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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스, 머민, 샤크: 오늘의 인용-큐비즘, 양자 베이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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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연에 대해 서술할 때 그 목적은 현상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 사이의 관계들을 가능한 한 멀리 추적하는 것이다.

   ―― 닐스 보어(Niels Bohr), 1929

 

물리학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인간 경험을 배치하고 조사하기 위한 방법들의 개발로 간주되어야 한다.

   ―― 닐스 보어, 1961

 

보어가 양자물리학의 본성에 대해 말해야 했던 것의 대부분은 아인슈타인(Einstein), 포돌스키(Podolsky), 그리고 로젠(Rosen)의 1935년 논문[EPR]을 포함하는 삼십 년의 기간 동안 변화했다. 그런데 과학에 있어서 인간 경험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보어의 견해는 EPR의 트라우마를 견디고 다소간 그대로 살아남았다.

 

여러 중요한 점들에 있어서 큐비즘(QBism)―양자 베이즈주의(Quantum Bayesianism)―은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게 되는 것과 다르지만, 경험이라는 원초적 개념이 과학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이라는 보어의 의견에 동의한다. 큐비즘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누구나 자신의 과거 경험에 의거하여 자신의 후속 경험에 대한 확률론적 기대값들을 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다.

 

코펜하겐 해석과는 달리, 큐비즘은 확률에 대한 "주관적인" 또는 "판단적인" 또는 "주관주의적인" 견해를 명시적으로 취하는데, 이 견해는 현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이지만, 물리학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드물다. 확률은 어떤 행위자에 의해 사건에 할당되고, 그래서 그 행위자에게 특수하다. 행위자의 확률 할당은 사건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의 정도를 표현한다. 확률의 주관적 특징은 행위자가 사건에 대해 확신하는 경우들도 포함하는데, 심지어 0과 1이라는 확률도 행위자의 (매우 강하게 품고 있는) 믿음의 척도다.

 

주관주의적 견해는 확률 이론을 그것이 비롯된 도박이라는 역사적 기원으로 되돌린다. 어떤 행위자의 확률은 그가 그런 확률에 의거하여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믿는 내기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걸거나 받아들이는 마음에 의해 규정된다. 일반적인 확률 규칙들 모두가 더치 북 정합성(Dutch-book coherence)―어떤 행위자의 확률 할당은 필연적으로 손해를 보는 입장에 자신을 결코 처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로 알려진 단 하나의 요구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그리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게는 의외의 사실이다.

 

이런 규칙들은 누구든 단일한 행위자가 사용하는 일단의 확률들을 제약한다. 둘 이상의 행위자에 의해 이루어진 확률 할당들의 조합에 더치 북 정합성을 적용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확률은 "단일 사용자 이론"이며, 확률 할당은 확률 할당을 하는 행위자의 믿음을 표현하고, 자신의 후속 경험에 대한 동일한 행위자의 기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단일 사용자"라는 술어가 상이한 사용자들은 각자 자신의 정합적인 확률을 할당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큐비즘에서 측정은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절차를 넘어선다. 일단의 가능한 경험들을 끌어내기 위해 행위자가 취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측정이다. 측정 결과는 이런 식으로 도출되는 행위자의 특수한 경험이다. 주어진 측정 결과에 대해 양자 형식체계는 행위자가 후속 측정에 대한 자신의 확률을 갱신하는 데 있어서 지침이 된다. 큐비즘은, 우리 각자로 하여금 자기 경험의 다양한 측면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물리학의 범위에 속한다고 간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물리학은 "하찮은" 실험실 시험들의 결과들에 한정되지 말아야 한다는 존 벨(John Bell)의 불평에 대해 고심한다.

 

그 술어가 불행하게도 시사하듯이 측정은 사태의 선재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측정은 어떤 결과―행위자의 새로운 경험―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한 행위자의 작용이다. "개입"이 더 좋은 술어일 것이지만, 8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측정"이라는 낱말을 양자 이론에서 제거하기는 어렵다. 양자 상태는 보른 규칙(Born rule)을 통해서 확률을 결정한다. 확률은 행위자의 주관적 판단이기 때문에 당연히 양자 상태 할당도 그 상태를 할당하는 행위자의 주관적 판단이다. 악명 높은 "파동함수의 붕괴"는 행위자가 자기 경험에 의거하여 자신의 상태 할당을 갱신하는 것에 불과하다.

 

행위자로 활동할 때 앨리스(Alice)는 무엇이든 자신에 외재적인 어떤 물리계를 모형화하는 데 양자 역학의 형식체계를 사용할 수 있다. 큐비즘은 원자든, 거대한 분자든, 거시적 결정이든, 선속 분할기든지, 슈테른-게를라흐(Stern-Gerlach) 자석이든, 또는 심지어 앨리스가 아닌 행위자이든 간에 모든 그런 외부 체계들을 동일한 기반에서 다루도록 명령한다. 이런 점에서 큐비즘은 란다우(Landau)와 리프쉬츠(Lifshitz)에 의해 상술된 코펜하겐 해석과 중대하게 다르다. 그들의 양자역학 서적에 따르면, "고전역학을 사용하지 않은 채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들을 표현하는 것은...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양자역학에서 측정은 그 어떤 관찰자와도 별개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고전 객체들과 양자 객체들 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으로 이해된다." 란다우와 리프쉬츠는 측정 및 준비 장치들이 양자역학의 범위를 벗어난 별개의 고전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다른 행위자들도 고전 객체들로 취급할 것으로 추정된다[...].

 

큐비즘에서 앨리스가 양자역학으로 모형화하지 않은 채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현상은 자신의 사적 경험에 대한 자신의 직접적인 내부 의식이다. 이것은(그리고 이것만이) 앨리스에 대해(그리고 앨리스에 대해서만) 란다우와 리프쉬츠의 "고전 객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신의 과거 경험에 대한 앨리스의 의식은 자신의 상태 할당이 의거하는 믿음에 대한 기초를 형성한다. 그리고 앨리스의 확률 할당은 자신의 미래 경험에 대한 그의 기대를 표현한다.

 

앨리스가 아닌 다른 행위자들의 자신의 사적 경험에 대한 주관적 내부 의식은 본질적으로 앨리스가 접근할 수 없고, 그래서 앨리스가 양자역학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행위자들이 앨리스에게 제시하는, 자신의 사적 경험을 나타내고자 하는 구술적 또는 문자적 보고들은 사실상 앨리스의 외부 세계의 일부이고, 그래서 앨리스가 양자역학을 적용하기에 적절하다. 일상 언어로 실험 결과를 진술하는 것의 대단한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던 보어는 밥(Bob)의 경험에 대한 앨리스의 간접적인 접근―언어를 통한―에 만족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어는 앨리스가 자신의 경험에 대한 밥의 보고들을 중첩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인데, 큐비즘은 앨리스 자신이 그런 보고들을 경험하기 전에 그것들이 분석되기를 원한다면 앨리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보어가 밥의 보고들―일상 언어로 표현된 것들―을 양자역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앨리스는 밥을 외부의 물리적 체계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큐비즘에 따르면 앨리스는 자신이 밥에 대해 제기하는 어떤 질문에 대한 가능한 대답들에 대해 자신이 부여한 확률들을 부호화하는 양자 상태를 밥에게 할당할 수 있다. 앨리스가 밥으로부터 어떤 대답을 끌어낼 때 앨리스는 이것을 여타의 양자 측정과 마찬가지로 간주한다. 밥의 대답은 앨리스가 그것을 경험할 때에만 앨리스에 대해 만들어진다. 양자 베이즈주의자는 앨리스가 밥과 갖는 상호작용을, 예를 들면, 슈테른-게를라흐 장치, 또는 그 장치에 포착되는 원자와 갖는 상호작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간주한다.

 

이것은 [감각적/현상적] 실재가 행위자마다 다르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행위자에게 실재적인 것은 전적으로 그 행위자가 경험하는 것에 의존하고, 그래서 상이한 행위자들은 상이한 경험을 겪는다. 행위자에 의존하는 실재는 상이한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서로 소통할 수 있다―주관적 경험이 일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정도에 의해서만 제한된다―는 사실에 의해 제약된다. 자신의 경험에 대한 밥의 구술적 표현은 앨리스의 경험에 진입할 수 있으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런 식으로 실재의 공통적 집합체가 구성될 수 있는데, 그것은 주관적 경험의 완전한 정취―"감각질"―를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무능력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양자 베이즈주의자는 양자역학을 주관적 사유 양태―그 어떤 행위자도 자신의 경험을 구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도구―로 여긴다. 우리 각자가 상당히 성공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구성하기 위해 그런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객관적 사실이다. 그런데 양자역학 자체는 객관적 세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누구든지 간에 양자 이론을 사용하고 있는 특수한 행위자에 속하는, 그런 객관적 세계에 대한 경험들을 다룬다.

 

지난 구십 년 동안 양자 기초를 둘러쌌던 전례 없는 모호함을 고려하면,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비정통적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런데 큐비즘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그것은 원자적 규모의 영역들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무리 없이 많은 도움이 되었던 강하게 확립된 사유 방식을 인식하고 포기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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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푹스, 데이비드 머민, 뤼디거 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