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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프랭크: 오늘의 에세이-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Can Science Explain Everything?

 

―― 애덤 프랭크(Adam Frank)

 

과학은 완전하고 일의적인가? 과학은 시공간의 토대에서부터 의식의 자기 조명 능력들에 이르기까지 실재에 대한 포괄적이고 일괄적인 서술을 제공하는가? 이런 의문은, 무신론자들이 과학의 설명력은 종교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할 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벌어지는 대부분의 논쟁의 핵심를 때린다. 과학 대 종교라는 영원히 논쟁적인 영역을 벗어나면, 완전성에 대한 의문은 세계의 본성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접근을 둘러싼 핵심적인 철학적 논쟁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몇 주 전에 나의 동료 블로거 알바 노에(Alva Noe)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과학이 서술하는 근본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쟁점을 제기했다. 우리는 만물의 근저에 놓여 있는 기본 입자들의 영역에서는 그런 근본적인 실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향기, 색깔, 그리고 맛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화증 환자"라고 알바는 말했다. 알바의 도발적인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주장에 함축된 또 하나의 수수께끼에 사로잡혔다. 과학은 만물을 하나의 솔기 없는 전체로 설명할 수 있는가?

 

다양한 종류들의 과학이 존재한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사회학. 또한 각 분과학문은 자체의 하위 분과학문으로 나뉜다. 실제로 물리학은 입자물리학(쿼크 등), 핵물리학(핵), 응집물질물리학(고체 같은 물질의 집합체에 대한 연구), 양자광학(빛에 대한 연구), 그리고 전체물리학이 있다(몇 가지 예를 들면). 과학의 공통 서사는 어떤 분야의 바닥에서 시작하여 꼭대기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의 기본 법칙들을 안다면, 단계별로 노력하여 처음에는 하위 분과학문들을 포섭하고 결국에는 모든 현상에 대한 완전한 정합적인 설명에 틀림없이 이를 수 있다. 과학에서는 이런 환원주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자주 논의한다. 그런데 오늘 나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다.

 

오늘 논의되는 문제는 더 직접적이다. 현재 우리의 과학은 무엇이나 하나의 일의적 전체처럼 구성하는가? 과학의 한 분야, 또는 심지어 한 하위 분과학문를 좌우하는 이론들이 얼마나 잘 다른 영역들로 전환되는가? 과학은 폭넓은 단단한 토대로부터 세워진 보편 법칙들의 설명적 피라미드를 구성하는가? 아니면 과학은 각각이 세계의 어떤 더 작은 조각에 전념하는, 상대적으로 개별적인 더 작은 사원들의 집합체인가?

 

과학철학자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는 피라미드형 인간이 아니다. 카트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적은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의 정신으로 "얼룩진 세계(dappled world)"를 찬양하고 싶어한다.

 

하느님을 찬미하라 얼룩진 사물들,

얼룩소처럼 쌍을 이룬 색깔의 하늘,

헤엄치는 송어에 점점히 박힌 장미 반점들,

갓 타오르는 석탄처럼 선명한 빨간 알밤들, 핀치새의 날개들에 대해.

 

<<얼룩진 세계: 과학의 경계들에 대한 연구(The Dappled World: A Study of the Boundaries of Science)>>라는 책에서 카트라이트는 과학적 실천에 대한 사례 연구로부터 직접 주장한다. 그의 흥미를 끄는 "얼룩진" 것들은 과학의 일상적 작업을 구성하는 다양한 모형, 이론, 그리고 틀이다. 과학적 판본의 신의 관점을 제공하는 메타이론들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들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진리는 더 단순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 세계를 서술하는 법칙들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짜깁기해 놓은 것이다. 그것들은 공리와 정리들의 우아하고 추상적인 단순한 구조를 닮지 않았다.

 

카트라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발견한 법칙들과 관련하여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 이런 법칙들은 그것들이 발견되었던 통제된 실험 환경의 더 제한된 영역들 속에 존재할 따름이다. 카트라이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얼룩진 세계는 그가 생각하기에 포괄적인 거대 이론들의 바라던 환영적 세계에 못지않게 강력하거나 아름답다.

 

필립 키처(Philip Kitcher)는 과학과 실재에 대한 거대 이론적 관점을 의심하는 다른 한 철학자이다. <스톤(The Stone)>란에 기고한 멋진 글에서 그는 거대 이론의 최고 사례를 예시하기 위해 뉴턴 법칙들을 활용한다.

 

뉴턴은 소수의 물리적 원리들에 의거하여 모든 것이 설명될 우주에 대한 견해를 고대했다. 그런 뉴턴주의적 견해는 만년에 철학적으로 되어 최종 이론의 꿈을 공표하는 많은 과학자들에게 여전히 대단한 인기를 누린다.

 

그런데, 키처의 경우에, 과학의 실제적 실천에 의해 드러나는 실재는 더 단편적이다. 그가 서술하듯이,

 

뉴턴주의적 과학상에 사로잡힌 사상가들은 일반 현상들에 대한 일반적 기초를 바란다. 생명은 그와 같지 않다.

 

예를 들면, 분자생물학자들은 생명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생명의 더 제한된(여전히 주목할 만하지만) 기능들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한다. 키처의 주장은, 과학자들이 DNA에서 소화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모형들의 방대한 집합체를 거쳐 간다는 것이다. 물론 각 모형 또는 이론은 주변의 것들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실수는 그것들 모두를 완벽한 모듈 방식으로 조립되어 생명의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일의적 전체를 구성하는 레고 블록들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키처는 말한다. 키처의 견해에 따르면,

 

거대 이론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특수한 관심을 끄는 현상에 대한 국소적 통찰을 생성하는 많은 조각들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과학은 오직 국소적인 짜깁기 서술들을 통해서만 작동할 가능성이 이 주 전에 알바가 제기했던 의문들에 대한 한 접근방식인 듯 보인다. 내가 그에게 그 쟁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응대했다.

 

통일된 거대한 만물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맞을 것입니다. 물리학의 많은 부분을 통합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인류학과 인지과학은 말할 것도 없이, 분자생물학, 또는 공학, 또는 지질학에 착수하자마자 새로운 원리들과 철학적 표현으로 이른바 새로운 "존재론적 신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는 청년 시절에 과학이 거대 이론들을 제공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과학에 열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종교와 그것의 독단에 대한 일종의 합리적 대안을 제공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나이가 듦에 따라 나는 거대 주장들(과학적 또는 종교적)에 대해 더 회의적으로 되었다. 나는 카트라이트의 견해를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과학의 굉장한 능력과 아름다움은 거대 이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과학과 만물 이론들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에 대한 이런 대안들을 성찰하는 것이 내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킨다는 점이다.

 

사물이 내가 항상 생각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최종 이론에 대한 우리의 꿈이 바로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세계가 우리에 대해 얼룩져 있다면 어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인간임의 진리라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빛 속에 있는 것만큼이나 어둠 속에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