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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현상적 의식,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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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렇다. 우리가 자기 신체의 효과들을 경험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의식이 육화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테제는 의식이 우리의 체험 상태들의 원인들에 대한 믿을 만한 지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상학이란 모든 주장은 의식과 경험의 증거들에 근거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다소간 주장하는 토대주의적 담론이라는 점을 떠올리자. 의식이 자체의 원인들에 대한 상당히 신뢰할 수 없는 지침이라는 점을 알아차린다면, 이것은 하나의 방법론으로서의 현상학에 대한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 [...]

 

여기서 현상학적 서술들의 가치와 중요성은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 현상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경험 등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기여했다. 현상학은 폐기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나는 좋은 현상학이 없다면 좋은 인지과학이나 신경과학이 있을 수 없다는 테제를 논박하고 있지도 않다. 인지과학의 많은 부분이 터무니없는 허튼소리인데, 인지과학이 주의 깊은 서술적 분석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경험과 마음에 관한 철저히 잘못된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논박이 되고 있는 점은 현상학이 자체의 권리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주권자적이고 토대주의적인 역할이다. 현상학은 설명될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지도 모르지만, 설명하지는 못한다.

 

[...] 내 테제는, 의식적 상태들은 자체의 원인들에 대한 믿을 만한 통찰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고, 그래서 현상학적 서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심적 생활을 완전히 곡해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 불안에 관한 하이데거의 논의를 고려하자. 하이데거는 불안이 우리의 "세계 내 존재", 의미, 죽음을 향해 감, 그리고 진정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나의 불안 상태는, 오직 나만이 내 자신의 죽음을 겪을 수 있으며 아무도 내 대신에 그것을 겪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되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결정은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자각으로 이끈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하이데거는 불안이란 의미와 관련된 특수한 동조 또는 정동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불안의 경험이 확실히 하이데거가 서술하는 대로 나타나는 듯 보인다는 점을 반박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이것이 한 사람의 불안의 원천일 수도 있는 경우들이 있다는 점도 반박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반박하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들에서 의식이 인과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믿을 만한 지침이라는 테제다.

[...]

도처에 만연하는 불안을 겪고 있는 [현상학적] 환자가 심리 치료를 받기 위해  실존주의적 심리치료사를 방문한다고 가정하자. 그는 자신이 죽음을 향해 감, 자신의 삶에서 의미가 구성되는 방식 등을 여러 해 동안 논의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뀌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왜 그러한가? 하나의 가능한 이유는, 현상학적 환자의 불안은 결코 죽음을 향해 감, 의미, 책임, 자유 등과 결코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된 육체가 자체 내에서 비롯되는 불가사의한 정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헛갈리는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그의 불안은 의미나 죽음을 향해 감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경세포들이 세로토린을 너무나 빨리 흡수함으로써 초래된 결과다. [...] 이 경우에 적절한 치료법은 수년 간의 실존주의적 심리 요법이 아니라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다. [...]

 

[...] 우리는 의식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 의식적 경험을 유발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심리치료사나 라캉주의자의 경우처럼 의미의 영역일 수도 있고, 또는 순전히 생리학적 영역일 수도 있다. 의식은 어느 영역인지 결정할 수 없다.

 

[...] 정신의학의 경우, 정동적 상태의 원인은 유기적이라고 섣불리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이 라캉주의적 또는 실존주의적 심리치료사에 의해 서술되는 것들과 같은 기호학적 이유들 때문에 심한 불안을 겪을 수 있지만, 정신과 의사는 즉각적으로 모든 불안은 신경전달물질이나 뇌 손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가정하고, 어떤 종류의 대화 요법이 적절한 치료법일 때 SSRI를 처방한다. [...] 그의 공황적 심근경색의 기원이 사실상 기호학적일 때, 독단적인 의사는 그의 신경화학과 관련하여 무언가 잘못되었을 뿐이라고 가정할 것이다. [...] [그가 처한] 환경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당히 잔혹한 치료법을 시행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십 세기 초 부모에 반항적이었던 한 여인에 관한 논문이 떠오른다. 정신과 의사들은 그 여인이 유기적 형식의 히스테리를 겪고 있다고 진단하여 정신병원에 보냈고, 그는 자신의 여생을 향정신성 약제들의 혼합물, 충격 요법, 그리고 부분적인 전두엽 절제술로 무감각하게 보냈다. 이 여인의 전기를 읽는다면, 그의 문제는 "그의 세계의 세계성", 의미의 우주, 그리고 그가 거주했던 세상이었지 유기적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은 상당히 명백하다. 여기서 기호학적 조건이 자연화되었고, 이 여인의 삶을 파괴했다.

 

이것이 내가 논의했던 보로메오 비판 이론의 배후에 있는 핵심이다. 보로메오 비판 이론의 매듭(라캉의 매듭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은 세 가지 질서가 겹치고 서로 침투하는 동시에 자율적이란 점을 강조할 의도로 제시된다. 그것은 둘 다의 논리이지 둘 중에 하나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이 거부하고자 하는 점은 세 가지 질서 가운데 어느 것이든 그것이 나머지 것들의 토대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상징계의 질서는 기호, 기표, 언어, 의미, 그리고 라캉적 실재계의 질서다. 상상계의 질서는 현상학적 체험의 질서다. 실재계의 질서는 생물학, 물리학, 화학, 그리고 신경학에 의해 탐구되는 물리적인 것, 자연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들의 질서다[...].

 

그 세 가지 질서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된] 불안 장애를 겪고 있는 현상학적 환자의 경우에는 실재계의 질서가 상상계와 상징계의 질서를 지배했다. 그의 불안 장애는 의미나 기표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유기적인 기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상징계의 질서에 영향(매우 왜곡된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현상학적 환자는 [...] 그저 화학적 불균형을 겪고 있었을 때, 자신의 불안이 죽음을 향해 가는 것과 실존주의적 삶의 기획을 단호하게 포용하지 못한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례에서는] 상징계가 상상계와 실재계를 지배한다. [그의] 공황적 심근경색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의미의 위기, [...] 기표의 우주가 위협받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 이런 기호학적 위기가 실재적인 생리학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는 심근경색을 겪었다.

 

 [...]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정동("관념")의 경우에 대응하는 육체적 사건이 존재하고, 모든 육체적 사건의 경우에 대응하는 정동적 경험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두 영역은 종류가 다르고, 그래서 우리는, 예를 들면, fMRI에서 관측되는 육체적 사건에서 정동을 추론할 수 없고(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피험자의 뇌를 스캔할 때 그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정동적 경험으로부터 육체적 사건을 추론할 수 없다(이런 이유 때문에 fMRI가 계시적일 수 있고, 의학과 심리학이 이런 것들을 이론화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참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과관계는 양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관념들"의 영역은 육체적 상태들을 산출할 수 있고 육체적 상태들은 관념들을 산출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다른 계열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들을 생각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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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