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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전이와 숭고한 것들

 

전이와 숭고한 것들

Transference and the Sublime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세미나 11>>에서 라캉(Lacan)은 전이에 대한 매우 다른 설명을 전개한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전이는 현재의 누군가를 향해 과거의 느낌과 행동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러분의 상사는 아무튼 여러분의 아버지를 닮았고, 따라서 여러분은 결국 그와 관련된 "행동 대본"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되는데, 여러분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했듯이 그에게 맞서고, 그의 모든 행위와 말을 학대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그를 보호자를 여기는 등의 행동을 한다. 이런 전이 개념에 따르면, 사실상 우리의 행동과 해석들이 자신의 상사와 도대체 거의 아무 관계도 없으며, 오히려 과거에 어떤 사람과 맺은 관계의 유령 같은 반복일 때에도 우리는 문제가 우리 자신과 상사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상황이 자신의 상사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라캉은 이런 현상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라캉의 경우에, 전이는 현재의 다른 한 인물에 대해 과거의 관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주체와 대타자의 지식 사이의 관계다. 라캉은, 분석가가 알고 있다고 피분석가가 믿을 때 그는 전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의 차원이 중요하다. 그것은 분석자가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분석자가 피분적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예증했다는 것이 아니다. 피분석자가 분석자의 지식에 대한 증거를 목격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대신에 전이 관계에서는 그저 분석자가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피분석자가 믿는다는 것이다. 반대되는 모든 증거―결국 임상에서 분석자들은 대체로 침묵을 지킨다―에도 불구하고, 전이 상태에 놓인 피분석자는 분석자에게 가늠할 수 없는 지식을 귀속시킨다.

 

이런 점에서, 전이는 숭고한 것들과 유사하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숭고한 것은, 우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우주의 거대함을 상상해볼 때, 또는 강력한 허리케인을 만날 때처럼 우리의 표현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숭고한 것은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알 수 있는 우리 능력을 능가한다. 이것이 피분석자의 시각에서 추정된 분석가의 지식과 관련되는 방식이다. 분석가는 피분석가의 마음을 통찰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된다. 예를 들어, 연회에서 심리치료사를 만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생각하자. 소개를 받았을 때 사람들이 "말을 조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전이가 작동하는 일례다. 그 사람은 분석자가 주체의 진실을 폭로할 수 있게 하는 은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이에 대한 증거도 없다. 불가사의함, 은밀함, 그리고 불가해성에 대한 [피분석자의] 경험이 바로 분석자라는 사람에 내재하는 숭고함의 차원이다.

 

우리는, 피분석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분석자의 지식은 물러서 있으며, 그리고 분석자의 말에 효험이나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물러서 있음, 바로 이런 불가사의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주장은 어떤 사변적 실재론 진영들에서 전개되었던 대로의 물러서 있음(withdrawal)이라는 개념에 대해 틀림없이 우리로 하여금 망설이게 한다. 전이는 권력과 집단 관계들의 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이는 권력자들이 타자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주요한 방식이며, 그리고 어떤 사유와 실천의 조직체들에 대한 저항이 형성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에 관해 조금 더 다루어 보자.

 

라캉의 경우에는 지식에 대한 이런 믿음이 분석가들의 말에 효험을 부여하는 것이다. 분석자가 지식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고 주체가 믿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분석자의 말이 전이 상태에 놓여 있는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서 그의 말이 이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위해서 분석가가 정말로 지식을 지니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어떤 환자가 자신의 일상을 설명하면서 누워 있을 때, 분석자가 갑자기 무심결에 기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분석자의 입장에서 그 기침은 개입이고 의미를 갖는다. 물론 역설은, 분석자가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분석자가 분석자의 기침에 의미를 투사한다는 것이다. 항상 모든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분석자이지만, 이 작업은 분석자가 은밀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피분석자가 믿고 있다는 조건에서만 진행되고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분석자에 대한 피분석자의 애착을 푸는 열쇠이고, 그런 전이가 없다면 분석자의 말이 아무 형향도 미칠 수 없다. 예를 들면, 정신분석이 이단적이라고 믿고 있는 경건한 가톨릭 교도는 전이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직자에게 자문을 요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임상 밖에서도 전이는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면, 교육에서 학생이 자신의 선생에게 아무 전이도 갖지 않는다면 아무 학습도 일어날 수 없다. 선생의 말은 아무 효과도 없이 미끄러질 것이다. 우리는 특히 정치의 경우에서 그것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지도자에 대한 열렬한 추종자의 예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추종자는 지도자에게서 숭고한 무언가, 즉 추종자의 지칠 줄 모르는 애착의 원리가 되는,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본다. 지도자가 무엇을 행하든지 상관없이, 그의 행위들이 아무리 실패로 끝난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또는 그의 행위들이 추종자의 이익에 아무리 반하더라도, 추종자는 탁월함, "11차원의 체스", 그리고 지도자의 행위 배후에 놓인 유익한 동기밖에 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전이는 편집증과 어떤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편집증에 사로잡힌 사람의 경우에, 자신의 망상의 진실성에 반하는 증거는 그 망상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그 어떤 힘도 없으며 심지어 그 망상의 진실성을 지지하는 증거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지도자나 대의에 대한 전이 애착에 사로잡힌 추종자는 반대되는 그 어떤 증거나 비판에도 끄덕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들은 지도자나 대의의 영웅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기능하게 되며, 추종자들과 지도자는 그들의 고귀한 목적들을 훼손하는 음모의 희생자들이라는 결론을 만들어낸다. 애착의 근거로서 기능하는 것은, 지도자의 바로 그 불가사의함, 지도자 자신이 아니라 지도자에 내재하는 무언가의 물러서 있음이다.

 

부정적인 애착도 비슷한 힘을 행사한다. 열렬한 추종자가 지도자에게 숭고한 지식과 지혜를 귀속시키는 반면에, 부정적인 전이에서는 주체가 그들의 실제 말과 행위에 무관하게 타자 집단에게 악의적인 동기들을 귀속시킨다. 이 논리는 최근에 <<데모크라시 나우(Democracy Now)>>에 의해 수행된 공화당원들의 사고 방식에 관한 연구에서 드러난다. 오바마의 중도우파적인 온건한 정책 제안과 입장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공화당원들은 오바마가 부의 재분배, 종교적 자유의 훼손, 총의 탈취 등에 열중하는 사회주의자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에 반대되는 일단의 증거 전체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원들은 이것들이 오바마의 진정한 동기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의 동기들이 더 물러서 있을수록, 그가 이런 동기들과 유사한 그 어떤 일단의 동기들을 덜 표명하면 할수록, 이 주체들은 이것들이 그가 진정으로 꾀하는 것이라고 더욱 더 확신한다. 또 다시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전이 현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주변화된 타자들의 본질이 지배 집단들에 의해 전통적으로 거론되어왔던 방식이 아닌가? 인종주의자, 여성혐오자, 그리고 반유대주의자가 그들이 주변화시키고자 하는 집단들에 긍정적인 특징들을 귀속시키는 것이 참인 반면에, 또한 그들은 항상 타자화된 집단들이 불가해하고 불가사의한 물러서 있는 본질―알 수 없고 표명할 수 없는 물러서 있는 본질, 그럼에도 위협적이고 위험하기 때문에 통제되고 제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예를 들면, 매혹의 원천이자 여성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자율과 자결권을 부정하기 위한 근거로서 기능하는 이른바 "여성의 신비"에 관해 생각하자. 여성의 신비, 즉 여성들의 본질로 추정되는 것의 물러서 있음 속에서 여성들은 위험하고 위협적이며, 그래서 통제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종속에 대한 변호로서 기능하는 것은 신비, 불가사의함, 전이다. 물러서 있는 본질들―아무리 기묘하거나 이상할지라도―의 부정신학은 해방적인 것으로서 존중과 돌봄의 태도들을 계발하기는 커녕, 타자들에 대한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관계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문제는 이런 전이 형태들을 타파하기 위해 어떤 전략들이 고안될 수 있는지와 관련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