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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프랭크: 오늘의 에세이-과학의 두 얼굴

 

과학의 두 얼굴

The Two Faces of Science

 

―― 애덤 프랭크(Adam Frank)

 

과학은 과감하게 급진적인데, 마음을 뒤틀리게 만드는 새로운 개념들을(데이터가 그것들을 뒷받침한다면) 수용하기 위해 기꺼이 기성의 지혜와 관념들을 내팽개친다. 과학은 가차없이 보수적인데, 새로운 주장들을 대단히 의심하고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소중한 진리들을 단호히 고수한다. 아무리 이상한 듯 보이더라도, 이 모순적인 두 진술은 "근대" 과학의 450년 역사 전체에 걸쳐 변함없이 참이었다. 사실상 그것들 덕분에 과학은 자체의 문화적 권력을 뿌리내리게 하는 안정성과 창조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연구 분야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과학자들은 급진/보수 양단 중에 어느 쪽을 수용해야 할지 어떻게 아는가? 과학자들은 언제 보수주의를 고수해야 하고, 언제 급진주의의 약속을 향한 배에 올라타야 하는가?

 

이런 의문들이 과학의 수수께끼의 근저에 놓여 있다. 이런 긴장에 대한 현대적 일례를 찾고 있다면,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힉스 보존에 이르게 되는 분야를 참조하면 된다. 그것은, 입자물리학은 문제가 하나 있으며, 일부 물리학자들에게는 그에 대한 해결책이 그 학문분야의 근본적인 규칙들을 급진적으로 다시 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 세기 동안 입자물리학(고에너지물리학으로도 불리는)의 목표는 실재의 근본적인 질료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질료를 지배하는 수학적 규칙들―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의 고된 노력을 통해서 입자물리학자들은 쿼크와 렙톤으로 불리는 입자들의 우주를 매끈하게 서술하는 거대한 표준모형을 만들어내었다. 이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은 보존이라고 불리는 다른 입자들에 의해 매개되었다. 뭉뚱거려서, 입자들과 상호작용들에 대한 서술 덕분에 표준모형은 엄청나게 강력한 업적이 되었다. 단 하나의 문제가 있을 뿐이었다.

 

표준모형은 자연적이지 않다.

 

물리학자들이 "자연성(naturalness)"이라는 술어를 사용할 때 그들은 구체적으로 수학적 법칙들 속에 편입된 자연 상수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 상수들은 상이한 종류의 집합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들의 세기 같은 것들을 서술한다. 그것들은 실험을 통해서 직접 측정되어야 하는 수들이다.

 

"자연적인" 이론에서는 이 수들의 크기가 궁극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것들의 상이한 값들이 수학적 법칙들의 그 다음 층위의 맥락 안에서 결국 설명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어떤 상수들은 대단히 작고 다른 상수들은 대단히 크게 설정하면서 자연이 그런 값들을 왜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결코 갖지 못하는 것은 ... 글쎄 ...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불행하게도 표준모형은 꽤 인위적이다. 그것은 그 어떤 정합적인 설명에도 매끈히 들어맞지 않는 값들을 지닌 다수의 상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더 나쁜 점은, 그 값들 가운데 일부가 매우 조금이라도 조정되면, 결국 매우 다른 종류의 우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세 조정된 우주"라고 불리는 잘 알려진 문제의 일부다.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은 이 상수들의 모든 "우연의 일치"를 해명할 더 깊은 층위의 이론을 탐색했다. 희망은 이 단일한 우주가 왜 현재의 모습으로 보이는지 명시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말해줄 단일한 포괄적 법칙이 발견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탐색은 실패한 듯 보이며, 그리고 그 실패의 여파로 자연성을 기꺼이 포기하는 연구자들도 존재한다. 이들 물리학자들은 그런 자연 상수들이 아마도 어떤 더 깊은 층위의 법칙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맹목적인 무작위성의 결과가 아닌지 묻는다. 이런 움직임은 다양한 별개의 "포켓" 우주들로 구성된 세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에 자연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다중우주의 수용을 요구한다.

 

마르첼로와 나는 이전에 여러 번 다중우주에 관해 적은 적이 있는데, 오늘의 요점은 그것의 궁극적인 진실성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오늘 나는 선택에 관해 숙고하고 싶다.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한 최종 이론의 꿈(스티븐 와인버그가 서술한 대로)을 고수하는가? 그들은 보수주의를 지지하는가? 아니면, 도처에서 이론적 장애물들을 만나는 그들은 그 목표를 포기하고 다중우주로 알려진, 현기증이 나게 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형식으로 급진주의를 수용하는가?

 

그런데 고려할 중요한 점이 있다. 현재 입자물리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독특하지 않다. 특히, 과학이 진전됨에 따라 이전 세대가 이단으로 여겼을 관념들에 적응하고 수용해야 했던 경우가 빈번했다. 전기와 자기에 관한 연구에서 장―공간 전체에 퍼져 있는 존재자―과 관련된 개념들이 최초로 도입되었을 때 순전히 기계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물리학자들의 저항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양자역학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영역으로의 진입을 감당하기 위해 과학의 꽤 본질적인 어떤 요소들이 변형되고 확장되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큰 의문, 화급한 의문은 이렇다. 데이터가 분명해지기 전에(또는 다중우주 모형들의 경우에서처럼 무엇이든 어떤 데이터가 있기 전에), 언제 보수적이어야 할지 또는 언제 급진적이어야 할지 어떻게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