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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철학의 텅 비어있음과 그것의 영광의 비밀

 

철학의 텅 비어있음과 그것의 영광의 비밀

The Emptiness of Philosophy and the Secret of Its Splendor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나는 정말 이 글을 좋은 의도로 적는다. 정말로 나는 진지하다. 철학과 이론에 영광, 위대함이 있다면, 그것은 자체의 텅 비어있음에 놓여 있다. 철학이 텅 비어있다면, 이것은 역사 전체에 걸쳐 그것 자체이며 그리고 변함이 없을 자체 내용의 전적인 부재에 놓여 있다. 철학은 라캉적 분석가, 즉 변함없는 내용이 부재하는 것과 비슷하며, 그리고 내가 라캉적 분석가들을 얼마나 멋지게 생각하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확실히, 철학은 고유하게 그것 자체의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 교과서들이 있다. "실재의 궁극적인 본성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옳고 그름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교과서들은 역사 전체에 걸쳐 변함없는 철학의 영원한 문제들, 철학에 고유한 문제들이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감각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철학자들은 문법과 역사를 혼동한다. 플라톤과 브랜덤에 대해 어떤 문제가 문법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질 것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그것들이 동일한 문제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동거자와 두 연인을 생각하자. 두 경우에 문법적 또는 형식적 구조는 동일하지만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동거자 중 한 사람이 나머지 동거자가 가게에서 돌아왔을 때 "초콜릿을 사왔어?"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질문은 완전히 문자 그대로이고 전적으로 초콜릿에 관한 것이다. "나는 네게 가게에서 초콜릿을 사오라고 부탁했는데, 그렇게 했어?" 그런데, 한 연인이 자신의 연인에게 "초콜릿을 사왔어?"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은 결코 초콜릿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초콜릿과 초콜릿의 의미와 관련된 내밀한 농담이 있을지도 모른다. 초콜릿을 사오는 것은 그들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은밀한 의례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내 초콜릿이야, 사랑하는 사람이여!"라는 말에서 그런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초콜릿"으로 부를지도 모른다. 두 경우에 질문의 문법적 구조는 동일하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철학의 영원한 문제들―그것들을 라캉적 의미에서의 실재계에 대한 문제들이라고 부르자―은 존재하지만, 철학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들이 텅 비어있다는 점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는 조건에서만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텅 비어있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변함없는 역사적 내용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과학과는 달리, 철학에는 아무 진보도 없을 것이다. 맥도웰이나 칸트가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넘어 전진하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잠시 후에 이것이 왜 그러한지 밝힐 것이다.

 

철학자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을 오해하는 것은 이례적이지 않다. 심지어 이런 오해가 철학적 사유에 본질적일지 누가 알겠는가.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철학은 여타의 분과학문과 실천들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준수해야 하는 지식의 조건을 개괄하는 기초적인 분과학문으로 기능하거나, 아니면 철학은 과학이 결코 알 수 없는 실재의 근본적인 본성에 관해 말하고 있거나, 아니면 철학은 방법론의 고유한 규칙들을 개괄하고 있다. 우스운 일은 도대체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은 자기 연구의 인식론적 및 방법론적 요건들을 정말로 잘 규정하고 있고, 그래서 지식에 관한 철학자의 강연을 들을 때마다 과학자들의 눈은 흐리멍덩해진다. 철학자들은 다른 분과학문들의 연구에 필요한 구체적인 요건들과 그런 요건들―탐구 대상의 실재계의 특징들―이 그런 탐구 분야들에 고유한 인식론과 방법론들을 좌우하는 방식을 결코 손수 익히지 않기 때문에 틀림없이 과학자들은 지식에 대한 철학자들의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철학이 여타의 학문분과에는 알려질 수 없는 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진저리가 나는 태도에 대해, 우리는 흔히 그들이 언급하는 이것이 불이 켜져 있지 않은 한밤중의 검은 소인 것으로 판명된다는 점을 알아챈다. 즉, 그것은 철학자들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어쨌든,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철학자들에 대한 이런 견해로는, 철학이 실제로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한 진정으로 성찰적인 일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에 대한 여타의 분과학문들의 의존성을 주장함으로써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를 필사적으로 감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가 어렵다.

 

나는, 진지하게 고려될 때 이런 태도들은 철학을 죽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없다면, 그것들이 짜증나고 진저리가 나지만 무해하다고 말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이런 태도들이 채택될 때, 철학은 자체의 궁극적인 적, 스콜라주의로 변환되는데, 여기서 과학을 모방하는 철학자들은 결국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쟁점들에 관해 다른 철학자들에게만 이야기하는 담론을 생산한다. 철학의 궁극적인 적은 소피스트도 아니고 괴짜도 아니다. 괴짜와 소피스트들은 무척 짜증나게 할 수 있지만 철학에 꼭 필요하다. 괴짜와 소피스트들이 철학에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스콜라주의자와 독단주의자의 위선의 기반을 끊임없이 약화시키고, 그래서 철학적 결단들의 우연성, 대안들의 가능성, 철학적 담론이 왕실 담론 또는 국가 담론으로서 기능할 때 자체적으로 끊임없이 억압하려고 애쓴다는 점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가장 큰 적은 괴짜나 소피스트가 아니라―그리고 어떤 사상가가 괴짜와 소피스트들에게 대응하는 방식에 의해 그의 육화된 의지 또는 욕망을 항상 식별할 수 있다(그런데 나는 그가 짜증을 내는지 여부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개념적으로 그리고 이론적 발명을 통해서 도대체 반응하는지 여부을 가리키고 있다)―스콜라주의적 철학자다. 철학적 만남은 항상 모든 종류의 열띤 정동에 의해 특징지워질 것이다. 누군가가 철학자인지 아니면 스콜라주의자인지를 가르는 척도는 열렬한 정동이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괴짜와 소피스트를 만났을 때 사유가 생성과 개념적 발명에 개방되어 있는지 여부에 놓여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세 시대 동안이든지, 또는 현상학 학술회의의 복도에서든지, 또는 역사주의자/해석학자들 사이에서든지, 또는 영미 분석철학의 어느 시기에서든지, 스콜라주의적 철학자가 지배할 때마다 철학은 사망했다. 스콜라주의적 철학자의 꿈은 항상 담론, 개념, 규칙, 그리고 문제들에 대한 제도적으로 정확히 서술된 일련의 규범들을 둘러싼 철학의 전문화였다. 그런데 이것이 불가능한 까닭은 철학은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스콜라주의적 철학자들이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을 가까스로 말하곤 하기 때문에 스콜라주의적 철학자들에 관한 내 진술이 약간 과장되었다는 점을 고백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철학의 상부 주변에 있는 비닐 봉지다.

 

분석적으로 또는 라캉적 분석가처럼 철학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분석가는 "에고 담론", 즉 누군가가 상상계의 층위에서 스스로를 서술하고 성찰하는 방식―"의사 선생님, 저는 x를 믿으며 y를 행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과 주체에 관한 담론, 즉 꿈, 농담, 실패로 끝난 행위, 실언, 모순점 등에서 표명되는 무의식의 언설을 구별하는 데 능숙하다. 메타텍스트, 즉 어떤 텍스트가 자체가 행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방식과 텍스트, 즉 어떤 텍스트가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을 구별하는 데 능숙하다. 여느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자체의 에고, 즉 철학이 자체를 개념화하는 방식과 자체의 주제, 즉 철학이 실제로 행하는 것이 있다. 에고 담론의 층위에서 철학은 자체를 여타의 분과학문과 실천들에 대한 토대이자 입법자로 여긴다. 철학은 자체를 여타의 분과학문과 실천들 앞에(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주체의 층위에서 철학은 항상 다른 모든 것 뒤에(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온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 뿐이다."

 

****

 

오랫동안 철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에게 철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사상가들에게는 "지식"만이 존재했다. 철학과 관련하여 지식 일반과 구분될 수 있는 특정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는 확실히 스스로를 "철학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데카르트는 스스로를 수학, 과학, 물리학, 생리학, 해부학 등을 연구하는 병사이자 인간으로 생각했다. 라이프니츠는 스스로를 외교관, 역사가, 수학자, 공학자 등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철학자로 서술할 때 우리는 시대착오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성찰>>, <<철학의 원리>>,또는 <<모나드론>> 같은 저작들을 그들 작업의 핵심에 놓을 때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잘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저작들은 그들이 다른 작업에서 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총괄적인 시각이며 그들이 다른 작업에서 대면한 방법론과 지식에 관한 어떤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성찰>>은 30년 전쟁 동안 벌어졌던 종교개혁 이후의 전쟁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가톨릭주의에 위협이 되지 않으며 사실상 신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논변이 필요했다. 17세기와 18세기의 모든 인식론 저작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종교개혁, 신흥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효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과학으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과학의 등장의 결과로서 종교에 발생했었던 돌연변이들에 의해 강요된 사회적 및 정치적 개입이다.

 

실제로 철학은 현대 대학 또는 강단이 등장한 19세기가 되어서야 생성되게 된다. 많은 측면에서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출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약간 유사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형이상학(metaphysics)"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물리학(자연학) 이후"가 된다. 사서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연들을 함께 묶으려고 시도했을 때, 그들은 자연학 속의 담론들과 관련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상이하기도 한 일련의 담론들을 찾아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분류할지 확신하지 못한 그들은 그것들을 통째로 묶어서 "형이상학", 즉 자연학 이후에 오는 것으로 불렀다. 많은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일종의 여분이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무엇인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책들의 그 어느 것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일련의 문제와 성찰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철학이 처해 있던 상황이다. 19세기 경에 과학―원래 "자연철학"이라고 불렸던―은 독립적인 지식 분야로서 생성되었다. 점진적으로 과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에 속했었던 문제들을 빼앗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은 물리학과 천문학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생물학, 의학, 생리학, 화학, 그리고 심리학이 엄밀한 분과학문으로 생성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철학은 자신의 영토를 더욱 더 많이 상실하고 있었다. 하나의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출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유사했다. 그것은 1) 여타의 분과학문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알맞지 않으며, 그리고 2) 그것이 실제로 주제를 갖고 있는지 또는 그것이 도대체 분과학문인지 확신하지도 못한 일련의 문제와 성찰들이었다. 철학이 자체의 텅 비어있음을 의식하게 됨에 따라 위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도대체 중요한 사람인가?" 철학자들은 울부짖었다. 이것에 대한 다양한 대응들이 있었다. 나중에 현상학과 비엔나 학파에서 나타난 한 대응은 철학을 여타의 분과학문들에 대한 토대로서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런 반응은 자기도취적인 과대보상에 의거한 부정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철학은 자체를 여타 분과학문들의 입법자로 제시하는 쾌락과 여타의 분과학문들에서 발견되는 지식보다 뛰어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쾌락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은 철학자들을 그렇게 많이 괴롭히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여타의 분과학문들은 자연적 태도 또는 소박한 실재론 또는 그 밖에 비슷한 것의 환영들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들은 진정한 통찰과 이해를 갖추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설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경우에서처럼 철학이 인식론적 근거를 제공하면서 과학의 뒤를 좇는 과학의 하녀이기를 바라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다른 한 전략은, 철학은 여타의 분과학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에 관한 특정한 지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이 전략을 택하는 철학자들은 이것이 정말 무엇인지 결코 말할 수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전략은 과학의 침입으로부터 철학을 보호할 강경한 구분짓기―굴드의 "이중 세력권(twin magisteria)"―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결코 공격당하지 않을 요새의 수비병으로 제시함으로써 과학의 발전을 안전하게 무시할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서, 실제로 나타났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방어적인 자세처럼 보였던, 자연적 태도, 실증주의, 도구적 실재론, 그리고 과학주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 심리학, 그리고 신경학이 점차로 생성됨에 따라 이 입장을 고수하기가 더욱 더 어려워졌다(그렇지만 나는 진화론이나 신경학이 셰익스피어나 괴테에 관해 말해줄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얄궂게도, 이런 입장들은 인간에 의해 유발된 기후변화와 진화를 무시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와 보수 인사들의 입장들과 비슷하게 보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전략은 해석학의 경우에서처럼 철학이 철학사에 관한 성찰이 되는 것이었다. 기묘하게도,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면, 철학을 데카르트나 후설이 수행했었던 대로는 결코 수행할 수 없으며, 과거에 철학자들에 수행했었던 것에 관해 성찰할 수 있을 뿐이다. 아카데미의 현판에 걸린 금언은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에서 "과거의 철학자를 감히 비판하지 않는 자와 현재 상태에 관한 독창적인 주장을 제시하겠다는 결의가 없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로 바뀌었다. 여기서 철학은 상상의 어원학을 통해 사유하게 되었다.

 

철학은 그것 자체의 텅 비어있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철학 자체의 고동치는 심장인 이 텅 비어있음을 인정한다면, 철학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은 끔찍했다. 그 결과, 주체가 그것 자체의 실체적 내용이 없다는 진실, 즉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실증성도 없다는 끔찍한 진실로부터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에고를 구축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철학도 그것 자체의 텅 비어있음으로부터 자체를 보호하는 에고, 자기 반영물을 구성한다. 그런데 텅 비어있음과 아무것도 아님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님은 무엇이든 어떤 존재의 부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텅 비어있음은 본질적으로 유동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는 데 있다.

 

철학이 플라톤 이래로 지금까지 방어적 에고가 아니라 주체로서 수행해온 것에 관해 얼마간 성찰했었더라면, 철학은 자체의 위대성과 가치가 자체의 텅 비어있음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식했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바디우가 이것을 인식한 최초의 철학자다. 철학에 관해―그리고 이런 철학관을 승인하는 그의 일반적 주장들을 모두 승인할 필요는 없다―바디우는 두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 바디우는 철학은 그것 자체의 지식을 산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타의 분과학문들과는 달리, 철학은 탐구 대상이 없다. 둘째, 따라서 철학은 사건적이다. 그것은 항상 모든 곳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어떤 시점들에서만 발생한다. 철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기들도 있으며―예를 들면, 중세 시대뿐 아니라 1980년대와 1990년대 동안에도 철학은 부재했던 것처럼 보인다―철학이 도처에 있는 듯 보이는 시기들도 있다고 바디우는 넌지시 말한다. 왜 그러한가?

 

바디우가 철학은 그것 자체의 대상 또는 내용―지식 또는 존재 또는 선에 관한 영원한 문제들 같은―이 없다고 넌지시 말할 때, 그는 철학에 대한 조건은 항상 철학 외적인 것으로서 정치, 과학, 예술, 그리고 이른바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철학은 항상 철학의 외부에서 진리를 생산하는 실천들에 의존하며 철학 자체는 그것 자체의 그 어떤 진리도 생산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철학사를 살펴보면 이 유형을 거듭해서 보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과학의 변화(사유의 가능성으로서의 기하학 형식의 등장)와 정치의 변화에 대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과 예술에 대응한 듯 보인다. 나중에, 계몽주의 합리론자와 경험론자들의 경우에, 철학은 새로운 과학,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과 종교개혁이 낳은 모든 종교전쟁, 자본주의의 등장과 교회 및 귀족으로부터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권력 이동의 결과로 인한 정치의 변화, 상징적인 것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형식으로의 예술의 전적인 변화 등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이런 사례들에서 철학은 철학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진리를 생산하는 전례 없는 실천들에 대한 대응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은 사건적이다. 철학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이런 실천들의 분출이 발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은 진보하지 않는다. 이런 사건들이 전례가 없는 것인 한, 그것들이 역사적인 분기점인 한, 문제들의 문법은 여전히 동일하더라도 각 임계점에서 그것들은 변화한다. 지식에 관한 문제는 문법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더라도 데카르트와 로크의 경우와 오늘날 우리의 경우에 대해서 상이하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다원론적 상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문제의 본성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온다. 철학은 여타의 탐구 분야들에 대한 예비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삶, 지식, 존재, 우리 자신 등의 옛 방식들이 붕괴되어 버리고 우리 자신, 사회적 삶, 그리고 세계를 만나는 새로운 전례 없는 방식들이 생성되었을 때 출현하는 성찰 형식이다. 이것은 결코 철학이 다른 분과학문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들뢰즈가 주장하듯이, 철학은 항상 자체에 고유한 관념들과 그것 자체의 담론을 만들어내지만, 예술과 과학에 관련하여 그렇다(그리고 정치와 기술을 덧붙일 수 있다). 오히려, 상황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과 유사하다. 예를 들면, 철학은 이렇게 묻는다. "신경학에 어떤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 정의, 자유,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등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또 다시, "진화론이 어떤 진리를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보편자, 종류, 그리고 본질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다시, "이 예술이 가능하고, 이것이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이 예술 일반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 아랍의 봄, 그리고 터키에서 목격되고 있는 조직 형태들을 감안하면, 이것이 정치와 통치에 대해 어떤 가능성들을 개방하는가?"

 

바디우는 철학이란 현재적인 것, 즉 현재 영원한 것―항상 존재했던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에 관해 생각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과 모든 것을 재배치하는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철학이 현재적인 것을 성찰하고 사유하는 한, 철학은 그것이 발생하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철학은 필연적으로 텅 비어있다. 철학의 목적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철학이 세계의 우연적 사건들을 아무튼 재판할 수 있는 대법원인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목적은 현재의 혼돈 속에서 어렴풋이 식별될 수 있을 뿐인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흔히 과학소설과 공포소설이 "철학자들"이 행하는 많은 작업보다 철학 자체의 정신에 더 가깝다. 외양에도 불구하고, 과학소설은 결코 미래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항상 현재 어렴풋이 맥동하고 있는 경향들의 반영이다. 게다가, 철학은 결코 자체의 역사나 과거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현재를 생각하고자 할 때 철학은 끊임없이 자체의 역사에 의존하지만―항상 식별하기가 매우 어려운 현재의 한 조각을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것 자체의 과거에 기대는 목적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보여주거나 "이것이 우리가 여기 이르게된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불연속성, 현재의 갑작스럽고 전례 없는 특질, 역사와의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현재의 비역사적인 특질을 보여주며, 그리고 미래주의적 기술처럼 현재 매우 어렴풋이 존재하고 있는 것의 한 조각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개념들을 철학사의 잔해들을 통해서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사회의 "자아들" 가운데 하나인데, 여기서 자아는 존재자와는 차별화되면서 자체의 존재에 관해 성찰하며, 자체의 존재의 어떤 구성 요소들이 심화되고 고려될 수 있도록 그것들을 해방시키는 존재자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과목이 아니라, 어떤 드문 조건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기능이다. 기능으로서의 철학은 아무 내용도 없는데, 발생하는 각각의 현재에 대해 그런 조건이 독특하고, 그래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 외적인 것들에 대해 맹목적인 전문화와 스콜라주의화를 향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학과를 유지해야 한다면, 이것은 전례 없는 것들의 흔적이 보호받고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철학의 기능, 현대에 대한 철학의 특수한 관계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현재와 과거를 대조함으로써 갑작스런 것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 사건들의 도서관을 유지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현재의 한 조각과 현재에서 가능한 것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무기화된 개념들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개념적 전략들의 무기고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