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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스, 머민, 샤크: 오늘의 인용-비국소성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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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이론에서 비국소성(nonlocality)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에 대한 비국소적 해석들이 몇 가지 존재할 뿐이다. 가장 유명한 해석은 봄(Bohm)의 역학인데, 그것의 비국소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존 벨(John Bell)은 비국소성이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의 의미에서 양자역학을 "완전하게 만드는" 해석은 무엇이든 갖추어야 하는 특징임에 틀림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런데 국소적 해석들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 내에서는 양자 비국소성이 예증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로버트 그리피스(Robert Griffiths)는 정합적 역사 이론(consistent-histories interpretation)에서 양자역학은 국소적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판본의 코펜하겐 해석을 수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비국소성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또는 비국소성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큐비즘도 국소적 해석이지만, 약간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여러 세계 해석과 정합적 역사 해석은 양자 이론의 수학 형식적 특징들에서 자체의 세계관(Weltanschauungen)을 추출함으로써 양자역학 내에서 작동한다.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그리고 코펜하겐 해석과 대조적으로, 큐비즘은 과학 이론들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과학자들에 대해 낯선 시각을 취함으로써 양자역학을 이해한다. 양자 베이즈주의적 양자역학은 국소적인데, 그것의 전체 목적이 어떤 단일한 행위자로 하여금 자신의 주관적 경험 내용에 대한 자기 믿음의 정도를 조직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행위자도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는 없다. 어떤 행위자의 시공간 궤적은 반드시 시간성을 나타낸다. 행위자의 주관적 경험은 그런 궤적을 따라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자가 양자역학을 사용하여 "[자기]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 사이의 [상관]관계들"을 계산할 때, 그런 경험들은 공간처럼 분리될 수 없다. 양자 상관관계들은 자체의 바로 그 본성에 의해 시간처럼 분리된 사건들―어떤 단일한 행위자에 의한 경험 획득―을 가리킬 뿐이다. 큐비즘 해석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공간처럼 분리된 사건들에 도깨비 같든지 아니든지 간에 상관관계를 할당할 수 없는데, 그 어떤 단일한 행위자도 그것들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자 베이즈주의적 해석에서 양자역학은 명시적으로 국소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양자역학과 관련된 전부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양자역학은 비국소적이라고 잘못 주장하는가? 그들은 큐비즘의 세 가지 기본 계율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를 부정함으로써 그렇게 주장하게 된다.

 

(1) 측정 결과는 측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결과가 측정 행위를 수행하는 행위자의 경험에 진입할 때에만 그 결과가 그것을 경험하는 행위자에 대해 만들어진다. 측정 결과는 바로 그런 경험이다. 경험은 경험되는 것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2) 한 행위자가 어떤 사건에 확률 1을 할당하는 것은 그 사건이 확실히 일어날 것이라는 그 행위자의 주관적 믿음을 표현한다. 그것은 그 사건을 초래하는 객관적 메커니즘의 존재를 함의하지 않는다. 확률 1 판단도 판단이다. 그것은 판단하는 행위자가 대단히 확신하고 있는 판단이다.

 

(3) 양자 이론에 나타나지 않고 잠재적 행위자가 겪는 그 어떤 경험에도 대응되지 않는 매개변수들은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아무 역할도 수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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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푹스, 데이비드 머민, 뤼디거 샤크(p.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