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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보편자들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을 향하여

 

보편자들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을 향하여

Towards a Materialist Theory of Universal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때때로 유물론적이고 내재론적인 존재론들이 어떻게 보편자들을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유물론자의 경우에 보편자들은 의심스럽게 여겨진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어떤 종류의 상대주의나 사회적 구성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들의 명백한 존재론적 본성에서 비롯된다. 유물론자는 모든 것은 물질적이거나 물리적이라는 테제를 신봉하는 반면에, 보편자들은 무형의 것인 듯 보인다. "빨강" 같은 성질을 고려하자. 우리는 물질 속의 빨강을 특수한 파장들의 빛이 객체의 표면에서 굴절되어 특수한 방식으로 구성된 신경 체계들과 상호작용할 때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붉음은 어떤 객체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의 광자들, 그 객체의 표면, 그리고 신경 체계들 같은 다양한 물질적 존재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생하거나 일어나는 사건이다. 조명을 끄면, 우리가 저기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어둠에 가려진 빨강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빨강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조명을 껐을 때도 그 객체가 붉다고 생각하는 것은 태양이 떠오른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태양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상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지구가 공전하는 것이고, 그래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환영을 만들어낸다. 색깔 같은 성질들도 마찬가지다. 객체들은 어떤 색깔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일 뿐이며, 사실상 색깔은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물리적 사건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편자들이 아니라 그저 상호작용하는 존재자들의 영역에 있었다. 이해하기 더 어려운 것은 보편자로서의 붉음 같은 것이다. 보편성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수한 종류의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특성들을 말하고 있다. 틀림없이 세상에는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제곱이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동일하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멍청이들이 많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 관계가 보편적인지의 여부와 무관하다. 이것은 이 관계가 직각삼각형들의 특징이지 믿음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이 차원 공간에서 모든 직각삼각형은 이런 특성을 갖는다.

 

여기서 불가사의한 것은 어떻게 무언가―이런 보편적 특징들―가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복잡한 점들은 제쳐두고, 물질적 존재자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의 위치를 갖는 듯 보인다. 보편자들은 모든 곳에 있으면서 그 어디에도 없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기묘하다. 붉음 자체는 모든 붉은 객체 안에 존재하는 동시에 그 어떤 붉은 객체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붉음 자체는 무엇인가? 직각삼각형임 자체는 무엇인가? 붉음은 빨강 사건들을 초월하는 것인가? 그것, 즉 보편자는 그것이 표현되는 존재자들을 초월하는 나름의 존재자인가? 쉽게 그런 [플라톤주의적] 견해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고려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우주 전체에 단 하나의 직각삼각형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들의 합과 동일하다는 것은 맞을 것이다. 이것은 삼각형들의 이런 특성들이 시간과 공간에서의 물질적 현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항상 자체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라캉적 의미들 가운데 하나의 의미에서 실재적이라고 시사하는 듯 보인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자연 속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참인 기하학적 및 수학적 존재자들에 관한 수학적 지식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런 고려들을 감안하면, 물질적 존재자들에 무관하게 존재하며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관념적 존재자들의 집합 전체가 있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지 않겠는가? 물론 유물론자의 경우에 이것은 엄청나게 심란한 논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영혼과 신을 도입하기 시작하는가?

 

여기서 나는 보편자들의 존재론적 지위와 관련된 이 문제들―고백하건대, 나를 영구적으로 괴롭히고 어리둥절하게 하는 문제들―을 풀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보편자들에 대한 우리의 인지가 사실상 물질적 객체들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고 판명된다면 어쩔 것인가? 여기서 논제는 우리가 물질적 객체들로부터 추상하여 보편적 개념들을 구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객체들이 우리 대신에 추상화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사이보그들(Natural-Born Cyborgs)>>에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와 "확장된 마음 가설"에서 앤디 클라크(Andy Clark)가 탐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이다. 클라크의 확장된 마음 가설의 핵심은 우리의 생물학적 뇌 바깥의 객체와 매체들이 심상 또는 개념 또는 표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 대신에 우리의 인지적 작업의 일부를 수행하는 진정으로 물리적인 매체로서 정말 문자 그래로 우리 마음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런 외부적, 물리적 매체들이 없다면, 우리의 생물학적 뇌는 우리가 정기적으로 관여하는 다양한 형태의 인지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클라크는 주장한다. 따라서, 인지를 탐구하는 젓은 이런 물리적 매체들이 우리의 인지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 결정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우리의 생물학적 육체와 이런 물리적 매체들 사이의 이런 접속들을 탐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사이보그들>>에서 침팬지들에게 수행한 실험들을 논의하면서 클라크는 보편자와 추상물들을 생각할 수 있는 우리 능력에서 물질적 존재자들이 담당하는 역할을 간략히 다룬다. 거기서 클라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의 의문은... 기회주의적인 유년의 뇌가 언어의 세계를 만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일어나는 한 가지 일은 다양한 인지적 지름길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우리 뇌가 그렇지 않으면 다루기 어렵거나 그냥 보이지 않는 영역들을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내가 선호하는 예는 인간이 아니라 침팬지의 일종인 판 트로글로디테스(Pan troglodytes)에 관한 연구에서 비롯된다. 미합중국에 기반을 둔 연구자들인 톰슨(Thomson), 오덴(Oden), 그리고 보이센(Boysen)은 단순한 플라스틱 토큰(빨강 삼각형 같은)을 무엇이든 동일한 객체들의 쌍(예를 들면, 두 개의 신발)과 연관시키고 모양이 다른 플라스틱 토큰을 무엇이든 상이한 객체들의 쌍(컵 하나와 신발 하나, 또는 바나나 하나와 래틀 하나)과 연관시키도록 침팬지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에 토큰 훈련을 받은 침팬지들은, 플라스틱 토큰들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서도, 토큰 훈련을 받지 않은 침팬지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더 복잡한 추상적인 문제를 풀 수 있었다. 더 추상적인 그 문제(우리조차도 때때로 처음에는 어렵다고 깨닫는)는 높은 등급의 같음 또는 다름의 견지에서 객체들의 쌍들의 쌍들을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발/신발과 바나나/신발"이라는 쌍들의 쌍에 대한 적절한 판단은 "다르다"는 것인데, 각 쌍 안에서 드러난 관계들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신발/신발에서 (낮은 등급의) 관계는 "같음"이고, 바나나/신발에서 그것은 "다름"이다. 여기서 높은 등급의 관계―관계들 사이의 관계―은 다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나나/바나나와 컵/컵"이라는 두 쌍은 같음이라는 높은 등급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낮은 등급의 관계(같음)가 각 경우에 동일하기 때문이다.(70)

 

여기서 철학사 훈련을 받은 독자들은 <<파이돈>>에서 동일성에 관한 지식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 또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범주들의 목록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떠올릴 것이다. 플라톤의 존재론과 칸트의 존재론은 매우 상이하지만―플라톤의 경우에는 "동일성" 같은 형상들이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반면에, 칸트의 경우에는 그것들이 우리가 갖추고 태어나는 인지적 구조들이다―그들은 둘 다 경험으로부터 이런 보편자들에 관한 지식에 이를 수 있는 우리 능력에 반대하는 유사한 논변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우리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그 어떤 두 객체도 이런저런 측면에서 다르며, 그리고 이 두 객체를 이런 범주 아래 포섭할 때 우리는 이미 "같음"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두 객체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동일성이라는 형상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런 개념들을 경험에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언제나-이미 경험의 조건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클라크는 매우 다른 경로를 취한다. 클라크의 경우에, 우리로 하여금 이런 추론 형식들에 관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미 작동 중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추론 형식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구체적인 객체다. "+" 기호는 다른 것들을 나타내고 "=" 기호은 같은 것들을 나타낸다고 하자. 게다가, 이 기호들이 유아나 침팬지가 갖고 노는 작은 플라스틱 장난감이라고 생각하자. 추상적 사유와 관계들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장난감이다. 두 쌍둥이 같은 동일한 한 쌍의 객체를 제시받았을 때, 침팬지는 그 쌍 위에 노란 "=" 장난감를 놓는다. 반면에, 침팬지가 사과와 오렌지 같은 상이한 두 사물을 만날 때는 상이한 객체 위에 붉은 "+" 장난감을 놓는다. 다시 말해서, 그 두 쌍은 다른 한 객체―"=" 장난감 또는 "+" 장난감―로 환원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유나 인지의 측면에서 아래로 환원하기 능력의 기원을 만난다. 그 장난감들은 침팬지와 유아에 의해 자신들의 생물학적 인지 능력으로서 내부화되고, 그래서 객체의 소거 또는 아래로 환원하기의 결과로서 새로운 인지 능력들의 발달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객체의 소거 또는 아래로 환원하기를 통해서 생겨난 이 능력은 우리가 더 높은 등급의 더 추상적인 관계들을 얻고 나서야 표명된다. 이제 우리는 다른 한 객체―"=" 장난감 또는 "+" 장난감―의 개입을 통해서 객체들의 특수성을 소거해버렸고, 그래서 더 추상적인 동일성과 차이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클라크가 서술하듯이, 이제 우리는 관계들 사이의 관계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우리는 동일한 두 쌍둥이(=)와 동일한 두 자작나무(=)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닮지 않은 이 두 쌍(+)이 그럼에도 같음(=)의 예들의 특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인지적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왜 침팬지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인지 경험과 지각 경험이 아니라 두 장난감의 개입을 통해서 이것을 행할 수 있는가? 내 생각에, 그것은 객체들이 도상들과 관련될 때 기묘하게도 아래로 환원되거나 소거되는 동시에 현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침팬지가 오렌지 두 쌍과 신발 두 쌍이 모두 같은 범주에 속하고, 그래서 그것들이 같다고 말할 때 그 침팬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상이한 객체들이 아니라 장난감이다. 유명론에게 일 점! 그 장난감은 서로 동일하지 않은 구체적인 객체들({신발/신발}/{오렌지/오렌지})에 속하는 차이점들을 소거함으로써 이런 인지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부집합들로 이루어진  =/=로 구성된 집합을 얻을 뿐이다. 추상화와 보편성의 이런 위업은 다른 한 객체의 개입에 의해 수행되는 객체들의 아래로 환원하기를 통해서 달성된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것은 보편자들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의 기초이며, 그리고 최소한 세계에 존재하는 특수자들(개별적 존재자들)을 넘어서는 보편적 관계들에 대한 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점이라고 나는 희망한다. 그 다음 단계는, 논리학과 수학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같은 불변의 관계 또는 구조들을 제공하는 이런 유명론적 구조들("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에서 라캉에 의해 이미 정리된 것) 안에서 어떻게 문법적 또는 구문론적 관계들이 출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아래로 환원하기를 통해서 더 구체적인 객체들에 대한 표준 담지자들로서 작동하는 이런 객체들이 어떻게 물질적 체계들 안에서 "끌개들"로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고, 그래서 물리적 또는 물질적 체계가 어떻게 가치, 목적론적 행동, 또는 자기규제를 생성하기 시작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