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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푹스: 양자 베이즈주의자와의 인터뷰-왜 양자인가?

 

Q2: 오늘날 양자역학의 기초에 있어서 가장 화급한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존 휠러(John Wheeler)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왜 양자인가?" 그에게는 그것이 물리학 전체에서 가장 화급한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존경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게도 그것이 가장 화급한 문제일 것이라고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영웅 숭배의 사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의문이 정말로 올바른 의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양자는 일어서서 말합니다. "나는 달라요!" 물리학의 심연에 정말 이르고 싶다면, 그것이 살펴볼 곳입니다. 

 

내가 양자 이론에 대한 여타의 거의 모든 해석적 노력이 곤경에 처해 있다고 보는 지점은, "측정 문제"와 "비국소성의 불가사의들"을 둘러싼 모든 자세와 찌푸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진지한 방식으로도 이렇게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선 왜 이 이론이 존재하는가?" 그들은 과업을 물이 새는 배를 수선하는 일로 간주하지, 그 배를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 떠 있게 만든 원리를 찾는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 이론을 계속 떠 있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결코 물이 새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누수의 유일한 원인은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을 선입견을 그 이론에 덧붙이려고 시도한 전략이었습니다.

 

이 선입견은 무엇일까요? [...] 그 선입견은 양자 상태가 실재적인 것이라는 관념입니다. 즉, 관찰자가 존재하기 전에 양자 상태가 존재했다는 관념입니다. 핵 홀로코스트에 의해 모든 관찰들이 없어지더라도 양자 상태는 여전히 남을 것이라는 관념입니다. 양자 상태가 양자 이론의 통화라면 세계는 일부를 은행에 넣어두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에버릿(Everett) 해석(들)을 생각합시다. 세계 전체는 자체의 파동함수가 있으며, 터무니없게도 그 이론 내에서는 관찰자 믿음  또는 확률이 결코 실제로 재구성되지 않습니다. 봄주의적(Bohmian) 해석(들)은 어떻습니까? 파동함수는 입자를 유도하는 장입니다. 관찰자는 결코 언급되지 않습니다. GRW 해석(들)은 어떻습니까? 붕괴는 파동함수가 너무 거대해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그것은 실재적입니다. 주렉(Zurek)의 "양자를 양자이게 두자"는 어떻습니까? 제가 말할 수 있는 한, 그것은 파동함수로 시작하여 파동함수로 끝나는 견해입니다. 두 관찰자가 한 계에 대해 두 개의 완전히 다른(모순되는) 파동함수를 가질 수도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 관찰자들은 자체적으로 이미 한 거대한 파동함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양자인가?"라는 의문이 가장 화급한 의문이라고 말할 때 저는 구체적으로 우선 양자 상태가 실재적이지 않다는 해석적 배경 내에서 의미하고 있습니다. 양자 상태는 관찰자의 주관적 정보, 기대,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하는 배경 내에서 저는 그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도구주의일 뿐입니다." 과학철학자들이 비열하게 말합니다[...]. "당신은 시작도 하기 전에 경기를 포기합니다."  [...] 누군가가 이런 맥락에서 "왜 양자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도구적인 것들에 대한 이유들과 관련하여 그가 실재론자라는 점을 의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양자 이론은 순전히 믿음의 정도를 할당하고 구성하는 이론일지라도, "왜 양자인가?"라는 의문은 세계의 현실적, 실재적, 객관적 특질과 관련된 어떤 것이 다른 추론 틀이 아니라 이런 추론 틀을 사용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우리 관찰자들은 세계에서 떠돌아 다니면서 우리 주변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왜 어떤 다른 형식 체계가 아니라 양자 이론의 형식 체계를 사용하는 편이 나을까요? 확실히 그것은 세계의 일반적 특질과 관련된 것―우연적인 것, 다르게 될 수도 있었던 것, 우리의 의사 결정 자체보다 더 심층적인 것―을 함축합니다.

 

이것으로 큐비즘의 관점에서 양자역학의 기초에 있어서 가장 화급한 이 문제의 진정한 특색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은 두 단계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우선 말썽을 일으키는 이런 양자 상태를 제거하는 식으로 양자 이론을 제기하는 설득력 있는 간결한 방식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양자 이론이 사실상 누군가의 믿음의 정도를 구성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 자체의 고유한 술어들로 쓰여질 때 개념적으로 가장 명백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

 

양자 이론을 재작성하는 이 프로그램이 전적으로 성공한다면[...], 양자 상태의 실체성에 대한 산만한 논쟁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을 것이고[...], 그릇된 선입견이 불가피하게 초래한 비국소성과 "측정 문제"에 대한 피곤한 논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화급한 문제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될 것입니다. 양자 이론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정식들을 열심히 살펴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세계에 장착되는지 물을 때입니다. 세계가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이런 종류의 구조화를 강요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것에 이르는 것이 정말로 "왜 양자인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손에 넣을 때 물리학은 양자 상태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이 꿈도 꾸지 못했을 세계를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 크리스토퍼 푹스(Christopher Fuc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