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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볼: 오늘의 인용-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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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견지에서, 헉슬리의 풍자는 의미 심장하지만, 그의 줄거리와 인물들은 빈약하다. 이것은 쥘 베른(Jules Verne)에서 J. G. 발라드(Ballard)까지 과학소설의 공통적인 특징이고, 그래서 이것 때문에 몇몇 비평가들은 과학소설 장르는 결코 "진정한 문학"을 산출할 수 없다고 역설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Into the Unknown)>>(1970)에서 로버트 필머스(Robert Philmus)가 주장했듯이, 과학소설은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1726년 작품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서부터 "현재 유행하고 있는 관념들에 내재하는 은유들에 의존하고 그것들을 신화로 바꾼다." 신화는 피상적인 인물들을 필요로 한다. 신화는 개인 심리에 대한 근대주의적 집중을 넘어서는 관심사들이 있다. 흔히 그런 관심사들은 풍자적인데, 관념들을 구체화함으로써 그것들의 한계점들이 드러나게 된다. 스위프트의 경우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헉슬리의 경우도 그랬다.

 

다시 말해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대부분의 과학소설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발명의 작업이 아니라 분석의 작업이다. 그 분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 경우에는 전간기)와 관련되어 있다. 헉슬리의 목표 대상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당대의 공포, 우생학과 과학적 승리주의에 대한 우려, 그리고 소비주의("우리의 포드"는 선택에 대한 모독이다)와 대중의 순응성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는 진정한 신랄함을 갖춘 유머로 이 모든 목표 대상을 타격했다. 진짜 쟁점은 세부 내용보다 더 넓다. 헉슬리가 서술했듯이, 진짜 쟁점은 "과학 자체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의 과학의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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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헉슬리의 예견은 돈과 관련하여 때때로 옳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의 국가는 오웰적인 억압이 아니라 소비주의라는 아편과 함께 우둔한 수동성을 유발하도록 복용시키는 약물(소마)을 통해서 자체 시민들을 통제한다. "진정으로 효율적인 전체주의 국가는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예속 상태를 애호하기 때문에 강제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는 노예들의 집단을 통제하는 국가일 것이다"라고 헉슬리는 적었다. 자신의 1958년 에세이 <<다시 가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Revisted)>>에서 헉슬리는 올바르게도 이렇게 언급했다. "현재 상황은 <<1984년>> 같은 것보다 <<멋진 신세계>> 같은 것에 대한 가능성이 더 높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디스토피아적 국가는 중단 없는, 사소한, 감각적 오락거리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사회적 현실과 정치적 현실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막는다.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런 오락거리들―정보오락, 사회적 매체, 명사 위주의 뉴스―이 오늘날 권위주의적 체제와 자유주의적 체제 모두에 유용하다는 점을 알기 위해서 음모 이론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런 예지의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멋진 신세계>>는 과학 또는 정치의 특수한 궤적에 관한 예방적 우화가 아니다. 중앙부화장(Central Hatchery)은 예언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과 마찬가지로, 그 책의 영속하는 힘은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인성을 상실할 수 있는 방식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 있다. 이런 방식들은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결과는 거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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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볼(Philip 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