 선택권의 부족은 중국 남부의 멋진 언덕이나 아프리카의 유기적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씩 도시로 이주하고 있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들은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이런 목가적인 장소들을 떠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동료들은 당신이 기독교인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위키피디아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그들에게 표명할 것입니까?

 

저는 제가 공언하는 니케아 교리를 자세히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술적 은유도 있습니다. 이것은 컴퓨터 과학자 재런 레이니어(Jaron Lanier)를 관찰하는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가상 현실의 매우 초기인 1986년 경에 저는 재런의 실험실에 방문했습니다. 가상 현실에서는 안경과 장갑을 착용하고 3D 가상 세계에 들어갑니다. 그날 오후에 재런은 최초의 가상 세계들 가운데 하나를 막 만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안경과 장갑을 착용하고 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등을 대고 기어다니며 그 세계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막 창조했던 그 세계에 완전히 놀랐습니다.

 

저는 자신의 창조물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무한한 신이라는 이런 전망을 얻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이런 가상 세계들―가상 존재들이 악행을 저지르고, 살인하고, 남을 해치고, 그리고 선택권을 파괴하는 세계들―을 만들 때, 게임 창조자들이 내부에서 세계를 고치려고 시도하기 위해 진입할 것이라는 점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가상 세계에 들어가 스스로를 제한된 존재에 구속하며, 다른 나머지 존재들이 당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들을 구속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는 무한한 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몇몇 기술적 사람들에게 그것은 신앙을 약간 더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듭니다.

 

당신은 로봇을 위한 교리 문답서에 관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신은 창조자이며, 신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들을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로봇 형태로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들을 창조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로봇들의 자율의 정도가 점점 커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과 악의 차이에 관해, 누가 그들을 만들었는지(그리고 누가 우리를 만들었는지)에 관해, 그들이 나쁜 짓을 행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그들을 교육시킬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신의 아들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들을 포함할 것인가? 이것이 제가 신학자들에게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어깨를 으쓱합니다.

 

우리가 로봇들을 만들기 시작할 때, 저는 세속적인 과학적 세계가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말해온 바를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나름의 목적을 지닌 무언가를 만든다면, 당신이 그것에게 도덕적 지침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에게 도덕적 지침을 준다면, 당신은 그것에게 어떤 가치들을 주겠습니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아이를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율적인 로봇들을 만드는 시점에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나가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로봇이 당신에게 와서 "저는 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할 때, 당신은 어떤 말을 할 것입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의 위대함과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데에도 모든 가능한 유형의 발명된 정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 정신들만으로는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다른 존재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교회[샌프란시스코의 코너스톤 교회(Cornerstone Church)] 출신의 여덟 사람과 함께 천사와 로봇들에 관한 그래픽 소설에 관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천상에 서로 다른 백만 종의 천사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는 육화를 갈망합니다. 영혼과 육체를 연결하는 (전도서 12장 6절에서 언급되는) 은줄이 있습니다. 암흑의 천사들은 이 은줄을 통해 의식을 지닌 지상의 새로운 로봇들에게 "영혼을 불어넣기"를 원합니다. 영혼이 육체 속으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도덕 교육에 대한 파수꾼들이 있습니다만, 암흑의 천사들은 그것을 전복시키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암흑의 천사가 첫번째 로봇에게 배교적인 영혼을 부여한 사실을 발견하는, 반은 천사이고 반은 인간인 소녀 네피림이 있는데, 그녀는 세계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제입니다.

 

저는 C. S. 루이스가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허구적인 아마추어 신학을 행하는 이유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천국을 묘사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천국을 어떻게 묘사할 것입니까?

 

우리의 저작들에서 그것은 물질, 에너지, 또는 시간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지해 있지 않습니다. 정지는 죽음이며 천국의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하고, 참되고, 그리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움직입니다. 천국은 성장이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시간 밖에 있습니다. "시간을 넘어선 성장"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신은 그것을 스스로 개선하는 신성―더 완전해지는 일종의 완전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결코 더 좋아지지 않는 완전성보다도 더 선호할만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당신이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