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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배것: 오늘의 인용-질량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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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 책상 위에 무거운 유리 문진이 있다. 이 문진의 질량(mass)은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그 문진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주로 결합된 실리콘 원자와 산소 원자들의 연결망으로 구성된 복잡한 분자 구조를 갖추고 있다. 명백히, 그 문진의 질량은 구조 속 모든 실리콘과 산소 원자의 질량 99%를 설명하는 양성자와 중성자들에 귀속시킬 수 있다. 그렇게 매우 오래 전이 아니었을 때, 우리는 이 대답에 만족한 채 여기서 멈추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쿼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진의 질량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쿼크들의 누적적 질량들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옳은가?

 

틀렸다. 쿼크들은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질량들을 결정하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그 질량들은 쿼크들로 이루어진 양성자와 중성자보다 상당히 더 작고 더 가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입자 데이터 그룹(Particle Data Group)은 업 쿼크와 다운 쿼크 둘 다에 대한 질량 범위들을 어림잡아 말한다. 이런 범위들의 높은 극단의 질량들을 선택하여 두 개의 업 쿼크와 한 개의 다운 쿼크의 질량들을 더하면, 양성자 질량의 대략 1%를 나타내는 결과를 얻게 된다.

 

잠깐만, 양성자 질량의 99%가 그것을 구성하는 쿼크들에서 찾아낼 수 없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색전하(color charge)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이 아포리즘의 현대적 판본은 이럴 것이다. '자연은 노출된 색전하를 싫어한다'.

 

원칙적으로, 단일한 개별 쿼크의 에너지는 무한한데, 이런 이유 때문에 별개의 쿼크들이 결코 관찰된 적이 없다. 순 색전하가 영이 되도록 쿼크를 해당한 반대색을 지닌 반쿼크와 짝을 이루거나 아니면 쿼크를 색이 다른 두 개의 다른 쿼크들과 결합함으로써 개별 쿼크에 의해 노출될 색전하를 가리는 것이 에너지 견지에서 훨씬 덜 든다.

 

그런데, 양성자 또는 중성자의 경계 안에서조차도 노출된 색전하를 완전히 가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쿼크들이 모두 시간과 공간에서 같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자연이 아무튼 쿼크들을 바로 위에 쌓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 쿼크들은 양자 파동 입자이고, 그래서 그것들은 이런 식으로 속박될 수 없는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그것을 금지한다.

 

자연은 타협을 본다. 양성자 또는 중성자 속에서 색전하들은 노출되고 에너지―그것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관련 글루온들에서 표명되는―는 증가한다. 그 증가는 감당할 수 있지만, 그래도 상당하다. 양성자 또는 중성자 내부 글루온들의 에너지는 축적되고, 그래서 글루온들은 질량이 없더라도 m = E/c^2을 통해서 그것들의 에너지는 양성자 또는 중성자 질량의 나머지 99%를 설명한다.

 

바로 이것이다. 수 세기 동안 우리는 언젠가 물질적 실체의 궁극적 구성물, 즉 모든 것을 구성하는 물질의 궁극적 '원자'들을 식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디랙의 꿈이었다. 우리는 그런 구성물들이 질량이라는 일차 성질 같은 어떤 고유한 물리적 특성들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이 말해주는 것은 훨씬 더 기묘하고, 그래서 훨씬 더 흥미롭다. (최소한 지금은) 궁극적 구성물들이 존재하는 듯 보이고, 그것들은 고유한 물리적 특성들을 갖추고 있지만, 질량은 정말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질량 대신에 그렇지 않다면 질량이 없을 구성물들과 힉스 장 사이의 상호작용들이 있다. 이런 상호작용들이 입자들을 감속시키고, 그래서 우리가 질량으로 해석하는 거동을 초래한다. 구성물들이 결합할 때, 그것들 사이에 교환되는 질량 없는 힘 입자들의 에너지가 축적되고, 그래서 고체성과 실체성이라는 인상을 나타낸다.

 

과학이 반드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경험적 실재에 대한 서술을 전달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빛과 물질에 대한 우리의 일상 경험의 깔개를 우리 발 밑에서 끌어내는 것은 약간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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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 배것(Jim Baggott), <<실재여 잘 있거라: 현대물리학은 과학적 진리 추구를 어떻게 배반했는가(Farewell to Reality: How Modern Physics Has Betrayed the Search for Scientific Truth)>>(2013), pp. 7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