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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유물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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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턴(Morton)과 하만(Harman)이 물질을 포기한 점과 객체들을 형상으로 동화시킨 점은 비극적이며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할 것이라고 꽤 많이 생각한다. 우리를 지구의 살로 틀림없이 도로 데려다 줄 철학적 틀로서 시작한 것이 그 대신에 다시 한번 바로 그 지구의 소거를 인정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또한 나는, 이런 비판들 속에는 인문학을 위한 고유한 지위를 개척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과학에 관한 많은 불안이 있다고 추측한다. 또한 나는, 유물론에 반대하는 하만의 논변은 대단히 허약하며 허수아비에 가깝다는 점을 깨닫는다고 덧붙여야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뉴욕 증권거래소가 벽돌, 유리, 강철, 철선 등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옳다! 그렇지만, 유물론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조직이 존재자들의 정체에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을 부정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는 전부는, 존재하는 그 어떤 조직에 대해서도 조직은 육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뿐이다.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육화되어야 한다는 논제를 신봉하는 한, 유물론적 틀 안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요지는 "유물론"과 "환원주의"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환원주의적 유물론들도 존재하는 반면에, 비환원주의적 유물론도 더 많이 존재한다. 유물론은 창발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플라톤적 형상, 정신 등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비유물론과 대조를 이룬다. 루크레티우스도 이런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는 얼마나 다른 종류들의 존재자들이 오로지 조립체들에서 원자들이 조직되는 방식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지, 즉 존재자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부분들만이 아니라 부분들 사이의 관계도 중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몇 가지 더 언급하자.

 

1) 우리는 물질이 무엇인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며, 경험적 탐구를 통해서만 물질을 발견한다. 이것은 물질의 실재성, 즉 물질이 사유의 구성물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의 일부다. 객체를 형상으로 환원할 때―그리고 이것은 환원이다―에는 이렇게 진술될 수 없다.

 

2) 유물론은 물리학이 존재에 관한 유일한 학문이라는 점을 수반하지 않는다. 창발을 인정하는 비환원주의적 유물론 내에서는 상이한 규모의 층위들에서 상이한 조직 형태들―아원자적 형태, 원자적 형태, 화학적 형태, 생물학적 형태, 심리학적 형태, 사회적 형태 등―을 얻게 된다. 규모와 조직의 각 층위에서는 더 낮은 층위들에서 연역될 수 없었던(그렇지만 더 낮은 층위들과 모순이 없는) 내재적인 조직의 "법칙들" 또는 원리들을 얻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다양한 상이한 탐구 분야들을 얻는다. 경제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리학과 모순이 없어야 하지만, 물리학은 경제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양자역학으로부터 오랑우탕의 특성들을 추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오랑우탕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과정이라면 무엇이든 물리학과 모순이 없어야 한다. <<자연주의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Naturalism)>> 같은 책들에서 로이 바스카(Roy Bhaskar)는 이런 점들과 관련하여 뛰어나다. 읽을 가치가 꽤 있다.

 

3) 나는 유물론이 아무튼 한 유형의 균일한 물질이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묘하다고 깨닫는다. 그리스 로마의 원자론자들도 원자들은 다양한 상이한 형태들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경우에, 이것은 존재하는 상이한 유형들의 존재자들을 설명하는 데 중요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으로부터 거의 무한히 많은 상이한 유형들의 물리적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안다. 두 존재자가 두 개의 상이한 유형들의 물리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들이 아무튼 물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유물론은 다원론이다.

 

4) 나는 물리학과 여타 과학들이 어떤 비물질적 존재자들을 연구하는지 알고 싶다. 물리학에서는 빛조차도 물질적/에너지적 존재자이다.

 

5) [...]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토대는 다른 물질적 존재자들(진흙, 강철, 석탄, 나무 등)에 작용하여 그것들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존재자들을 만들어내는 생물학적 신체들(물질적 존재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진정한 유물론이다(그리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그리스 로마 원자론자들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개념성(헤겔의 관념론)에서 실천으로의 전환은 물질적 존재자들에 의한, 물질적 존재자들에 개입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었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통해서 [우리는] 지리, 이용할 수 있는 자원, 피로에 지친 신체, 날씨 사건 등(모두 물질성)의 특징들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발견할 것이다. 슬프게도, 이어진 "운동 마르크스주의"와 강단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것이 상실되고 우리는 다시 담론적인 것의 우위와 물질적인 것들의 소거로 복귀한다.

 

기호학적인 것들에 대해서, 핵심은 반복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형식적 구조들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 등이 아니다. 핵심은 이런 것들이 항상 물질적으로 육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뇌, 컴퓨터 데이터 은행, 종이, 공중 광고 안에 존재해야 하며, 그것들은 전 세계에 걸쳐 여행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어떤 "비물질적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형식적 구조들에 관해 말할 수 있지만, 그런 형식적 구조들은 결코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세계에 존재하고, 그래서 이 사실은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개입책들의 본성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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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