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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오늘의 인용-다원론(주의)의 세 가지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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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원론(주의)의 세 가지 유형, 즉 세계관 다원론(worldview pluralism), 인식론적 다원론(epistemological pluralism) 그리고 존재론적 다원론(ontological pluralism)을 구별짓는다. [...]

 

1. 세계관 다원론/일원론. 세계관은 삶에 대한 어떤 인간 집단의 집합적 견해를 결정하거나 유도하거나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단의 기본적인 믿음과 가치들일 뿐이다. 세계관은 매우 추상적인 범주이고, 그래서 세계관들이 반드시 일관성이 있거나 통일되어 있거나 지향적인 도식이라는 점은 내게 분명하지 않다. 각 세계관은 어떤 일단의 진화하는 전(前)반성적인 목적들을 표현하게 하는, 실용적으로 구성된 브리콜라주와 더 비슷하다. 그럼에도 세계관은, 무의식적이거나 암묵적일 뿐일지라도,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단의 서술들(존재론), 존재와 관련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상이한 방식들(인식론) 그리고 타자들과 관계를 맺기 위한 일단의 규칙 또는 원리들(윤리학)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관 일원론은 인류 집합체를 구성하는 포괄적인 믿음과 가치의 집합은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라는 견해일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그 누구도 세계관 일원론자가 아니다. 상이한 인간 집단들이 상이한 종류들의 효과를 산출하는 상이한 집단적 가치 구조들을 견지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정말로 진부하며, 그리고 심리학적 다원론/일원론―상이한 개체들이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하는지 여부에 대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더 진부하다. 그런 주장은 논의조차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저쪽에 세계관 근본주의자들―다중의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자신들의 세계관이 유일한 참된 올바른 세계관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

 

2. 인식론적 다원론/일원론. 여기서 첫 번째 진정한 문제점이 대두된다. "세계관"과 "인식론"이 반드시 동일한 인지 구조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그것들은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을지라도). [...] 인식론은 지식과 앎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구조, 방법 그리고 실천들을 검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나는, 철학자들이 생성하려고 노력하는 지식론을 의미할 뿐 아니라, 철학자들의 자기 주장을 정초하려고 노력하는 현실적 구조들을 의미한다. 또한 인식론은 결코 인간의 문제에 불과하지 않다는 점도 부연해야 한다. 인간의 인지적 장치가 보편적이든 다원적이든, 그것은 항상 인간 유기체의 안과 밖 둘 다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종들의 결과물이다(인간의 일인칭 관점은 인간 피부 안과 그것의 주변에 거주하는 존재자들의 통일된 생태의 결과물이다). 대체로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각 유기체는, 자체의 생태계 속에 자신을 위치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에 대한 나름의 직관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인간이 아닌 많은 유기체들이 믿음, 지향성 그리고 개념 사용의 구조들을 전개한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모든 유기체들이 정동을 느끼고 체험한다는 점은 더 이상 아무 쟁점도 아니지만, 이런 맥락에서 다시 거론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특수하게 인간에 관련되어 있지만, 인식론적 다원론은 종 다양성이라는 의미에서 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식론적 일원론은 그저 인간들이 체험을 인지하는 구조들이 보편적이다(즉, 문화, 지리 그리고 역사적 시대들 전체에 걸쳐 불변적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식론적 다원론은 인간 인지의 다양한 방식들―경험을 구조적으로 체험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가능하다는 테제이다.

 

여기서 세계관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A) 세계관은 문화, 시간 그리고 지리에 걸쳐 다양하고 가변적이지만,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인지 구조들은 환경에 무관하게 불변적이다. (B) 세계관 다원론과 인식론적 다원론 둘 다 참이다. 사람들은 현존하는 다양한 종류의 인식 구조들(참일 것이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이것은 전적으로 분명한 것은 아니다)에 덧붙여 세계에 대한 다양한 포괄적인 믿음들(참이다)을 견지한다. 내가 보기에, 철학과 과학은 공히 인식론적 다원론―다시 세계관 다원론과 전적으로 상이한 것이다―의 가능성에 근거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래서 나는 인식론적 다원론 역시 결국에는 참인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

 

3. 존재론적 다원론/일원론. 존재론적 다원론과 일원론를 구별짓기가 해명하기 가장 어려운 작업일 것이고, 그래서 나는 [...] 대부분의 혼동이 이 술어들의 일관성이 없고 불투명한 사용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존재론적 일원론은 궁극적으로 실재는 단일한 원리, 존재, 힘 또는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념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많은 변양태들이 떠돌고 있지만 실제로는 유일한 한 종류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관념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유물론과 관념론은 일원론의 두 가지 종류이다. 관념론의 경우에는 정신 또는 관념만이 존재하며, 유물론의 경우에는 물질만이 존재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전통적인 유물론자는 다원론자가 아니라 일원론자이다. 쿼크, 양성자, 전자, 은하, 행성, 식물 그리고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모두 매우 다른 것들이지만 결국에는 다른 종류의 물질적인 것들이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다원론은 어떠한가? 내가 이해하기에, 존재론적 다원론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실제로 존재한다는 테제가 아니라,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매우 다양하여 "유물론"이라는 일원론적 타이틀이 기본적으로 쓸모없게 된다는 테제이다. 질료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의 힘 또는 형상들에 의해 모양과 특성이 부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형태의 질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그 어떤 대문자 "M"의 "유물론(Materialism)"도 존재하지 않는다. 브라이언트―비환원적인 유물론적 일원론을 위한 변론을 전개하는―역시 이것을 알고 있으며, 유물론이라는 개념을 물질성 자체와 융합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 브라이언트는, 창발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비환원적인 물질성을 확보하면서 존재론적 일원론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브라이언트가 말하는 것의 대부분에 동의하지만, 환원 불가능한 물질들의 다양성을 일원론이라는 관념과 종합하는 것이 어렵다고 깨닫는다. [...]

 

[...] 브라이언트와 대조적으로, 라투르의 최근 저작 <<존재 양태들에 대한 탐구(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AIME")는 존재론적 다원론을 설명한다. 여기서 라투르는 실제로 존재하는 존재자들이 매우 다양하여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언어와 인과성의 양태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AIME는, 브라이언트가 올바르게도 걱정하는 그런 종류의 상대주의를 몰래 반입하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유물론/관념론적 일원론에 대립하는 존재론적 다원론의 일례이다(라투르는 각 양태를 작동하게 하는 관찰 가능한 규칙과 제약들―"적실성 조건"―을 공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것을 시도한다). 내게 이것은, 각 인간의 시각이 그런 시각을 취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초래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행위자들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다루는 경험적으로 더 적절한 방식이다.

 

[...] 세계관을 인식 구조로 붕괴시킬 때, 또는 둘 다를 존재론으로 붕괴시킬 때 주요한 쟁점들이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세계관을 인식론으로 붕괴시키면, 인간 가소성의 실제 한계를 규정할 수 있는 그 어떤 능력도 상실하며, 경쟁하는 주장들을 공개적으 평가하여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한다. 여기서는 개인적 의견이 경험의 구조 자체와 교환될 수 있고, 그래서 이것은 그 어떤 종류의 규범적 지식 주장을 정초하는 행위를 기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세계관과 인식 구조 둘 다를 존재론으로 붕괴시키는 경향이다. 이것은 일종의 극단적인 유아론적 관념론을 초래한다. 여기서는 실재계가 실재계에 대한 인간의 지각으로 붕괴된다("실재는 당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항상 듣게 되는데, 이런 종류의 교활한 진술은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붕괴시키는 증거이다).

 

[...]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인간들에 관해 말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양한 인지 능력들의 한계를 정하는 에피스테메들(인식적 경계들이 세계관 다양성에 가하는 제약들)의 연동되어 있는 생태계를 다루고 있다. 동시에 육화된 인지의 이런 다양한 양태들 자체는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의 구조와 흐름의 한계를 정하는 마음에 독립적인 존재자들의 다른 한 생태계(여기서는 인지자 자체가 인지되는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이다)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한 다양한 종류의 존재자들을 생성할 수 있는 다양한 인지 양태들이 존재하며, 일단의 인지 구조들의 가소성을 각인받는 상이한 다양한 종류의 존재자들이 존재한다. [...]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식론적 구조뿐 아니라 물질적 기술(매체 생태계)과 인간 및 비인간 조건의 견지에서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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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로버트(Adam Robb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