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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오늘의 에세이-소멸을 앞두고 있는 대학들

 

소멸을 앞두고 있는 대학들

Universities head for extinction

 

―― 존 쿳시(John Coetzee)

 

존 [히긴스] 귀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학문의 자유에 관한 당신의 에세이를 보내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다루는 일반적인 의문―"대학이 자체의 학문의 자유를 상실할 때 대학은 여전히 대학인가?"―은 제게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고등교육의 미래에 대단히 중요한 듯 보입니다.

 

거의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그 의문의 사촌인 다음과 같은 의문입니다. "적절한 인문학부(또는 인문학부와 사회과학부)가 없는 대학이 여전히 대학일까?"

 

당신이 지적하듯이, ANC(아프리카 민족회의) 정부가 시행하는 대학의 자치에 관한 정책은 국민당 구정부가 시행했던 정책―대학의 자치 조항이 국가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한 대학들은 자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과 걱정스럽게도 유사합니다.

 

국민당은 국가, 그리고 국가 안에서 교육이 담당하는 역할에 관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는데, 학문의 자유 같은 영국식 자유주의적 신념의 신조들은 그 관념에 맞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학문의 자유에 대한 ANC의 무관심은 철학적 기반이 모자라며, 단순히 통제권이 없는 권력의 인가 현장들에 대한 방어적인 저항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학들은 결코 독특한 입장에 처해 있지 않습니다. 세계 전체에 걸쳐, 정부들이 공공선을 강화하는 전통적 의무에서 물러나서 자체를 국민경제의 관리자일 뿐이라고 재규정함에 따라, 대학들은 젊은이들에게 현대 경제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갖추게 하는 훈련학교로 변모해야 하는 압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경제의 일시적인 필요 사항들이 고등교육의 목적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도된 근시안적인 정책이며, 민주주의 사회―사실상 활발한 국민경제―에 불가결한 것은 그 어떤 주어진 순간에도 군림하는 국민 생활과 경제 생활의 패러다임들 배후에 놓인 가정들을 탐구하고 심문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비판적 문자 교양을 갖춘 시민 계급이라고 주장―설득력 있게―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무심한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될 영구적인 위험을 겪는다고 당신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무시당하는 인문학만이 그런 비판적 문자 교양에 대한 훈련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책이 전통적인 인문학이 이질적인 토대가 되어버린 대학 행정가들뿐 아니라 국가의 우선 순위을 고려하여 고등교육을 재구성하기에 바쁜 정치인들의 독서 목록에서 상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이 말해야 하는 것을 읽고 이해한 다음에 정치인들과 행정가들이 심경의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는 당신과 나의 희망이 실현될 확률이 높다고 믿지 않습니다.

 

저의 비관주의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제 생각에, 당신은 (넓게 간주되는) 서양에서 대학의 독립에 대한 공격을 추동하는 이데올로기적 힘을 약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공격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대학들이 수행하고 있던 것, 즉 세계가 운영되고 있는 방식에 대단히 잘못된 점이 있다는 관점에서 청년 집단들을 고무하고 그들에게 서양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을 위한 지적 재료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서 1980년대에 개시되었습니다.

 

좌파적 또는 무정부주의적 또는 반합리적 또는 반문명적 병폐로 다양하게 진단된 것을 강단에서 제거하려는 운동은 수십 년 동안 중단 없이 지속되었고, 그래서 대학들을 더 이상 소요와 반대의 온상으로 여기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성공했습니다.

 

정치 체제와 관련하여 특수한 지위를 주장하는 대학에 대한 정치 계급의 대응은 조잡하지만 효과적이었습니다. 유사시에 공적 자금을 놓고 경쟁하는 많은 기관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대학이 자체가 주창하는 고상한 이상들을 정말로 믿는다면, 대학은 자체의 신념을 위해 고사할 각오를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는 어떤 대학이 그런 도전을 받아들인 사례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실은, 지난 30년 동안 국가로부터의 압력에 맞서 자체를 방어함에 있어서 대학들의 기록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저항은 미약했고 제대로 조직적이지 않았습니다. 완패당한 교수들은 자신들의 참호로 퇴각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부득이 습득해야 하는 경영적 신언어에 맞서 간헐적으로 비꼬는 비판을 퍼붓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형세가 여전히 반전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당신의 낙관주의적인 신념을 제가 공유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에 이르게 됩니다. 대학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단계, 즉 독일 낭만주의의 인간주의 부활로부터 영감을 받은 단계는 이제 대체로 끝났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끝나버린 까닭은 그저 신자유주의적인 대학의 적들이 목적 달성에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라, 철학과 사학, 언어학을 기둥으로 삼고서 인문학에 정초하여 세워진 대학과 인문학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적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인문학부만이 문화가 끊임없이 갱신될 수 있게 하는 비판적 문자 교양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음과 같은 효과적인 의문이 당신에게 제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판적 문자 교양이 당신이 주장하는 만큼 중요하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런 문자 교양에 있어서 충분한 소양을 갖추기 위해 학생들이 헤시오도스와 페트라르카, 프랜시스 베이컨과 장 폴 사르트르, 의화단 운동과 삼십 년 전쟁에 관해 알 필요가 정말 있습니까? 과목명이 "읽기와 쓰기"라는 한 강좌에서는 학생들이 논증을 분해하고 좋은 설명문을 쓰도록 훈련받을 것이며, 그리고 과목명이 "위대한 사상들"이라는 나머지 한 강좌에서는 학생들이 고대 이집트에서 현재까지 세계 사상의 주류들에 관해 간략히 소개받게 될 두 개의 한 학기 강좌들을 간단히 개설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같은 두 개의 강좌들을 진행하는 것은 인문학부 전체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며, 그저 똑똑한 젊은 강사들로 이루어진 비판적 문자 교양학부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문화적 문자 교양의 기본 강좌들은 새로운 착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미국의 대학들에서 "신입생 작문"이라는 표제어 아래 개설되었습니다. 이 대학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문학이 현재 느끼고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압력에 대응해왔던 것입니다.

 

훌륭한 인문학적 교육이 비판적 문자 교양에 대한 어떤 규정에 의해 나름의 소양을 갖춘 졸업생들을 배출할 것이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잘못된 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전면적인 인문학적 교육만이 비판적 문자 교양을 갖추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정받기 어려운 듯 보이는데, 그런 주장은 항상 다음과 같은 반박의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적 문자 교양이 기술 또는 일단의 기술들일 뿐이라면, 그냥 그 기술 자체를 가르치면 되지 않는가? 그것이 더 간단하고, 게다가 비용이 덜 들지 않겠는가?

 

저는 자유로운 탐구의 본거지로서 대학과 인문학에 대한 당신의 옹호에 있어서 전적으로 당신을 지지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학문의 자유에 대한 전략적인 방어책, 즉 쉽게 무시당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방어책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의사결정 관계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줄 가망이 있는 그런 종류의 방어책을 세우는 당신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을 저는 존중합니다.

 

그런데 결국 당신은 맞서야 할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운 탐구가 필요합니다. 선생들과 학생들이 정신의 삶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기관들이 필요한 까닭은 그런 기관들이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좋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나빴던 구시대에 폴란드의 고등교육 기관들에서,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진짜 철학을 가르칠 수 없었을 때 당신은 근무 시간 외에, 대학을 벗어나서, 당신의 거실에서 철학 세미나를 진행할 것이라고 공표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철학은 계속 살아 남았습니다. 아마도 같은 노선을 따르는 어떤 행동이 대학들이 자체를 소멸된 것으로 재규정해버린 세상에서 인문학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지내십시오.

존 쿳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