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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인간 조건과 관련된 심란한 생각

 

인간 조건과 관련된 심란한 생각

A Disturbing Thought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우리는 자연적 환경에서 진화한 자연적 존재자들이고, 호모라는 속이 진화함에 따라 선택되었던 신경 체계들의 유형들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설계된" 종류의 신경 체계다.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마음은 어떤 종류들의 특질들을 지니고 있는가? 몇 가지가 떠오른다.

 

1) 생물학적 존재자들이 다른 포식자들과 많은 경쟁들로 가득 찬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실시간으로 반응해야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 마음들은 분(때때로 초), 시간, 그리고 하루 단위의 지속을 선호할 것이다. 그런 마음들은 매우 작은 지속과 매우 큰 지속을 기록하는 데 매우 어려워할 것인데, 이것들은 식물 재배하기, 늑대 피하기, 또는 영양 꺾기에 대한 실시간 반응들과 큰 관련이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또한 그런 마음들은 동물, 부싯돌 같은 것들, 다른 사람들, 식물 등과 같은, 잠재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존재자들을 인식하도록 "배선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런 것들을 "진정으로 실재적인(really real)" 것들로 간주하고, 예를 들면, 구름 같은 것들은 결코 진정으로 실재적이지 않거나 그저 덧없는 존재자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3) 또한 그런 마음들은 모든 것에서 동기의도를 찾도록 "조립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동기를 식별하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동물에게 다가갔을 때 그 동물이 무엇을 할 가능성이 높은지 결정하는 것은 뿔에 받히지 않게 되는 데 중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결정하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 나를 죽일 작정인지 결정하는 데 중요하다.

 

더 나아가기 전에, 이런 인지 구조들에 대해 내가 제시하고 있는 진화적 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베르그송이 더 구미에 맞다고 알아챌 것이라는 점을 언급할 가치가 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지성(직관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에 대해 그가 품은 생각이다. 베르그송의 경우에, 지성은 "실용적인"(정교한 철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또는 공리적인 소명을 띠고 있고, 그래서 주로 조작될 수 있는 존재자들을 조작하기와 행위에 맞게 조정되어 있다. 행위는 작용을 가할 꽤 안정한 존재자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성이나 변화의 차원을 간과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 결과 지성은 존재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체계적인 왜곡을 생성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나는 이것 전부가 참이 아니기를 바라는데, 만약 참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그런 종류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 같은 존재자들에게 일련의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마음의 세 번째 특질은 우리가 결코 미신을 정말로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마음이 모든 것에서 의도와 동기를 찾도록 "배선되어" 있다면, 유사물활론적 견지에서 세상을 대면하여 국지풍, 지진, 암 등과 같은 것들을 신과 그 밖에 비슷한 것들으로부터의 형벌로 간주하는 일부 사람들이 항상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선험적 미신 능력"과 관련된 것이 존재하며, 그리고 불행한(그리고 행운의) 사건들을 동기와 의도의 결과인 것으로 다루려는 우리의 경향이 그저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칸트의 선험적 환영이라는 의미에서 거의 불가항력적인 사유의 경향이라고 항상 느낄 때 내가 걱정하는 최소의 것이다.

 

내가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이런 유형들의 인지 구조들이 문제들의 진정한 원인들을 인식하고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지닐 그런 종류의 함의들이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를 고려하자. 이것들은 둘 다 대규모의 익명적인 동역학적 체계들이다. 개, 완보동물, 바위, 그리고 집 같은 중간 규모의 존재자들을 둘러싸고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대규모의 체계들이다. 개별적 동기와 의도들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익명적이다. 그것들은 "창발적 체계(emergent system)"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자신이 자본주의 경제 체계 내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를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계는 그 체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 동의, 또는 지식 없이 그냥 잘 돌아간다.

 

여담으로, 나는 지난 이 세기 동안 익명적 체계들에 관해 수행된 모든 뛰어난 연구―언어학자들, 마르크스, 푸코, 알튀세, 동역학적 체계 이론, 복잡계 이론, (비신비주의적) 창발 이론 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회 이론들이 익명적으로 기능하는 체계들을 아직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선호하는 의도를 지닌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발생하기 위해 그것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작동하기 위해 그것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전부는 사람들이 어떤 교환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응할 때 이데올로기 비판이 제한적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그런 교환 체계가 구조적 부정, 위기, 착취 등을 생성하는 방식을 예증함으로써 자본주의가 긍정적이거나 좋다는 믿음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비판들 자체는 그리고 그것들만으로는 이런 특수한 교환 형식과 싸우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그런 체계를 교란하기 위한 전략들을 고안할지도 모르는 주체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지만, 상황은 이것보다 훨씬 더 음울하다. 마음이 앞에서 서술한 형식으로 인지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참이라면, 우리들에게 자본주의 같은 체계들은 구름처럼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은 결코 실재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 같은 털없는 유인원들은 그런 체계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 혐오증 같은 슬픈 정념들의 뿌리 깊은 인지적 원인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비참한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거나 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해 대단히 애쓰고 있다는 것과 실업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마음은 행위자, 동기, 그리고 중간 규모의 객체들의 견지에서 생각하도록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실업에 대해 책임이 있는 존재자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들은 이런 거시적 층위의 과정을 결코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다른 집단에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들뢰즈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항상 우리가 질문을 제기한 방식의 함수로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해결책들을 얻는다"(이런 맥락에서 들뢰즈는 "유대인 해결책"의 끔찍함을 인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자연화된 선험적 환영의 또 하나의 예로서 인종차별주의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지적 구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기괴한 "해결책들"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비통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지 않기를 열렬히 바란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현상의 원인으로서 모든 것 배후에 놓인 행위자들을 찾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거대한 규모의 익명적 동역학을 놓치고, 그래서 인과관계를 오인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 이런 구조들 때문에 우리는 특수한 정치인과 최고경영자들이 어떤 경제 현상의 원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기여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도 익명적이고 그들 자신의 의도들을 넘어서는 논리에 포획되어 있다는 점을 놓친다. 여기서, 예를 들면, 그저 다른 정치인을 선출하거나 기업의 몰락을 초래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는] 믿음은 인과관계를 오인할 것이다. 그것은 이런 현상들이 개인들의 결정이 아니라 대규모 체계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다른 유형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래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사유의 이런 자연화된 선험적 환영들을 극복할 수 있는가? 명백히 그것은 전적으로 가망이 없지는 않다. 물활론적 사유들이 흔히 우리의 마음을 왔다 갔다 할지라도(최소한 내 경우에는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물활론자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연과학의 비서사적인, 비동기적인 견지에서 세계에 관해 다소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지난 백 년 동안 사회과학과 심리학 같은 훨씬 더 복잡한 과학들도 점점 더 따라잡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털 없는 유인원 마음에는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대규모의 동역학적 체계들을 식별하기 위한 기법들을 고안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지 구조는 매우 다른 목적들(헤쳐 나가기, 생존하기, 먹기, 그리고 짝짓기)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식의 도구로서는 꽤 부적합한 반면에, 또한 우리는 그런 인지 구조의 한계를 벗어나는 길을 "개척할" 수 있었고, 그 구조를 괴롭히는 선험적 환영들을 무화시키기 위한 기법들을 점점 더 고안했던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렇지만, 더 긴급한 의문은 이런 인지 구조의 정치적 영향에 놓여 있다. 기후 변화와 자본주의(깊이 얽혀 있는 두 가지 것) 같은 것들에 대한 정치적 개입에 있어서, 우리는 전문 지식과 전문 지식을 획득할 시간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여전히 이런 종류의 구조의 궤도에서 대체로 움직이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의 인지 구조의 선험적 환영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이 의문이 매우 긴급한 까닭은 집합체들의 구성과 적절히 대응할 협동적 행위 형식들이 없다면 이런 체계들 내에서 개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